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현대차·SK·LG 등 국내 30대 그룹 절반 이상이 내년 투자·고용 규모를 '올해 수준으로 동결'한다는 방침 아래 신년 경영계획(經營計劃)을 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내년도 경영 기조를 당장의 성장 대신 미래 경쟁력을 위한 '조직·사업 재편'에 두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결과는 9일 본지가 30대 그룹 CEO(최고경영자)·CFO(최고재무책임자)를 상대로 벌인 '2015년도 경영계획' 설문조사에서 나왔다. 국내 대기업들은 '가속화하는 엔저(円低)'와 '중국 경제 성장 둔화(鈍化)'를 향후 가장 중요한 대외(對外) 변수로 꼽고 '내실 경영'과 '조직·사업 재편'을 통한 경쟁력 강화에 주력할 전망이다.

◇신사업 발굴보다 기존 사업 注力

설문조사에 따르면 30대 그룹 중 내년 투자 규모를 "올해 수준에서 동결할 것"이란 응답이 과반수인 16개 그룹이었다. 또 '내년 투자를 늘리겠다'는 그룹(12곳)이 '줄이겠다'는 그룹(2곳)보다 훨씬 많았다. 신규 채용과 관련해서도 '올해 수준 동결'이 17곳이었지만 "1%라도 늘리겠다"고 한 곳도 10곳이나 됐다. "줄이겠다"가 2곳, 무응답 1곳이었다.

한국경제연구원 배상근 부원장은 "주요 기업의 절반 정도가 올해 매출이 전년도보다 떨어졌는데도 내년 투자·고용을 적어도 올해만큼은 하겠다는 의지가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 올해 30대 그룹 주력 회사들의 11월 현재 누적 매출·영업이익 현황을 보면 "작년보다 줄었다"고 응답한 그룹이 각각 14곳·17곳에 이르렀다. 또 저성장에 시달리는 세계경제의 본격 회복 시점을 묻는 항목에 대해선 17개 그룹이 "당분간 저성장 상태가 지속될 것"이라고 응답했다. 내년도 국내 경기 전망에 대해선 '올해와 비슷할 것(13곳)'이란 응답이 가장 많았고, '연초보단 연말로 갈수록 좋아질 것(7곳)' '2016년 이후에 기대(7곳)'라는 응답이 뒤를 이었다.

이에 따라 내년 경영 기조를 묻는 질문에 '미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조직·사업재편'을 든 곳이 절반에 육박하는 14곳에 이르렀다. '신사업 발굴을 통한 성장'이라고 응답한 그룹은 7곳에 불과했다. 재계에선 "내년에 주요 그룹들이 사업 재편의 소용돌이에 들어설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삼성 그룹은 연말까지 삼성SDS·제일모직 상장, 삼성중공업·삼성엔지니어링 합병을 마무리하고 내년엔 주력인 삼성전자를 지주사 체제로 바꾸는 작업을 벌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SK그룹은 "저성장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기존 사업의 판을 깨는 사업 재편뿐"이라며 그룹 차원에서 이를 추진 중이다.

◇수도권 규제 완화 등 획기적 변화 필요

30대 그룹은 공통적으로 신사업 발굴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현재 준비 중인 신성장 사업군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12개 그룹이 새로운 사업군 대신 '기존 사업에 주력하겠다'고 대답했다. 예전에는 헬스케어·바이오·전기차·태양광 등이 많이 나왔지만 최근 들어 산업 발전 속도가 더디고 적자를 기록하자 보수적으로 돌아선 것으로 해석된다.

내년도 경영 계획에서 가장 큰 걸림돌 두 가지씩 꼽아 달라고 한 질문엔 '가속화하는 엔저(20)'와 '중국 시장 둔화(11)'가 가장 많이 나왔다. '유럽 등 글로벌 저성장(9)'과 '내수시장 저성장(8)' '원자재 가격 하락(8)' 등이 뒤를 이었다.

정부에 대한 쓴소리도 나왔다. '정부가 어떤 방안을 내놓아야 투자를 늘리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20개 그룹이 '수도권 규제 완화 등 획기적인 규제 정책의 변화'를 첫손에 꼽았다. 설문에 참가한 한 경영인은 투자 유치를 위한 규제 완화, 노동 관련 법안의 유연성 강화, 청와대의 명확한 지시, 위기 극복을 위한 국가 경쟁력 강화, 정부 부처 간 이해관계 상충의 최소화 등 7가지를 깨알같이 설문지에 적었다. 10대 그룹 소속 한 응답자는 "외부 경제 환경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은 사업 재편과 같은 새로운 시도를 내년에 많이 벌일 것"이라며 "기업들이 이 고비를 잘 넘길 수 있도록 정부와 정치권이 전폭적으로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