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대리가 결국 회사를 그만두는 모양이다. 늘 자신의 스펙에 비해 지금 다니는 회사와 맡고 있는 업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던 그는, 얼마 전 헤드헌팅 회사로부터 지금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받은 동종 업계 상위권 회사로 이직을 결심한 것 같다.
아직 회사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저 L 대리가 주변의 동료들에게 스스로 (고민을 얘기하는 척하면서) 이 사실을 자랑하고 다녔던 것이다. L 대리의 얘기를 들어주던 또래 동료들은 겉으로는 축하와 응원을 보내기도 했지만, "소문 내지 말라"면서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이 사실을 떠들고 다니는 L 대리가 살짝 얄밉기도 하다.
사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마음은 이미 회사를 떠났지만 L 대리는 아직 공식적으로 회사에 사표를 내지는 않은 채 근무를 계속하며 업무적으로 거의 손을 놓고 있다는 것이다. 마감을 지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팀장의 지시도 무시하기 일쑤이다. 고객의 전화에 계속 신경질적으로 응대하는 바람에 고객의 항의도 빗발치고 있다. 이상한 느낌을 감지한 팀장이 L 대리를 불러 나무라자, L 대리가 적반하장으로 팀장에게 고함을 지르며 달려드는 바람에 팀 전체의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그의 퇴사 이후에 그가 미뤄놓은 일을 처리해야 할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의 책상 위에 해결되지 않은 채 쌓여가는 서류를 보며 한숨을 쉬고 있다.
물론 회사는, 그곳을 나오는 순간 내 인생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곳이 된다. 그러나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는 동료들은 생존을 위한 전쟁을 벌여야 하고, 내가 미뤄두거나 망쳐놓은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회사와 나는 건조한 근로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에 불과하지만, 그곳에서 동고동락한 동료들은 어떤 순간에도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 할 소중한 사람들이다. 이직을 앞두고 연일 인간적인 실수를 계속하고 있는 L 대리가 이직 후에 이 업계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흥미로운 건 L 대리가 옮기려는 회사에서 근무하라는 확정 통보를 계속 미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직이 취소된다면, 예정된 비극은 모두 그가 자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