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이제 성장만을 위한 성장, 오로지 부(富)를 축적하기 위한 성장은 지양해야 합니다. 앞으로는 사회적 책임과 문화 발전, 환경 보존 등 다양한 가치를 함께 성장시키는 '지속 가능한 성장' 단계로 이행해야 합니다."
세계적인 경제 석학인 제프리 삭스 컬럼비아대 교수(경제학)는 2015년을 자본주의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삭스 교수는 새해를 맞아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올해부터 세계는 지금까지와 다른 성장 모델을 도입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더 큰 역할을 맡아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자본주의, 약자와 빈민 안고 가야
삭스 교수가 올해를 '자본주의 업그레이드 원년'이라고 지목한 이유는 유엔이 오랜 기간 준비해온 '지속 가능 발전 목표(SDG·Sustainable Development Goals)'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해이기 때문이다. SDG는 반기문 총장과 삭스 교수 주도로 유엔이 새로 개발 중인 세계경제 발전 목표다. 지난 2000년 도입됐던 '새 천년 발전 목표(MDG)'가 올해 종료됨에 따라 이를 대체해 향후 15년을 이끌 국제사회의 새 '발전 강령'이 바로 '지속 가능 발전 목표'이다.
삭스 교수에 따르면 SDG에 기반을 둔 새 자본주의는 '경제 성장이 사회적 책임과 환경 보존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선진국 간 경쟁적이고 파괴적인 제로섬 성장에서 벗어나 약자와 빈민을 안고 가는 '착한 성장'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삭스 교수는 SDG가 가능한 근거로 올 12월 열리는 제21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를 지목했다. 그는 "탄소 배출량이 가장 많은 미국과 중국이 마침내 협약에 동참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며 "전 세계가 참여하는 탄소 배출 종량제가 실시됨으로써 자연히 SDG형 성장의 시대로 이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삭스 교수는 이 과정에서 반기문 총장의 역할이 컸다고 설명했다. 그는 "반 총장이 10년 동안 조용하지만 뚝심 있는 행보로 강대국들의 SDG 참여를 이끌어냈다"면서 "이것만으로도 반 총장의 업적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삭스 교수는 반 총장의 유엔 사무총장 취임 초기부터 경제 개발 특별자문관을 맡았고, MDG와 SDG 추진 단계에서 반 총장의 '멘토' 역할을 해왔다.
한국에 대해선 "빈곤 퇴치에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삭스 교수는 "반 총장이나 김용 세계은행 총재처럼 한국 출신 글로벌 리더들이 늘어나면서 세계는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리더 역할을 더 많이 해주길 기대한다"면서 "한국국제협력단(KOICA) 주도로 아시아·아프리카에 '새마을운동' 같은 성장 노하우를 수출한 것은 선진국 사이에서도 귀감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절대 빈곤층 줄었지만, 부의 불균등은 심화
줄곧 빈곤 퇴치를 위해 힘쓴 삭스 교수는 "최근 15년 사이에 세계의 절대 빈곤 인구는 전체 35%에서 17% 선까지 떨어졌다"며 이 분야에서 의미 있는 진전을 이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빈곤이 줄어든 대신 부(富)의 불균등한 분배와 양극화가 심화된 것이 세계경제의 리스크(위험 요인)가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삭스 교수는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 특히 부의 불균등 분배 문제가 심각하다"며 "1980년 이후 세계화와 기술 변화로 인해 서민 경제가 힘들어지고 양극화도 심해졌다"고 말했다. 삭스 교수는 부자 위주의 정부 정책이 부의 불균등을 심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삭스 교수는 "정치인은 돈줄 쥔 사람들을 위해 각종 세금 감면, 사회보장 축소, 금융 규제 완화 같은 잘못된 정책을 남발했고 이 때문에 소득 격차가 더욱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온난화, 섭씨 2도 넘기면 위험
빈곤과 함께 자신의 주요 관심 분야인 환경 보호에 대해서는 좀 더 비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삭스 교수는 멀리 내다봤을 때 세계경제의 가장 위험한 리스크는 지구온난화라고 말했다. 삭스 교수는 "평균 온도가 섭씨 2도 이상 올라가면 극지대의 영구 동토층(凍土層)이 녹으면서 수만년간 갇혀 있던 메탄가스가 방출된다"며 "이렇게 되면 농경지 오염과 바닷물의 산성화가 급속히 일어나 농·수산업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 농·수산업의 실패로 곡물·식량 가격 폭등 현상이 일어나면서 그동안 쌓아 온 공든탑마저 무너져 버릴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제프리 삭스는…]
"경제학은 후진국 위해야"빈곤·질병 퇴치 등 앞장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선진국의 발전 논리에 맞추기보다 후진국의 빈곤·질병 퇴치에 활용되고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보 성향 경제학자이다. 빈곤 퇴치·개도국 지원·탄소 배출량 감소 운동에 앞장서고 있으며, 2011년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 당시엔 거리에 나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상위 1%가 부를 독점하는 현 자본주의 체제는 잘못됐다"고 강연했다. 한국 외환 위기 당시에는 국제통화기금(IMF)이 내린 고금리 처방이 부당하다며 강력하게 비판해 주목받았다. 저서 '빈곤의 종말'(2005)에서 극단적 빈곤을 끝내고 선진국과 후진국이 더불어 잘살 수 있는 해법을 제시했으며, 뉴욕타임스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학자"로 꼽았다. 하버드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28세에 종신교수직을 보장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