"독일에선 그 누구도 통일이 언제 올지 예측하지 못했지만 기회는 갑자기 찾아왔고, 단 1년 만에 '기적'처럼 통일이 이뤄졌습니다."

독일 통일을 이룬 주역 헬무트 콜(Kohl·85) 전 총리에게는 호르스트 텔칙(Teltschik·75)이라는 외교안보 보좌관이 있었다. 그는 콜 총리가 4개 전승국(미국·러시아·프랑스·영국) 및 헝가리·체코·폴란드 등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탁월한 협상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통일 외교 전략을 수립한 인물이다.

텔칙 전 보좌관은 다음 달 19일 열리는 제6회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ALC)에 참석해 독일 통일이라는 역사 현장에서 직접 겪었던 생생한 경험을 들려줄 계획이다. 그는 최근 본지와 인터뷰에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3주 뒤인 1989년 11월 28일 콜 총리가 연방의회에서 '10단계 통일 방안'을 제시했을 때, 우리는 '통일이 되기까지 10년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면서도 "막상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통일을 이행하는 동안 하루하루가 흥분의 연속이었다"고 회고했다.

호르스트 텔칙 전(前) 독일 총리 외교·안보보좌관은 이번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에서 독일이 어떻게 통일에 이를 수 있었는지 밝힐 예정이다. 아래 사진은 1982년 11월 로마를 방문하기 위해 전용기에 탄 헬무트 콜(왼쪽) 당시 총리와 텔칙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

―'기적 같은 통일'의 비결은.

"독일 통일은 엄청나게 빨리 진행됐음에도 총성 한 번 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기적'이라고 부른다. 평화적 통일에는 4개 전승국과 주변국의 묵시적 동의가 있었다. 당시 미국과 소련 사이에 갈등이 없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1990년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미국과 소련 사이에는 이미 독일 통일에 관한 중요한 정치·경제·외교적 결정이 끝난 상황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외교 협상은.

"콜 전 총리가 1990년 2월과 7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을 만나 나눈 대화다. 두 차례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가 독일 통일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인 게 독일 통일에 결정적이었다."

―어떻게 고르바초프의 입장 변화를 이끌어 냈는가.

"단순하다. '네가 나를 돕는다면, 나도 너를 돕겠다'는 원칙에 따라 상대방의 이해관계를 존중하고, 되도록 그들의 이익에 부합하고자 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콜 전 총리와 만나 수십년 동안 소련이 추진해왔던 분단 정책을 포기하고 통일을 받아들인 것은 혁명적인 전환점이었다. 나는 그 사이 모스크바를 오가며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에게 '콜 수상은 당신의 시장경제 개혁과 페레스트로이카를 위해 재정 차입을 최대한 지원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했다."

―독일 내 일부의 반대에도 조기 통일, 화폐 통합과 같은 정치적 결단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이유는.

"서독 지도부는 역사적 기회를 제때 알아보고, 그 앞에서 주저하지 않는 용기를 갖고 있었다. 당시 서독 경제는 1989년 GNP 4.5% 성장, 자본수지 1356억마르크 흑자 등 탄탄하고 균형 잡힌 재정 구조를 갖춰 자신감이 있었다. 다만 통일 속도는 온전히 동독 주민들이 결정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후 두 달 만에 25만여명의 동독 주민이 자유와 번영을 찾아 서독으로 넘어왔다."

―한반도 통일에 대해 조언한다면.

"25년 전 통일을 우려했던 서독 주민처럼, 한국에서도 통일 후 치러야 할 사회·경제적 비용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다고 들었다. 통일에는 당연히 비용이 따른다. 하지만 이것은 통일의 일부분일 뿐이다. 모든 한국인이 자유로워지고, 동북아시아 전체는 높은 수준의 안보와 평화를 얻을 것이다. 천연자원을 가진 북한에는 새로운 경제적 기회가 생길 것이며, 중국·러시아·일본과 협력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남한과 북한은 통일을 원해야 한다. 독일이 당시 어떻게 국제적 변화와 기회를 적절히 이용했는지에 대한 내용은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에서 이야기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