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다. 먹을거리가 풍성하지 않은 시대였다. 영덕 바닷가 근처의 그 작은 어촌 마을엔 60가구 정도가 모여 살았다. 과자란 손쉽게 맛볼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한과도 마찬가지였다. 집안에 제사가 있거나 명절이 와야만 겨우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생각해보면 대단한 한과도 아니었다. 시장통에서 산 약과 몇 개, 찹쌀로 만든 네모 모양 산자 몇 개, 아이 손바닥 만한 옥춘 사탕이 전부였다. 그걸 한꺼번에 먹질 못했다. 한나절을 아껴가며 먹었다. 빨다가 손에 쥐고 있다 다시 빨기를 반복한 옥춘 사탕에 손때가 타도 더러운 줄 몰랐다. 잘 부스러지는 산자가 땅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얼른 주워 입에 넣었다.
그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난 건 십 년도 더 지나서였다. 선 자리에 나온 자그마한 몸집의 아가씨가 신문지에 둘둘 말아 온 약과 몇 개를 건넸다.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형부가 한과 공장을 운영한다고 했다. 그녀는 만날 때마다 정성스레 약과를 싸왔다. 한 번 볼 걸 두 번 보고, 두 번 볼 걸 세 번 보면서 정이 쌓였다. 결혼을 결심했다. 결혼한 뒤엔 그 한과 공장 일을 돕게 됐다. 한과 맛에 빠져 만난 사람과 평생의 가약을 맺고, 그게 계기가 돼 지금껏 한과를 만들고 있다. 한과는 ‘정해진 내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전통한과 명인(名人), 대한민국 한과 명장 1호. 김규흔(金圭欣·59) 신궁(新宮) 전통한과 대표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다. 누가 전수해 준 기법을 그대로 답습해 얻은 명성이 아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맛을 상상하고, 실험하고, 때론 실패의 쓴 맛도 두루 경험한 끝에 얻어낸 결과물이다. 지금도 “우리나라 한과에서 ‘최초’ 붙는 건 내가 다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고 자부할 정도다. 꿀약과, 홍삼약과, 녹차꿀약과, 초코 유과 등 150여 종의 한과를 개발했다. 지금도 매일 달라지는 온도와 습도에 따라 레시피를 조정해 가며 한과 만들기에 열중하는 장인이다.
그가 최근 ‘한국의 전통한과(엠아이디)’라는 책을 냈다. 그냥 한과 장인의 레시피 책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다. 한과의 역사부터 재료, 기법에 대한 소개와 함께 한과와 동행하며 겪은 자신의 일화까지 꼼꼼하게 담아낸 ‘한과 백과사전’이다. 한과 명인이 들려주는 한과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었다.
지난 13일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대목인 설 연휴를 앞두고 정신없이 바빠 보였다. 휴대전화가 쉴새없이 울렸다. “빨리 이야기 마치고 가야 한다”고 했다. 한과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책에 다 썼는데 뭘 또 묻느냐”고 툴툴거렸다. 그래도 막상 입을 열자 말이 술술 나왔다. ‘남과 다른 한과’를 만들기 위해 쏟았던 땀방울에 얽힌 이야기는 시간을 아끼지 않고, 단어 하나 빼놓지 않고 빼곡이 풀어 놓았다.
-한과 만드는 게 이렇게 업(業)이 될 줄 알았나?
어릴 때야 한과 먹는 게 좋았지, 특별히 만드는 게 좋다고 느끼거나 한 건 없었다. 내가 어릴 때가 한국전쟁 직후다. 우리 국민소득이 60달러도 안 되던 시대다. 제사나 차례 때나 볼 수 있던 한과에 늘 눈독 들이곤 했다. 어릴 때 배가 아프다고 하면 할머니가 찹쌀로 만든 산자를 조금씩 떼어 주시던 기억이 있다. 아, 이렇게 맛있는 게 있나 했던 거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면서 한과와의 인연이 시작됐다고 했는데.
