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림이 최근 해운업체 팬오션을 인수하고 나서면서 한국의 카길(세계 1위 곡물 메이저 업체)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인수대금만도 1조원이 넘는다.

하림의 통 큰 투자에 대해 관련업계에서는 회의적인 시선과 찬사가 엇갈렸다. 하림이 무리수를 두었다는 지적과 동시에 하림이 새로운 먹거리를 찾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팬오션 인수는 하림에게 투자일까 도박일까.

투자자는 환호했으나 전문가는 글쎄

하림(136480)의 지주회사인 제일홀딩스와 사모펀드인 JKL파트너스로 구성된 컨소시엄은 지난 12일 팬오션을 인수하는 본계약을 체결했다. 인수대금은 총 1조79억5000만원으로, 이 가운데 제일홀딩스는 총 8380억원을 부담하기로 했다.

인수계약 체결 발표 이후 하림과 팬오션의 주가는 동반 상승했다. 17일 팬오션은 11일보다 21.15% 상승했다. 같은 기간 하림의 주가는 12.55% 올랐다. 국내 1위 사료업체인 하림과 지난 2007년 곡물수송량 세계 1위 해운사였던 팬오션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영향을 미쳤다.

반면 발표 다음날 NICE신용평가는 하림의 장기신용등급(A-)을 하향검토 등급감시 대상으로 분류했다. 하림의 팬오션 인수 효과에 대한 불확실성이 존재하고, 인수를 통해 그룹 전반의 재무부담이 증가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해운ㆍ곡물 중 하나라도 놓치면 낭패

하림의 팬오션 인수가 장기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신 사업분야가 되는 해운업과 기존 사업 모델인 곡물업에서 모두 승자가 돼야 한다. 이 중 하나라도 패할 경우에는 하림이 떠안게 될 부담이 만만치 않을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하림이 팬오션을 인수한 결정적인 이유는 곡물 가격의 절반 가까이가 운임으로 나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해운사를 소유한다면 이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하림의 승부수가 전략적으로 적절한 선택일 수 있다고 인정하는 분위기다. 다만 현재 해운업 업황이 좋지 않다는 게 하림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하림이 필요로하는 곡물을 수송하고 나서 남은 기간에 선박들을 어떻게 운영할지도 리스크요인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던 중국도 최근 예전같이 원자재를 사들이지 않고 있다”면서 “업계 전반에 공급은 넘치는데, 수요가 매우 부진한 상황이다”고 설명했다. 발틱해운거래소가 발표하는 대표적인 경기 선행 지표인 벌크선 운임지수(BDI)는 16일(현지시간) 522포인트까지 하락했다. 이는 1999년말 지수가 만들어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내려간 것이다.

엄경아 신영증권 연구원은 “하림이 수입하는 곡물이 연 300만톤인데 팬오션이 매년 수송할 수 있는 물량은 약 5000톤이다”면서 “나머지 기간 동안 하림은 배를 빌려주든지 다른 화물을 운송하면서 돈을 벌 궁리를 따로 해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림 관계자는 “카길도 곡물 유통만 하지는 않고, 철강이나 다른 원자재들도 운송하고 있다”면서 “업황이라는 것은 늘 변하는 것이고, 1~2년 이내에 좋아지지는 않더라도 언젠가는 좋아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카길과 같은 곡물 메이저가 되기 위해 하림 측은 우선 시카고 상업거래소와 같은 공개 시장에서 곡물 물량 매입을 늘리고, 장기적으로는 팬오션을 통해 해외 농장과의 직접 거래를 늘려나가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역시 쉽지만은 않다. 글로벌 곡물업체들이 포진해있는 곡물 시장은 진입 장벽이 높기 때문이다.

과거 STX팬오션에서 근무했던 업계 관계자는 “STX팬오션도 카길과 같은 회사가 되기 위해 투자를 진행했지만, 기존 5대 곡물 메이저들이 좀처럼 신규업체의 시장 진입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하림 역시 고전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그는 “카길 등 기존 5대 곡물 메이저는 곡물시장의 80% 이상을 점유하고 있고, 모두 비상장회사로 비밀스럽게 운영하고 있다. 그들이 형성한 카르텔을 뚫기 매우 어렵다”고 덧붙였다.

다른 해운업계 관계자는 “일본 종합상사에서 곡물 관련 사업을 하고 있지만, 그들도 5대 곡물 메이저가 활동하지 않는 부분에서만 영업한다”면서 “하림이 직접 곡물 메이저와 맞붙기보다는 일본 업체처럼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김한호 서울대학교 농업경제학과 교수는 “이명박 정부 시절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한국형 카길을 표방하면서 미국에 진출했으나, 제대로 한 일도 없이 혈세만 날렸다”면서 “직접 곡물을 수입하면서 국제 곡물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고, 어떻게 상품을 사야 하는지도 아는 ‘실수요자’ 하림이 곡물 산업에 진출하는 것은 큰 틀에서 맞다”이라고 설명했다.

하림 관계자는 “5대 곡물 메이저 중에서도 카길을 제외하면 벌크선이 많은 업체가 없고, 하림은 일본의 상사와도 회사 체계가 많이 달라서 특유의 사업모델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서 “팬오션 인수 소식을 듣고 카길 측에서 협력 방안을 논의해보자는 연락이 왔다. 기존 주요 업체들과 싸우지 않고 협력하는 등 곡물시장 진출을 위해 다양하게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