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안'의 韓銀] [下] '物價(물가) 안정' 집착 벗어나 美Fed(美 중앙은행)처럼 경제 살리기 팔 걷어붙여야

입력 2015.03.03 03:04

[경제정책 주도할 때 됐다]

물가 안정은 과거의 목표… 지금은 디플레와 싸울 때
버냉키의 극단적 돈풀기처럼 경제 숨통 트이게 해야
펀드 만들어 부실채권 사는 등 창조적인 정책 연구 필요

"전 세계 중앙은행 가운데 신(新)상품 개발에 가장 관심이 없는 곳이 아마 한국은행일 것이다."

한 전직 고위 관료는 2일 한국은행을 이렇게 평가했다. 수출과 내수가 악화되고, 유례없는 저물가에 한국 경제가 시달리고 있지만, 한은은 여전히 물가만 쳐다보며 한 걸음 비켜서 있을 뿐 적극적으로 새로운 정책 수단을 내놓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은 한은이 과거 '재무부 남대문출장소'로 불리던 시절로부터 벗어났는데도 여전히 정부로부터 독립을 확보해야 한다는 트라우마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한은이 새로운 시대에 맞춰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통해 경제정책을 주도하고 역할을 확대해야 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경제를 돌아가게 하는 게 한은의 역할

한국은행법 1조 1항은 한은이 물가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은은 물가안정목표제(2.5~3.5%)를 운영하고 있는데, 2012년 5월(2.5%) 이후 물가상승률이 이 목표치를 밑돌고 있다.

한은의 일차적인 정책 목표가 사라진 것이다.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5~0.6% 선에 그친다는 게 정부 추정이다. 담뱃값 인상 요인(0.6%포인트)을 제거하면 마이너스 상승률이다. 한 전직 경제 관료는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 파이터(물가 상승을 막는 투사)로 생겨났지만, 지금은 반대로 중앙은행이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과 싸워야 한다"면서 "한은은 중앙은행의 역할이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증현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21세기 경제·금융 상황이 급변하면서 중앙은행이 고용 창출과 성장에도 가치를 둬야 한다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라고 말했다. 적정한 물가와 적정한 성장률을 더한 경상성장률을 끌어올리는 것을 한은의 정책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요국 중앙은행의 비전통적 정책 수단 정리 그래픽

미국 의회는 1977년 연방준비은행법을 개정해 고용 극대화와 물가 안정을 중앙은행의 2가지 책무로 명시했다. 이른바 연준의 '이중 책무(dual mandate)'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유럽중앙은행(ECB)도 물가 안정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고용에 신경을 쓴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은도 이런 점을 알고 있지만,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피하려 하는 입장이다. 한은 관계자는 "한은에서 기준금리를 조정할 때 '성장과 경기를 뒷받침하는 수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실업 문제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하고 있다는 뜻"이라며 "물가 안정이라는 목표를 흐릴 수 있어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간에 자금을 흘려보낼 새로운 경로를 발굴해야

저성장, 저물가의 늪이 깊어지면서 한국 경제는 돈이 돌지 않는 '유동성 함정'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돈이 돌지 않으니 경기 회복도 어렵다.

전문가들은 한은이 이런 때일수록 돈을 풀 뿐만 아니라 돈이 도는 새로운 유통 통로를 개발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은 "버냉키가 의장일 때 미국 연준이 중앙은행의 매입 대상 채권의 범위를 확대하는 방법으로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했던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벤 버냉키 의장이 중앙은행이 채권 시장에 직접 개입해 채권을 사들이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극단적 통화정책으로 세계경제를 벼랑에서 구했다는 것이다. 또 그는 2012년 말 실업률이 6.5%까지 떨어지고 물가상승률이 2.5%에 도달하기 전에는 기준금리를 올리지 않겠다는 '포워드 가이던스(forward guidance·선제적 정책 안내)'란 제도도 도입했다. 시장이 중앙은행을 신뢰하게 만든 것이다.

국공채뿐 아니라 금통위가 정한 채권을 사들일 수 있는 한국은행법 68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제언도 나온다.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은 "예를 들어 한은이 가계 부채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적극적으로 펀드를 만들어 펀드가 부실 채권을 매입할 수 있게 해주든지, 혹은 펀드가 발행하는 유동화 증권을 한은이 사는 방법 등으로 자신의 기능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동향분석실장은 "한은이 푸는 돈이 직접 실물(實物)에 투입될 수 있는 정책 수단을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금융중개지원대출 한도를 대폭 확대하는 방안들이 검토될 수 있다. 금융중개지원대출은 한은이 발권력을 동원해 중소기업에 저리(低利) 자금을 지원하는 대출 수단이다. 이주열 한은 총재도 "상황에 맞게 탄력적으로 운영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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