그렇다. 늘 어린 시절 추억으로 아련하게 생각했던 한과가 결혼할 무렵 표면으로 나오게 된 것 같다. 서울로 상경한 뒤 세 들어 살던 집 주인 아주머니가 화장품 방문판매를 하시던 분이다. 나를 좋게 보시고 중매를 서 준다고 하셨다. 선 자리에 나갔는데, 이 아가씨가 신문지에 약과를 몇 개 싸서 나온 거다. 형부가 한과 공장을 운영한다고 했다. 그 약과를 보니 어릴 때 먹던 그 맛있는 한과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 귀한 걸 내가 이렇게 마음껏 먹어볼 수가 있나. 그러다 보니 한 번 볼 거 두 번 보게 되고, 두 번 볼 거 세 번 보게 되고 하더라. 약과도 맛있고, 옛 추억도 떠오르고. 정이 쌓였다. 마치 내 어머니 같다 싶은 푸근한 맘도 들어 결혼하게 됐다. 그 뒤에 한과 공장 운영을 돕기 시작했으니, 결혼하면서 삶이 바뀐 거다.
-한과 만드는 공정을 직접 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나?
그렇다. 하나하나 다 손으로 만들던 시절이다. 먹을 줄만 알았지, 한과가 만들어지는 데에 들어가는 시간과 공에 깜짝 놀랐다. 그때만 해도 한과 만드는 일을 평생 할 줄은 몰랐다. 동서 동생이 군대에 간 사이에 일을 돕는 거였고, 내 임무는 관리자였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꼭 한과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다. 동서와 아내, 공장 직원들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하면서 조금씩 만드는 법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2~3년쯤 뒤엔 한과 공장을 나와 독립했다.
-한과를 배우며 가장 어려웠던 점은 어떤 건가?
올해로 한과 만든 게 35년째다. 그런데 지금도 너무너무 어렵다. 결과물이 매번 똑같이 나오질 않는다.
-정해진 레시피가 있는 게 아닌가?
여러 상황이 변수로 작용한다. 김규흔표 약과, 유과를 만들기 위해 고려해야 할 공정들이 많다. 나는 재료부터 미리 계산한다. 유과를 예로 들어볼까. 물 좋고 공기 좋은 포천 농가에서 특정한 종류의 벼를 키워달라고 계약 재배를 한다. 그걸 수확해서 독에 넣고 물을 붓고 삭힌다. 몇 도에서, 며칠간 삭힐 때 가장 맛있는 결과물이 나오는지 일일이 기록한다. 그렇게 단계를 구축해 나가는 거다.
약과를 만든다고 치자. 내일이 약과 만드는 날이라고 치면, 제작노트 3년치를 꺼내서 확인한다. 2012년 2월 14일 약과 만들 때 온도, 습도가 어땠는지, 어떤 레시피로 만들었는지, 그 맛은 어땠는지. 3년치 기록을 하나하나 비교해가며 내일의 날씨를 감안한 최적의 레시피를 조정해 나간다.
-언제부터 제작노트를 썼나?
처음부터 썼다. 머리가 안 따라주니 무조건 적었다. 일할 때 늘 곁에 두는 게 수첩과 펜이다. 금고 속에 그 동안 빼곡하게 기록해 놓은 수첩을 모두 보관해 뒀다. 이제 그게 수십권이 됐다. 늘 꺼내보곤 한다.
-미각도 굉장히 예민해야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글쎄, 미각이 예민하다기 보다는 이런 거다. 예를 들어 어떤 분이 오늘 만든 내 약과를 드셨다고 해보자. 그 분이 "이렇게 맛난 약과는 처음 먹어본다"고 말씀하시는 거. 그리고 그 분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생애를 돌아보면서 "그때 먹었던 그 약과 한 번만 더 먹었음 소원이 없겠다" 하시는, 그런 한과를 만들자. 매번 그런 마음으로 만드는 거다. 물건만 많이 파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렇게 정성들여 만들어야 대중화에 성공하고 세계화에 성공하지 않겠나.
-‘남과 같이 해서는 남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게 신조라고 했는데, 설명이 듣고 싶다.
