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각 부처가 기금 수십조원을 증권사에 맡기고 방치하는 사이, 증권사들은 여기서 발생한 수익을 야금야금 빼왔다. 증권사의 기금 수익 빼돌리기는 랩어카운트를 통해 이뤄졌다. 랩어카운트란 고객이 맡긴 돈을 증권사가 주식·채권·펀드·파생상품 등에 투자하고 관리해주는 종합 자산관리 계좌이다. 일임형 랩어카운트 잔액은 2008년 10조원에서 2014년 8월 말 현재 72조원으로 급증했다. 이 중 정부 기금은 50조원 정도로 추정된다. 그런데 일부 증권사는 랩어카운트 제도의 맹점을 활용해 기금 계좌에서 얻은 수익을 증권사 고객 계좌로 빼돌려온 것으로 드러났다.

증권사, 정부 기금 수익을 고객 계좌로 빼돌려

새누리당 김용남 의원실이 2008~2013년 현대증권의 정부 기금 운용 내용을 분석한 결과, 현대증권은 이 기간 고용노동부의 고용보험기금과 산재보험, 우정사업본부의 우체국예금과 우체국보험, 기획재정부의 복권기금, 국토교통부의 국민주택기금 등 정부 부처 네 곳 산하 기금으로부터 약 30조원의 자금을 위탁받아 운용해왔다. 이 중 16조원은 신탁, 14조원은 랩어카운트 형태로 운용했다.

현대증권은 랩어카운트에 유치된 자금을 다양한 자산에 투자했는데, 문제가 된 자산은 채권의 일종인 기업어음(CP)과 자산담보부기업어음(ABCP)이다. 현대증권은 CP와 ABCP 가격이 오르자 이를 시가보다 낮은 가격에 자사 다른 랩어카운트 고객 계좌에 매각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빼돌린 것으로 나타났다.

가령 현대증권은 우정사업본부의 랩어카운트 계좌를 통해 2011년 3월 7일 액면가 7억원짜리 A사의 CP를 매입한 뒤, 석 달 뒤 개인 고객 B씨 계좌로 이 CP를 되팔았다. 당시 시장 금리 4.21%를 적용하면 6억6367만원을 받아야 하지만, 임의로 할인율 5.5%를 적용해 6억5253만원에 넘겼다. 이를 통해 우정사업본부가 가져가야 할 이자 수익 1114만원이 B씨 계좌로 넘어간 것이다. 원칙적으로 금융사가 채권을 매매할 때는 시장 금리를 기준으로 가격을 결정하게 돼 있는데, 랩어카운트를 통한 CP와 ABCP 매매에는 명시적 규정이 없다는 맹점을 악용했다. 이런 식으로 기금 계좌에서 다른 계좌로 넘어간 수익금 규모가 5년간 12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김 의원 측 주장이다. 정부 기금은 일단 맡기면 아무도 신경을 안 쓰니까 증권사는 기본 수익만 맞춰준 뒤, 초과 수익을 빼돌려 다른 개인 고객의 수익에 보태주는 식으로 영업을 해온 것이다.

증권업계 "수익 빼돌리기 관행 오래됐다"

증권사들은 각 기금과 4% 안팎의 최소 수익률을 약정한 뒤 일단 최소 수익률이 달성되면 초과 수익분을 다른 고객에게 넘겼다. 일반 고객들의 수익률을 관리해 줘야 고객 수를 늘리고 더 많은 자금을 유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증권사는 랩어카운트를 운용해주면서 통상 수수료 1~3%를 챙긴다.

2014년 현재 각종 정부 기금의 운용 자산은 500조원이 넘지만, 각 부처가 따로 관리·운용하기 때문에 기금을 어디에 어떻게 운용하고 있는지 정확한 실태는 파악되지 않는다. 금융투자업계는 정부 기금 50조원가량이 증권사 랩어카운트에 위탁 운용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기금의 랩어카운트 계좌를 통해 사들인 기업어음을 시가보다 싸게 매매하는 것은 대형 증권사들 사이에서 오래전부터 관행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용남 의원은 "정부 기금을 관리하는 각 증권사의 계좌를 모두 조사해보면 손실 규모가 수천억원에서 1조원이 넘어갈 것"이라며 "국민 혈세로 마련된 정부 기금 수익이 줄줄 새는 현실에 대해 금융 당국과 검찰의 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현대증권 관계자는 "시가보다 싼 장부가로 기업어음을 매매한 것은 맞지만, 다른 계좌로 넘어간 액수가 1200억원에 이른다는 계산은 납득하기 힘들다"며 "기금과 약정한 최소 수익률을 맞췄기 때문에 기금에 손해를 끼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금(基金)

정부가 특정한 사업을 위해 법률을 제정해 설치하는 자금을 말한다. 정부 예산과 별도로 각 부처가 탄력적으로 운용한다. 국민주택기금 등 64개 기금이 있으며, 올해 전체 운용 규모는 515조원대에 달한다.

☞랩어카운트

감싼다는 뜻의 랩(wrap)과 계좌를 의미하는 어카운트(account)를 합친 말이다. 고객이 맡긴 돈을 증권사 전문가가 주식·채권·펀드 등 다양한 자산에 투자하고 적절한 시점에 사고팔아 수익을 내는 종합적인 자산관리 계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