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인류가 인과관계를 이해하려고 고안한 최선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과학적 방법은 우리가 자연세계는 물론 일상생활에서 직면하는 현상들의 원인을 이해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다. (중략) 우리는 인류의 생존과 개개인의 더 큰 행복이 과학적, 합리적, 회의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까지 말해도 될지 모른다."
과학주의 운동으로 유명한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과학사가인 마이클 셔머(Shermer·61)의 말이다. 셔머는 리처드 도킨스와 더불어 1급 대중과학서의 저자로도 손꼽히는 학자다. 국내에도 책이 여럿 번역돼 나와 있다.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부터 '믿음의 탄생', 최근에는 '경제학이 풀지 못한 시장의 비밀'에 이르기까지 주로 '믿음'과 '지식'의 문제를 다뤘다. 범람하는 '지식'의 시대에 무엇이 참으로 기댈 만한 것인지 문제 삼는다.
일찍이 국제적으로는 ‘스켑틱(Skeptic)’이라는 과학 잡지의 발행인이자 편집인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위 인용문의 출처도 1992년 ‘회의주의 학회(Skeptics Society)’를 설립하고 창간한 잡지 ‘스켑틱’에 출사표처럼 내놨던 글이다. 제목이 ‘회의주의 선언(Skeptical Manifesto)이다. 그때 만든 계간 과학 잡지 ‘스켑틱’을 발판으로 그는 지금도 ‘과학적 회의주의’의 대중적 확산 최전선에서 뛰고 있다.
그 ‘스켑틱’이 이제 한국에도 상륙했다. 국내 바다출판사가 이 잡지와 한국판 출간 계약을 맺고 3월 창간호를 냈다. 독서 시장의 전반적인 위축과 출판사들의 경영 악화를 감안하면 적잖이 ‘용감한’ 도전으로 보인다. 바다출판사의 김인호 대표와 박선진 과학전문편집자를 만나 출간 경위와 의미, 전망에 대해 들어봤다.
-어떤 잡지인가?
미국의 스켑틱소사이어티가 내는 과학 잡지다. ‘스켑틱’이라는 말이 ‘회의론자’라는 뜻이다. 스켑틱소사이어티는 1992년 미국에서 당시 팽배해 있던 사이비 과학에 맞서 진정한 과학 정신을 고취하고 비판적 사고를 함양하기 위해 설립됐다. 몇몇 유력 과학자들 주도로 창립된 비영리공익단체다. 실질적인 리더가 마이클 셔머다.
-이 신념의 시대에 왜 회의주의인가?
검증 받지 않은 신념은 위험하다. 쉽게 독단에 빠질 수 있다. 스켑틱이 표방하는 회의주의는 과학적 회의주의를 말한다. 창간호 머리말에도 나와 있지만 과학적 회의주의란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이론을 세우고, 어떤 현상에 대한 설명을 검증하는 방법론을 말한다. 모든 종류의 주장과 사상에 대해 증거와 이성을 이용해 검증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믿기 전에 증거를 요구하는 것뿐이다.
-어떻게 국내에 들여오게 됐나?
과학책을 많이 내면서 예전부터 이 잡지를 주목해 왔다. 셔머 책도 두어 권 내면서 그의 생각에 관심이 갔다. 잡지를 국내에 들여오려는 생각을 해본 것은 10년도 넘는데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용이 미국을 위시한 서구 중심으로 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도 때가 됐다 싶어 내게 됐다.
-어떤 독자들을 염두에 뒀나?
과학적 회의주의가 받아들여지려면 사회의 지적 수준이 어느 정도 성숙해야 한다. 지금까지 국내에 나온 과학잡지들은 대개 정보나 지식 중심이었다. 반면 스켑틱은 지성지라고 할 수 있다. 메타과학(과학에 대한 탐구)적인 면이 있다.
