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국내 모바일 서비스업체인 옐로모바일이 글로벌 사모펀드(PEF)인 포메이션8파트너스로부터 1억500만달러(약 1139억원)의 투자를 유치하는데 성공하자, 금융시장에서는 난데없이 ‘LS가(家)’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포메이션8을 이끌고 있는 구본웅 대표가 LS전선 구태회 명예회장의 장손이기 때문이다.
구 대표는 지난 2012년 스탠퍼드대학교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은 뒤 귀국해 가업을 물려받는 대신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벤처투자사를 설립하고, 이후 PEF 분야로 보폭을 넓히며 사업규모를 키워가고 있다. 일찍부터 유학 생활을 통해 쌓은 외국어 실력, 해외 인맥과 함께 대기업 오너의 일원으로서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자산을 기반으로 구 대표의 포메이션8은 설립 이후 여러 차례 높은 투자수익을 거두며 순항하고 있다.
PEF업계에서는 구 대표 외에도 정·관계나 재계 유력인사의 2세들이 대표나 파트너(임원)로 참여해 일하고 있는 곳이 많다. PEF 분야는 최고 수준의 학력과 경력은 물론 든든한 인맥과 자본력, 정보력까지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가문의 후광’까지 등에 업을 수 있어야 진입이 가능한 시장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 때문에 금융시장에서 PEF업계를 두고 진정한 ‘엄친아’들만이 모이는 금융엘리트의 최종 집결지라고 부른다.
◆ 이학수 前 삼성물산 고문 두 아들 모두 PEF에서 두각
지난 7월 농협PE와 함께 컨소시엄을 이뤄 동양매직의 최종 인수자로 선정된 글랜우드는 이학수 전 삼성물산 고문의 둘째아들인 이상호씨가 대표로 있다.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에서 인수합병(M&A) 업무를 통해 경력을 쌓은 이 대표는 글랜우드의 신임 대표로 임명된 후 동양매직 인수전(戰)에 뛰어들어 현대홈쇼핑 등 다른 유력 후보들과의 경쟁에서 승리를 거뒀다.
이 대표의 형인 이상훈씨도 글로벌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 산하의 모건스탠리PE의 한국대표로 일하고 있다. 아버지인 이학수 전 고문의 명성만큼 이상훈 대표 역시 PEF업계에서는 여러 차례 대규모 인수합병(M&A)을 진행하며 일찌감치 두각을 보인 인물이다. 지난 2011년부터 모건스탠리PE를 이끌고 있는 그는 부대찌개 브랜드 ‘놀부’를 운영하는 놀부NBG를 비롯해 전주페이퍼, 현대로템, 이노션 등 다양한 기업들을 인수하거나 투자했다.
국내 유명 PEF의 대표나 임원 가운데 남다른 출신, 배경을 갖춘 인물들은 이 밖에도 여럿 있다. 바이아웃 투자(기업을 인수해 가치를 높인 뒤 차익을 얻고 매각하는 투자방식)에서 국내 PEF 가운데 가장 높은 경쟁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 MBK파트너스의 김병주 회장은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사위다. 하버드대에서 MBA 학위를 받은 그는 일찌감치 칼라일그룹에서 여러 굵직한 M&A를 성공시키며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도미누스인베스트먼트의 정도현 대표는 정형근 전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의원의 아들이다. 이정진 H&Q AP 공동대표는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의 사위로 알려져 있다. 프로야구단 넥센 히어로즈의 이장석 구단주도 야구단을 인수하기 전 센테니얼인베스트먼트라는 투자회사를 경영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밑그림을 그렸던 고 이기홍 경제기획원 차관보다.