이런 거다. 쌀 한가마니가 80킬로그램 아닌가. 거기에 쌀이 몇 톨이나 들어가는지 세어본 적 있나? 한과를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원가가 어떻게 되는지 계산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내가 워낙 절박하니 수도 없이 쌀알을 세어봤다. 따져보니 쌀 한가마니에 대략 400만톨 정도 나오더라. 쌀 한가마니 값이 18만원 정도니, 한 톨 원가가 0.045원 나온다. 그럼 유과 한 개 만들 때 쌀이 얼마나 들어가나, 22톨 정도 들어간다. 유과 한 개 만드는 데에 0.99원, 1원도 안 든다는 계산이 나온다. 인건비도 다 합치고 해야 원가가 나오겠지만 주재료의 가격이 이만큼 싸다. 우리가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쌀 농가가 망한다고들 걱정하는데, 쌀 수입해서 이렇게 가공해서 팔면 남는 장사 되는 거 아닌가? 남과 다른 방법으로 헤쳐나갈 궁리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얘기다.
처음 한과 공장을 차렸을 때, 나는 열 평짜리 자그마한 공장 주인이었다. 납품할 곳이라고는 전통시장 밖에 없던 시절이다. 다른 한과 공장에 비해 생산량도 딸리고, 납품하는 가게 수도 적었다. 규모로는 경쟁이 안 됐던 거다. 똑같은 원료로 똑같이 만들면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과 다른 걸 개발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남들이 둥그런 모양의 똑같은 한과를 찍어낼 때 나는 가장자리를 더 예쁘게 세공하고 기술료를 더 얹었다. 명절 한 철 지나면 다른 업체도 그걸 따라한다. 그러면 난 또 더 새로운 거, 더 예쁜 걸 만들어 또 약간 더 비싸게 판다. 그런 식으로 남과 다른 걸 계속 만들었다. 연꽃모양 약과, 모약과, 긴 약과 하는 식으로 모양을 바꿨다. 그 뒤엔 계피맛, 생강맛 약과 등으로 맛을 바꿨다. 미국에 가보고는 초콜릿 묻힌 한과도 만들었다. 그렇게 150종 넘는 한과를 개발했다. 포장도 끊임없이 바꿔봤다. 악착같이 공부하며 새로운 시도를 계속했고, 약속한 기일엔 어김없이 납품했다. 그렇게 해서 경쟁력을 키워나간 거다.
미래에 대한 공부도 마찬가지다. 남과 달라야만 한다. 나는 미래의 유통 과정이 어떻게 변화할지 끊임없이 공부했다. 대학 졸업장은 없었지만, 무려 12개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수업을 들었다. 그래도 배움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는데 최근 드디어 대학 졸업장까지 받았다.(그는 이달 6일 신한대학교 호텔조리학과를 정식으로 졸업했다) 전통시장에 납품하던 경쟁업체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가 새로운 한과를 얼마에 만들어 얼마에 파나 그런 동향만 살폈다. 나는 끊임없이 공부한 덕분에 대형 마트가 들어서고 하는 변화에도 적응할 수 있었다. 남들은 전통시장이 죽어서 큰일이라는데 나는 오히려 납품할 곳이 더 많아지더라. 남과 똑같이 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하면서 공부를 병행하느라 시간 관리가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일을 해야 하니 대학은 야간으로 다녔다. 오후 4시반~5시 되면 학교에 갔다가 집에 가면 밤 11시 반, 씻고 자면 밤 12시였다. 그러면 새벽 4시쯤 일어났다. 회사에 일찍 가서 전날 저녁 학교에서 배운 걸 복습했다. 오전 8시부터는 회사 일에 집중하고,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하고, 또 만들고. 퇴근하자마자 학교 가고. 그렇게 산 거다. 순간순간 집중력이 엄청나게 필요한 거다.
-책에는 프랑스 마카롱, 중국 월병 등 세계 과자 이야기도 함께 실었다. 외국 과자도 연구했나?
그렇다. 사무실에 가면 전 세계 50여개국에서 사온 과자들이 쫙 깔려있다. 오며가며 끊임없이 눈으로 보고 자극받도록 가까이에 둔다.
-제일 참고가 많이 됐던 건 어느 나라 과자였나?