지식 정보나 기술에 대한 이해는 어느 정도 무르익고 난 후에, 그것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관점의 문제가 대두될 때 필요한 잡지다. 우리가 생각하는 주 독자층은 과학에 관심 있는 일반인부터 지적 소양이 좀 있는 지성인들까지로 본다. 아주 학술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 교양지는 아닌 중간 수준의 지성지로 보면 되겠다.
-대중 과학지식 잡지라고 부르면 될까?
대중이라고 하면 계몽주의적 뉘앙스를 준다. 마치 대중이 모르는 과학 지식을 우리가 알기 쉽게 설명해 주겠다는 어감을 준다. 그건 아니고 관점을 재검증하는 것이다. 지식 자체의 기본에 대해 다시 검토하는 것이다. 셔먼이 회의주의 선언문에서 밝혔듯이, 어떤 ‘이념(ism)’이 아니라 ‘접근법(attitude)’을 표방한다.
-지금까지 반응은?
공식 발매일이 3월 1일이었는데 홍보나 판촉 활동을 많이 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초판 4000부가 다 나가서 재판에 들어갔다. 자발적인 정기구독 신청자도 지금까지 500명을 넘었다. 그것도 2년 정기구독이 대부분이다. 짧은 시간에 주문이 몰려 한 며칠은 우리가 대처하는 데 애를 먹었다. 반응이 생각보다 빠른 편이다.
주문 전화가 걸려오는 걸 보면 교수, 의사, 전문적 종사자, 엔지니어링 회사나 기업 사람들, 그리고 대학원생들이다. 이 잡지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이제 국내에도 과학에 대해 정보 차원 이상의 지식을 요구하는 수준의 독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요즘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도 연결되나?
인문학을 어디까지로 보느냐에 달렸지만, 국내에서 인문학이라고 하면 흔히 문사철(文史哲) 중심이었다. 인문학이 말 그대로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라고 한다면, 세상에 대한 이해, 특히 물질 세계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 과학에서 나온다. 지금은 현대 과학의 성과들이 문사철이라는 고전적 인문학에 패러다임 전이를 요구하는 상황이라고 본다.
고전 공부도 예전 철학의 복기도 중요하지만, 근대 이후 발견된 물질 세계에 대한 정보나 이해가 필수적인 시대다. 그렇다면 지금 인문학도 외연을 과학까지 넓혀야 한다. 어떤 면에서 과학이야말로 당대 철학이라고 할 수도 있다.
-과거 지성지라고 하면 사상계부터 70-80년대 문지와 창비, 그 다음 ‘역사비평’ ‘철학과 현실’, 최근에 와서는 문학 계간지이긴 하지만 문학동네가 주목을 받는 정도 같은데.
다른 것들은 문학이나 사회에서 출발하든지 아니면 사회과학적인 시각에서 출발한다. 반면에 스켑틱은 기본적으로 과학적 회의주의라는 명확한 방법론을 갖고서 다양한 주제들을 다룬다. 이번 첫 호는 우주론이지만 다음은 다이어트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스켑틱는 별도의 영역이 따로 없다.
-그동안 우리 사회의 지식 흐름이나 계보를 보면 지금이 다소 공백기나 소강 상태 같다는 생각도 든다.
잡지들마다 자기 시대의 역할이 있다. 역사 의식이 중요할 때는 역사 중심의 지성지가 있었을 테고, 인간 이해가 필요할 땐 문학이 중심이 됐을 테고. 지금은 과학의 중요성을 반영할 때가 아닌가 한다.
지금 문사철 쪽의 인문학을 보면 사회 변화나 지식의 축적 속도를 못 따라가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 분야 거장이나 거두라는 분들도 가끔 얘기하는 것 보면 ‘(최근 변화 흐름에 대해) 팔로잉을 안하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갈수록 깊어지는 분들도 있지만, 적잖은 분들이 표면적인 정보나 지식을 가지고 인간을 이해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예전에 봤던 텍스트에 갇혀 있다는 얘기다. 사실은 텍스트라는 게 자신이 읽은 책이 아니라 세계여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이 잡지가 그런 쪽으로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외국의 경우 과학 지식의 대중화가 온-오프 라인 공히 활발한데 국내는 미진한 감이 있다.
