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 당국이 실질금리와 기대인플레이션 하락 추세를 감지하지 못하고 금리정책을 수행하면 디플레이션의 위험이 커질 수 있다.”(지난달 26일 한국개발연구원(KDI) 보고서)

“디플레이션이 우려되기 때문에 중앙은행이 과감하게 나가야 한다는 주장은 과하지 않나 생각한다. 지금 저물가·저성장은 경기순환적 요인이 아니라 구조적인 요인에 따른 결과다.”(11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국책연구기관인 KDI가 연일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를 압박하는 가운데 이주열 총재가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는 과도하고, 이에 대한 우려를 통화정책으로 대응하는 것도 맞지 않다며 정면으로 반박했다.

한은은 현재 저물가가 이어지고 있지만 우리 경제는 디플레이션에 진입하는 게 아니라 ‘저물가·저성장’ 상태이라고 진단하고 최근의 디플레이션 논쟁이 오히려 경제주체들의 심리를 위축시키는 요인이라고 보고 있다.

지난달 26일 KDI는 ‘일본의 1990년대 통화정책과 시사점’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해 사실상 한은의 금리 인하를 촉구했다. 2년 넘게 저물가가 이어지는 우리나라 상황이 1990년대 디플레이션에 빠지기 전 일본 경제와 닮은꼴이라며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않으면 우리나라도 디플레이션에 빠질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은은 단순히 ‘1%대 저물가’라는 요인 하나만 가지고 우리나라와 일본 경제를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입장이다. 숫자(물가상승률)를 제외한 다른 경제 여건을 놓고 보면 지금 우리나라 상황과 디플레이션에 빠지기 전 일본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한은 관계자는 “1990년대 일본은 자산 거품이 순식간에 꺼지며 국제유가가 상승하는 가운데서도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서며 디플레이션에 빠졌지만, 최근 우리나라 물가상승률이 낮은 것은 국제유가와 국제 농산물 가격 하락에 따른 영향”이라고 설명했다. 한은이 추정한 결과에 따르면 국제유가와 농산물 가격 하락분을 제외하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대 수준이다.

한은은 KDI가 GDP디플레이터가 0.0%를 기록한 것을 지적하며 디플레이션 가능성을 언급한 부분에도 오류가 있다고 지적한다. GDP디플레이터는 명목GDP를 실질GDP로 나눈 것으로 해당 기간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지(내렸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소비자물가(CPI)가 481개 품목의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지표라면 GDP디플레이터는 우리 경제의 상품(재화)과 서비스, 수출, 수입 물가를 모두 포괄한다.

KDI는 “GDP디플레이터가 소비자물가 선행하는 경향이 있다”며 “1993년 GDP디플레이터가 하락하는 것을 간과한 일본 정부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올해 2~3분기 GDP디플레이터는 0.0%를 기록했다.

하지만 한은은 “GDP디플레이터와 소비자물가는 동행하는 것으로 인식해야 하고, GDP디플레이터가 0.0%를 기록하는 것은 GDP디플레이터가 소비자물가보다 국제 유가 하락과 환율 변동분을 더 크게 반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은은 또 2~3분기 GDP디플레이터가 0.0%를 기록한 것은 수출·수입 디플레이터가 큰 폭으로 마이너스를 보인 영향이라고 설명했다. 한은에 따르면 3분기 수출·수입디플레이터는 각각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7%, 7.2% 하락했다. 반면 소비지출 디플레이터는 1.0% 올랐고, 건설·설비투자를 포함한 총자본형성디플레이터는 1.1% 상승했다. 수출, 수입과 재고를 제외한 GDP디플레이터는 0.7% 올랐다.

한은은 과도한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오히려 우리 경제에 위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디플레이션이라는 프레임이 경제 주체들의 과도한 심리 위축으로 이어져 경기 회복을 가로막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은 관계자는 “최근 고조되는 디플레이션 논쟁의 근거는 ‘물가상승률 1%대 장기화’에만 집중되고 있지만, 디플레이션은 물가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경제 여건이 조합된 결과”라며 “물가만으로 디플레이션을 진단하면 현재 저물가·저성장에 대응하는 시기를 놓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디플레이션이라는 건 저성장·저물가와는 완전히 다른 얘기라서 그런 논리에 빠져 있으면 정확한 정책 수단을 쓰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