일본 과자가 가장 충격적이었다. 처음 일본 과자를 접한 게 1990년쯤, 한창 내가 잘 나간다고 자부하던 시절이다. 우리 공장 과자가 적게 납품되거나 하면 시장 사람들이 죄다 날 찾아오곤 했다. 재래시장의 대장노릇 하던 시절이라고나 할까. 제과·제빵 책을 보던 중 우연히 일본에서 ‘모바크쇼’라는 빵 박람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잡지사에 관람 신청을 하고, 처음으로 외국에 나가게 됐다.
그런데 가보고 완전히 무너졌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된 심정이었다. 사지 않으면 미칠 만큼 예뻐보였다. 껍데기를 벗기면 속에 새로운 맛이 숨어 있고, 또 새로운 맛이 숨어있고…. 그 때 큰 자극을 받았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과의 개별 포장을 시도하고, 한과마다 포장 색도 달리해 봤다. 모험도 했다. 한과 속에 앙금을 넣어보기로 한 거다. 당시 돈으로 1억원이라는 큰 돈을 들여 기계까지 만들었는데, 안타깝게도 당시 반응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요즘 사람들이라면 새로운 시도라고 먹어보기도 할 텐데, 시대를 너무 앞서 간 셈이다. 결국 그 기계는 고철이 됐는데, 요즘은 그 기계가 있으면 좋겠다 싶은 아쉬움도 든다(웃음).
-앞으로의 바람이나 꿈이 있다면?
한과의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한과는 단순한 과자가 아니다. 한과 없이 잔치도 못하고, 제사도 못 지내지 않나. 우리의 문화 그 자체다. 이번에 쓴 책에서도 한과가 세계 각국의 여러 과자에 결코 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2008년 세운 한과문화박물관 한가원 역시 우리나라 현대인과 세계에 한과를 알리는 활동을 해 나가고 있다.
다음 단계로는 전문 한과 연구소가 세워졌으면 좋겠다. FTA 때문에 쌀 수입하게 돼 죽겠다는 소리만 하지 말고, 우리 기술로 가공해 내보내면 이길 수 있지 않겠나? 그런 의미에서 국가 차원에서 전문 연구소를 설립해 가공 기술을 연구했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또 세계 각국에 우리 한과를 만드는 사람이 퍼져 나가도록, 전문 교육도 필요하지 않겠나. 나도 제자를 키우고 있지만, 한과 마이스터 대학을 설립해야 한다고 본다. 대학 나와서도 취업 제대로 하지 못할 바엔, 한과 장인으로 제대로 성장해 전 세계로 진출할 수 있도록 키우자는 거다.
-자녀들이 한과 사업을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나?
물론이다. 애들한테 가르치고는 있는데 만드는 건 잘 못하더라고(웃음). 자녀가 모두 일을 배우고 있다. 아들은 호주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왔고, 내 밑에서 일을 배우고 있다. 딸은 한국과 호주에서 디자인 공부를 했고, 돌아와서 이화여대 식품영양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한과박물관 부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둘 중 하나라도 잘 해 나가면 가업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 한과 명장 김규흔은
국가 지정 한과명인(유과·약과 부문)이자 대한민국 한과명장. 신궁 전통한과 대표이자 한과문화박물관 ‘한가원’ 관장이다. 초코유과, 한과 제조 자동화 시스템, 한과 낱개포장, 천연성분 개발을 통한 한과 유통기한 연장, 키토산·인삼·녹차 등을 이용한 기능성 유과 개발 등 다양한 시도로 한과 발전에 앞장서 왔다.