◆ PEF업계 '네트워크'가 능력…美·中도 유력가문 2세 많아
금융시장에서는 PEF시장에 여러 분야 유력인사들의 2, 3세들이 대표나 파트너로 있는 곳이 많은 이유는 이들이 '네트워크'에서 앞선 경쟁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개인투자자들을 주로 상대하는 투자자문사나 자산운용사 등 다른 금융업종과 달리 PEF는 주로 기관을 비롯한 대형 투자자들을 상대로 자금을 끌어모아 M&A를 거친 후 기업을 매각하면서 수익을 얻는다. 이 때문에 운용능력 뿐만 아니라 자금동원이나 투자처의 물색, 기업경영 등 여러 방면에서 정보와 인맥을 갖춘 유력인사, 가문의 '주니어'들이 많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PEF 관계자는 “정·관계나 재계 주요인물들의 자녀들은 상당수가 어린 시절부터 조기유학을 하거나 부촌에서 거주하면서 최고 학군에서 교육을 받아 자연스럽게 탄탄한 인맥을 쌓게 된다”며 “부친이나 가문의 후광에서 얻는 인맥까지 더해져 사업에서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인수 경쟁의 최종 승자가 되기 위해 정부나 금융당국 등과 효과적으로 접촉해 협상할 수 있는 ‘로비력’도 유력인사들의 자녀들이 참여하는 PEF들의 강점으로 꼽힌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자금력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을 경우 대부분 어떤 PEF들의 배경이 더 탁월한 지가 인수 경쟁에 많은 영향을 미치곤 한다”며 “규모가 큰 거래일수록 PEF 파트너의 ‘보이지 않는 힘’이 중요하게 작용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국내 뿐 아니라 해외 PEF시장 역시 유력인사들의 2, 3세가 진출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최근 자본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경우 PEF업계에 정부나 공산당의 주요간부의 자제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예로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의 손자인 장즈청(江志成)은 PEF인 보위캐피탈을 이끌고 있으며,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의 아들인 원윈쑹(溫雲松)은 뉴호라이즌캐피탈이라는 사모펀드의 대표를 맡고 있다. 이들은 지난 9월 뉴욕 증시에 상장된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에 투자해 큰 차익을 남겨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과거 외환은행의 대주주였던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 역시 연고를 둔 텍사스 주(州) 정부와 지역 고위인사, 석유재벌 등의 자녀들이 많이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다양한 업종 경력자·M&A 전문가들도 파트너 진출 점차 늘어
물론 모든 PEF들이 화려한 배경을 갖춘 '주니어'들로 채워진 것은 아니다. 지난 9월 버블티 브랜드인 공차코리아를 인수한 유니슨캐피탈의 김수민 한국대표의 경우 국내외 컨설팅사와 투자회사 등에서 많은 경력을 쌓았다. 그는 글로벌 전략컨설팅사인 베인앤컴퍼니에서 PEF와 M&A 부문 한국대표를 맡았고, 골드만삭스 홍콩지점과 뉴욕사무소 등에서도 다양한 업무를 맡은 경험이 있다. 김 대표는 이 같은 경력을 바탕으로 유니슨캐피탈의 설립자인 강중웅 회장의 눈에 띄어 이 PEF의 한국대표로 합류했다.
최근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덩치 큰 M&A가 줄어든 대신 규모가 작은 외식업이나 프랜차이즈 산업 등으로 PEF의 투자처가 소형화·세분화되면서 각 해당 업종에서 경력을 쌓은 인물들이 파트너로 영입되는 사례도 늘어나는 추세다. 또 IT나 바이오벤처 등 높은 수준의 기술을 이해할 수 있는 공학, 생명과학 전문가들이 해당 분야에 투자하는 PEF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한 PEF업계 관계자는 “유력인사나 가문을 배경으로 둔 대표와 파트너들이 이끄는 PEF들도 최근 경기침체 속에서 잇따라 투자한 사업이 좌초돼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며 “투자업종과 사업이 세분화될수록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은 ‘비(非) 명문가’ 출신 금융엘리트나 업종 전문가들이 PEF의 파트너로 진출하는 사례가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