이제 한국 사회에도 합리적인 토론의 기초에 대한 갈증 같은 게 있다고 본다. 주의주장이 아니고 태도나 접근법 자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 왔다고 본다. 국내에서는 과학이 좁게 이해되지만 사실은 어떤 합리주의적 태도를 말한다. 그런 것을 여러 소재로 엮는 것이 지금 우리가 당면한 중요 과제인 것 같다. 합리적인 지성의 유통 말이다. 우리는 출판사니까 잡지를 플랫폼으로 해서 그런 문화의 확산에 기여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
-우리 사회 지식이나 담론계는 이념성이 강한 데 비해 과학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최근에 어떤 분으로부터 스켑틱 한국판에 어느 분 글을 받아 실어보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과학을 잘 이해하는 분이라고 했다. 강연도 많이 하더라. 근데 글을 보니 과학 정보 몇 개를 읽고 사견화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고 싶은 것만 읽는 거다.
누군가가 어떤 주제를 강의 소재로 활용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제는 누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든 입증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실제가 뭐냐라는 게 중요한 시대로 가고 있다. 스켑틱이 그 과정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창간호 커버 스토리가 ‘시간 여행은 가능한가’이고 또다른 ‘포커스’ 주제로 ‘우주가 여러 개라고?’를 다뤘다. 다 번역인가? 국내판에만 실은 글은 없나?
창간호에는 국내 저자의 글을 한 편 실었다. 다중우주론에 관한 해설 기사다. (박병철 대진대 초빙교수의 ‘인플레이션과 다중우주’) 국내에서 말들은 많은데 이해가 쉽지 않은 주제다. 국내 학자에게 맡겨 풀어 설명했다. 국내 필자가 쓰는 콘텐츠는 앞으로 좀 더 늘여갈 생각이다.
-미국판과 동시 출간인가? 한국판은 어떤 식으로 내게 되나?
한국어판은 미국보다 한 호 늦게 낸다. 미국판 최신간과 DB에서 좋은 글을 선별하고 한국어판 콘텐츠를 추가하는 식이 될 것이다. 스켑틱이 20년 됐는데 시간을 초월하는 불멸의 주제들, 지금도 읽힐 만한 글들이 많다. 가령 이번에 실린 셔머의 ‘회의주의란 무엇인가’라는 글은 예전에 실린 글인데, 스켑틱의 기본 정신을 보여준다.
우선 초기에는 미국 스켑틱이 한국에 자리잡는 과정에서 일정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잡지의 정체성이나 논의 수준 같은 것을 알리는 차원에서 1년 정도는 미국판에서 골라 편집하는 식으로 갈 계획이다. 그 다음에는 차차 한국 사회에서 과학적 회의주의 입장에서 점검해봐야 할 것들이 있다.
-번역 문제도 중요한 숙제일 텐데.
전문번역회사와 계약을 한다. 번역 테스트해서 선별하고 피드백해서 탈락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이런 글 번역해낼 수 있는 사람들 훈련시키고 관계 맺는 게 중요하다.
사실은 더 중요한 게 편집자다. 번역은 문제가 있으면 다시 하면 된다. 원고를 정확히 읽고 논점을 파악해서 맥락을 잡아서 자리잡는 편집자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하다.
-편집 과정에서 어려움이라면?
전문성 확보다. 원고는 전문번역회사를 통해 맡기는데 편집 과정에서 사실 관계나 해석의 정확성 같은 것을 계속 검증해야 한다. 논조도 신경 써야 하고. 나(박선진 편집자)도 과학을 전공했지만 모르는 분야가 있다. 그 부분에 대해 감수를 맡길 전문가 확보도 쉽지 않다. 이제 잡지가 알려지면 좀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외국 도서나 잡지를 포함한 콘텐츠의 생산과 유통 주기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 계간지를 번역해 소개하는 과정에서 시차나 지체 현상이 생길 우려는?