1981 삼흥제과 설립/신궁병과 설립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협력업체
1988 서울 올림픽 선수촌 한과 납품
1992 한국 전통식품 제조업체 지정(농식품부)
1994 '쌀을 주성분으로 하는 약과 제조 및 방법' 특허출원
1995 '김규흔 대표' 신한국인 선정 및 시상(청와대), 산업포장 수훈(제2897호)
1999 '저장성 및 식감을 증진시킨 유과 제조방법' 특허출원
2000 '한국 전통식품 세계화를 위한 품평회' 한과부문 최우수상 수상, 제3차 ASEM 다과상품 공급업체 지정
2001 신지신 농업인 선정, 2001 전국 관광기념품 공모전 초코유과 입선
2003 석탑산업훈장 수훈(제2180호), '조직경화가 지연되는 약과의 제조방법' 특허출원
2004 '전통식품 세계화를 위한 품평회' 금상수상
2005 '전통한과(유과·약과) 제조기능 식품명인' 지정(농림수산식품부)
2007 설·추석 대통령 선물세트 납품
2008 한과문화박물관 한가원 개관
2013 고용노동부 지정 '대한민국 한과명장 1호(약과분야)' 지정
2014 고용노동부 산업현장교수 지정, '녹차를 함유한 전통한과 및 그 제조방법' '홍삼을 함유한 전통한과 및 그 제조방법' 특허등록
◆ 한국의 전통과자
김규흔 지음 | 엠아이디 | 320쪽 | 2만원
-최초의 한과기록, 삼국사기
우리의 전통과자인 한과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일본의 나라시대에는 맥병(貊餠)이란 과자가 있었는데 맥(貊)은 고구려 민족을 가리키므로, 이미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타래과나 강정류의 과자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 기록상으로도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과자의 존재가 확인되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한과에 대한 가장 빠른 기록은 삼국유사 '김유신전'에 수록돼 있다. 613년 신라 김유신은 고구려 첩자인 백석이란 사람의 꾐에 빠져 납치될 뻔했다고 한다. 이때 내림, 혈례, 골화 등 세 곳의 호국신이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김유신에게 맛있는 미과(美菓)를 대접해주며 백석이 첩자라는 사실을 알려줬다. 김유신은 납치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기에 적힌 미과가 바로 한과다.
우리나라 한과의 발달은 불교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 불교에서 발달한 것이 차(茶) 문화다. 중국 불교에서는 차 공양을 수행의 한 방법으로 여겼다. 중국 당나라에서 우리나라에 전해진 불교의 영향으로 우리나라 불교 역시 스님들이 차를 공양하며 심신을 수양했다. 차문화는 필연적으로 차와 곁들어 먹는 음식인 다식(茶食)의 발전을 가져왔다. 우리나라는 자극이 없고 쌀 등의 식물을 주재료로 하는 한과가 그것에 해당했다. 삼국시대 이후 불교가 점차 우리나라에 자리를 잡아가면서 차를 마시는 풍습이 성행한 통일신라시대에 차와 함께 즐긴 다과상 역시 발달했고, 여기에 한과가 오르기 시작하면서 7세기 이후에는 한과가 널리 대중화됐다고 짐작된다.
-'한과 금지령' 내렸던 고려·조선시대
불교 사찰에서는 차문화와 다식문화를 적극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자연스럽게 사찰에서는 유밀과를 비롯한 한과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으며 그 노하우가 점점 쌓여갔다. 고려시대에 오면서 불교가 매우 성행하게 됨으로써 사찰의 차문화는 속세에도 퍼지게 됐다. 고려시대 한과의 대중화가 어느 정도였느냐고 하면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일반백성까지 한과를 즐겨먹었다. 특히 찹쌀가루로 만든 유밀과(油蜜菓)의 인기가 대단했다. 고려의 역사를 가장 충실하게 기록한 역사서인 '고려사'의 '형법금령'에 의하면 고려 19대 임금인 명종 22년(1192)에 유밀과의 사용을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고려 31대 왕인 공민왕 2년(1353)에도 역시 유밀과의 사용금지령이 내렸다고 적혀있다. 이유는 유밀과가 너무 성행하여 유밀과를 만드느라 그 재료인 곡물, 꿀, 기름 등이 허비되고 물가가 올라 민생에 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에도 한과는 사랑받았다. 유밀과 뿐만 아니라 다양한 한과가 고도로 발달했는데 문헌에 기록된 한과류만 해도 그 종류가 무려 254종에 이른다. 한과의 쓰임새도 다양했고, 임금을 포함한 왕실은 물론 양반가와 백성들이 즐겼다. 임금이 매일 받는 어상에는 적어도 하루에 한번은 한과가 올랐다. 조선 왕실에서는 친인척들이 방문하는 등 손님을 접대할 때나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에도 접대상에 과일과 함께 약과, 다식 등 한과를 많이 올렸다. 특히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에는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기름에 튀긴 한과를 빠뜨리지 않고 올린 것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양반집에서도 한과를 즐겨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한과의 쓰임이다. 기호식품으로도 사랑받았지만 왕실은 물론 양반가, 일반 백성들까지 한과를 제사음식, 혼례음식, 환갑음식, 설날음식 등 잔치와 의례 음식으로 숭상했다는 것이다. 이때에는 다양한 종류의 한과를 만들어 높이 쌓아놓았는데 이를 위해 한과제조기술이 뛰어난 전문가들이 동원되었을 뿐 아니라 한과를 높이 잘 쌓는 고임새가 빼어난 사람들까지 초빙되었다. 궁중연회상에는 24가지 한과를 1자8치의 높이로 높이 고여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한과가 연회상에 올라가는 음식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각광받는 음식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한과의 성행이 조선시대에도 문제가 되었나 보다. 조선왕조의 종합 법전으로 불리는 '대전회통(大典會通)'을 보면 헌수, 그러니까 환갑잔치 등 특별한 나이 때의 장수를 기원하는 잔치와 혼례, 제향 이외에 조과를 사용하는 사람에겐 곤장을 맞도록 한다는 규정이 있다.
-지방색을 입은 한과
한과는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음식이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제철에 생산되는 재료와 지방의 특산물이 한과의 재료로 많이 사용됐다.
서울과 경기도는 서쪽으로 서해, 동쪽으로는 산이 있으며 경기도의 농경지까지 포함하고 있다. 육상과 해상의 농산물이 고루 수확되며 경제, 정치, 문화의 중심지인 서울의 특성상 전국각지의 농산물과 특산물이 집결하는 곳이다. 다양한 한과가 만들어졌다. 그중에서 예로부터 잣이 유명했던 가평에서는 소나무가 아닌 잣나무에서 채취한 송홧가루로 만든 가평송화다식, 땅콩의 주산지인 여주에서는 땅콩강정이 만들어졌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인삼으로 유명한 파주,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했으며 옛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의 경우엔 인삼을 이용한 한과가 있다. 이 외에 '개성모약과'가 유명하다.
강원도는 쌀농사보다 밭농사를 많이 짓는 지역이다. 주식 역시 과거에는 쌀이 아니라 옥수수, 감자, 메밀 등 밭에서 나는 농산물로 만든 강냉이밥, 감자밥, 감자수제비, 메밀막국수 등이었다. 한과 역시 쌀이 아닌 밭에서 나는 작물로 많이 만들어졌다. 특산물인 옥수수로 만든 옥수수엿, 밀가루로 만든 매작과, 찹쌀가루로 만든 약과, 강릉산자 등이 별미로 꼽힌다.
전라도는 음식의 재료가 풍부할 뿐 아니라 음식 맛있기로는 첫손에 꼽히는 곳이다. 한과 역시 매우 다양해 찹쌀가루와 구기자가루를 섞어 만든 구기자강정을 비롯해 산자, 유과, 동아강정, 연강정과, 비자강정, 전주약과, 창평흰엿 등이 있다.
충청도는 넓은 옥토를 가지고 있어 곡류가 풍부하고 인삼산지가 있다. 인삼을 재료로 만든 인삼정과와 인삼약과, 수삼정과가 유명하다. 특이한 한과로는 '무엿'과 '무릇곰'이 있는데 무엿은 불린 쌀과 엿기름, 무채를 넣고 만드는 것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만드는 딱딱한 갱엿이 아니라 숟가락으로 떠먹는 엿이다. 무릇곰은 백합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인 '무릇' 말린 것과 쌀가루, 엿기름, 생강즙, 쑥 등을 푹 고아 만든 과정류이다.