스켑틱이 단순 정보나 기술 전문지라면 낼 생각을 안 했을 거다. 의미도 없고. 그런 정보는 3개월 시차를 두고 뒤늦게 국내에 알릴 이유가 없다. 스켑틱 글은 20년 전 것도 맥락에 따라 우리가 필요하면 갖다 쓸 수 있다. 과학의 지평은 20년 안에 바뀌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에 빠지긴 했는데, 10년 전에 제러드 다이아몬드를 인터뷰한 게 있다. 내용이 지금 읽어도 손색이 없다. 그 때 한 이야기를 지금까지 계속 책으로 쓰고 있구나 싶더라.
-자신 있다는 얘기네.
상업적으로도 어느 정도 자신 있다. 독서량이 줄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과 상관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읽을거리를 찾고 있다. 그저 쉽고 재미있게 쓴 게 대중적인 책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5000만 국민 중에 굉장한 문제 의식과 지적 호기심이 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인다. 그런 사람이 수만 명은 된다. 그런 사람들의 니즈에 맞게 적시에 공급해 주면 못 팔 이유가 없다.
물속의 물고기는 물색이 뭔지 모른다. 물색은 어부만 안다. 우리는 물고기다. 하지만 어디에서 살고 어디 가면 죽는지는 안다. 수온을 따라 움직이는 거다. 그게 물고기의 장점이다. 밖에서 보는 트렌드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안에서 흐름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 수 있다.
-그래도 출판사들은 책이 안 팔린다고들 걱정이다.
원래 책은 잘 안 팔리는 게 맞다. 책이 매스미디어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고 있는 편이다. 생각해 보라. 책 한 권을 독파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경제력도 있어야 하고 지적 능력도 필요하다. 1년에 5만종의 책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각 개인별 취향에 따라 골라 읽는다고 보면, 각 권 별로 몇천 권씩 돌아가는 게 맞다.
그러니까 정말 필요한 독자에게 필요한 책을 공급하느냐가 문제지, 한 권을 수만 부씩 파는 것은 정상은 아니라고 본다. 각 권이 제 역할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바다출판사는 베스트셀러를 지향 안 하나?
물론 우리도 베스트셀러가 나왔으면 한다.(웃음) 내가 한 말은 책의 본성에 대한 얘기다. 원래 안 팔리는 게 정상이라는 걸 전제로 하고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책은 영화와 달라서 나는 보기 싫지만 애인이 보자고 해서 보는 게 아니지 않나.
한국 사회도 이미 지식 사회이기 때문에 점점 지식 사회에 필요한 책을 제대로 공급해주면 팔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몇십만 부짜리 여러 종 팔아봤지만 그런 책이 있고, 이런 것은 그냥 5000부, 만 부 팔면 된다.
-전자책 쪽은 어떻게 전망하나?
스켑틱 경우는 전자책 버전을 종이잡지보다 한 호씩 늦게 내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나는 e북에 대해 신중한 편이다. 아직 효용도가 낮은 것 같다. 종이책에 비해 가격도 싸고 검색도 되는 장점이 있는데도 안 번지는 것을 보면 이유가 있다. 나는 결정적인 차이가 물성에 있다고 본다. 종이책은 물건이지만 e북은 물건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건 결국 물건이지 컨텐츠가 아니라고 보는 거다.
미국 아마존의 킨들 모델은 내가 보기에 물건을 판 것이라고 본다. 물건을 샀더니 거기에 컨텐츠가 있는 거다. 한국에서는 아직 확고한 플랫폼이 없기 때문에 물건에 대한 확신이 없는 거다.
아마존이 언제 들어올지, 국내에서 어떤 플랫폼이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게 사람들의 사용자 인터페이스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까지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걸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