경상도는 사과를 비롯한 제철과일과 채소 등으로 만든 정과와 다식이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사과와 밤, 대추, 감 같은 다양한 과일과 열매를 이용한 정과와 통도라지, 연근, 당근, 우엉, 생강 등으로 만든 '각색정과', 산더덕과 산당귀 뿌리, 송홧가루, 토종꿀로 만든 '신선다식', 청주와 설탕으로 버무려 재워둔 대추를 쪄서 만드는 '대추징조', 찹쌀가루와 멥쌀가루, 막걸리, 조청, 쌀로 만든 튀밥으로 만드는 '준주강반'은 경상도를 대표하는 한과다.
아름다운 제주에는 매우 특별한 한과가 있다. 바로 닭고기, 꿩고기, 돼지고기 등의 육류로 만든 닭엿, 꿩엿, 돼지고기 엿이다. 이 엿들은 제주 사람들의 별미이자 보양식으로 사랑받았다. 마지막으로 지금은 갈 수 없는 땅, 북한지역의 경우 황해도 지역의 무로 만든 과자인 '무정과', 평안도 지방에서는 수수로 만든 '수수엿', 함경도 지방에서는 '태석'이라는 엿이 유명했다.
-단맛 내는 자연재료, 꿀과 조청
한과를 먹어보면 알겠지만 단맛이 지나치게 강하기보다는 질리지 않을 정도로 딱 적당한 단맛을 가지고 있다. 설탕과 더불어 꿀과 조청 등을 섞어 사용하기 때문이다. 꿀과 조청은 설탕 못지않은 단맛을 낸다. 그 맛의 질감이 강하기보다는 부드러워 자극이 덜하다. 설탕보다 조금 넣어도 단맛을 충분히 발휘하며, 영양 면에서 설탕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한과에서는 설탕만으로 단맛을 내기보다는 조청과 꿀을 적절히 섞어 조화로운 단맛을 낸다. 설탕과 조청, 꿀 등 단맛을 내는 재료들의 비율 등이 한과의 품질과 맛 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중국의 송나라를 통해 설탕이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단맛을 내는 재료로 사용된 것은 오직 꿀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인공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채취해야 하는 꿀은 귀한 음식이었다. 한과 등 고급 음식을 만드는데 사용되어왔고 약으로도 먹었다. 아카시아 등의 꽃에서 꿀을 얻거나 꽃에서 꿀을 얻어 모아둔 벌의 벌집에서 꿀을 얻는다. 벌집에서 채취한 꿀은 벌꿀이라 하고, 꽃에서 채취한 꿀은 채취한 꽃 종류에 따라 밤꿀, 아카시아꿀, 메밀꿀, 유채꿀, 잡꿀 등으로 구분한다. 꿀은 주로 한과의 마지막 제조과정인 즙청에 이용한다. 꿀을 묻힌 한과는 맛도 있지만 꿀의 방부효과로 방부제를 넣지 않아도 저장성을 높여주는 효과도 가지고 있다.
조청(造淸)이라 함은 자연에서 얻은 꿀을 '청(淸)'이라고 한데 빗대어 만들어진 꿀이란 의미를 가진 명칭이다. 조선시대에 개발돼 꿀과 함께 단맛을 내는 주요 재료로 사용됐다. 구하기 힘든 꿀과 달리 조청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곡류 등을 엿기름으로 삭힌 후졸여 꿀처럼 만드는 것이다. 조청의 탄생으로 한과는 물론 여러 음식들에 단맛을 내는 일이 쉬워졌다. 조청은 거의 모든 곡류로 만들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찹쌀, 멥쌀, 수수 등을 주로 사용한다. 고구마나 옥수수도 조청을 만드는 주요한 재료 중 하나다. 곡류건 채소건 전분을 함유한 것이라면 모두 조청으로 만들 수 있다. 단맛이 강하지만 설탕과 달리 칼로리가 낮고, 혈당을 올리지 않으며, 재료로 사용한 곡물 등의 성분을 가지고 있어 영양이 풍부하다. 장의 독소와 노폐물을 제거하고, 소화를 돕는 효능을 갖고 있어 건강하게 단맛을 섭취하게 해준다. 한과에서는 조청을 약과와 유과 등의 즙청에 많이 사용하고 있다. 한과가 소화가 잘 되는 이유에는 조청의 역할도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