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작가 김훈 "나는 왜 쓰는가"

조선비즈
  • 전병근 기자
    입력 2014.11.01 08:00

    27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한담(閑談)'이란 주제로 강연 중인 김훈 작가 /신성헌 기자
    “나의 일상은 하루 3시간쯤 일하고 나머지는 노는 것이다. 바닷가 갯벌의 마을을 어슬렁거리면서 고깃배들을 보고, 어로 작업의 동작을 보고, 밀물과 썰물을 보고 어민들의 표정이나 농부들의 표정을 관찰하는 것이 나의 놀이이자 일이다. 요즘 가을 햇볕에 가오리가 빨랫줄 위에 널려 연처럼 말라가는 꼴을 보면, 그 뼈대 안에 아주 먼 옛날, 수억만년 전의 새의 느낌이 살아있다. 그런 느낌들은 나에게 굉장히 소중한 것이다. 물론 과학적인 것은 아니지만 내가 삶의 직접적인 현장에서 체득한 느낌이기 때문에 소중하다.”

    “나는 내 글이나 말로 여론 형성에 기여하려는 목표가 없다. 나의 논리 앞에 남을 대령시키려는 의도가 없다. 말을 가지고 남과 정의를 다투려는 의도가 없다. 나는 나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해 글을 쓴다. 내면을 드러내서 그것이 남에게 이해를 받을 수 있으면 소통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와 남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이다. 나와 남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도 크게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설가 김훈이 모처럼 대중을 상대로 자기 근황을 길게 얘기했다. 질문에도 답하고 크고작은 사안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열어 보였다. 한국언론문화포럼이 제 11차 세미나 연사로 초청한 자리였다. 작가와 주최측이 논의해서 정한 강연 제목은 한담(閑談). 하지만 오간 얘기는 한가롭지만은 않았다.

    지난 27일 행사장인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8층 외신기자클럽 강당은 전현직 언론인과 일반인 들로 가득 찼다. 70-80석은 돼 보이는 공간에 서있는 사람도 많았다. 참석자들의 체열과 오가는 이야기의 열기로 실내는 더웠다.

    김 작가는 행색이 후줄근했다. 베이지색 면바지에 한 치수 커 보이는 하늘색 줄무늬 와이셔츠를 입고 나왔다. 안에는 흰 라운드 티를 받쳐입은 차림이었다. 사회를 맡은 임철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이 먼저 “어떤 이슈에 대해 깊이 천착하자는 것은 아니고, 소설가로서 요즘 무슨 생각하는지, 일상은 어떤지 이야기를 듣겠다”고 운을 뗐다. 임 회장은 김 작가와 한국일보 입사 동기였다.

    김 작가가 무대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앞에 마련된 책상을 사이에 두고 청중을 마주한 채 앉았다. 김 작가는 노란 줄무늬 메모장에 뭔가를 적어와서, 가끔씩 넘겨가며 이야기했다. 이런 자리가 상당히 성가시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고 싶지는 않아 하는 기색이 뚜렷했다. 말과 글의 예측할 수 없는 위력과 부질없음을 함께 아는 자의 표정이었다. 김 작가가 30분 정도 이야기를 하고 뒤이어 청중의 질문을 받아 답했다. 피하거나 소홀히 답한 질문은 없었다. 물음의 주제에 따라, 생각의 내용에 따라 말의 어조와 강약이 조금씩 변했다. 거의 전문에 해당하는 내용을 소개한다. 작가의 말은 경어체였다. 편의상 평어체로 바꿨다.

    <김훈>
    반갑습니다. 이렇게 많은 선후배와 동료가 계시는 자리에서, 말하는 자리에 나오게 되니 두려운 생각이 든다. 말을 많이 할수록 생고생을 하게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생고생이라는 것은 하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고생을 말 때문에 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과 글을 쓰면서 살아온 생애가 어떤 때는 진땀이 나게 뉘우쳐질 때가 있다. 쓸데없는 말, 하나 마나 한 말, 아니한 만 못한 말, 동어반복, 중언부언, 이런 말들을 끝없이 지껄이며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이 얼마나 쓸데없이 함부로 내뱉은 말들에 의해 들끓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 몸서리가 쳐지고, 글을 쓰고 말을 한다는 것에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오늘은 한담(閑談)이라는 주제로 나의 일상에 관한 소소한 일들을 말하는 것으로써 이런 난감한 자리를 모면하려 한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쓸수록 그것이 공허한 것 아닌가 하는 회의에 빠질 때가 많다. 요즘에는. 나는 글을 쓸 때 되도록이면 개념어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그것은 참 쉬운 일이 아니다. 개념어가 아닌 말들, 그러니까 삶의 일상성, 생활의 구체성, 삶의 육질성과 닿아있는 말들을 가지고 글을 써보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개념어라는 것은 삶의 구체성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고 권력화된 언어인 것이다. 개념이 설정한 틀 안에 들어오지 않는 모든 구체성을 제거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나로서는 개념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가령, 나는 가끔 법전을 읽어보기도 하는데, 헌법 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그런데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할 때 이 국민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 국민은 대체 누구인가. 국민이라는 그런 거대한 군집 명사로 말할 수 있는 동질적인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은 분명치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헌법은 국민을 극도로 추상화하고 군집화해서 말한다. 그러면 이 국민은 누구인가.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닌 것이면서도 전체적인 무엇을 국민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은 정치인들은 국민이라는 말을 쓴다. 흔히 “우리는 국민과 더불어 이 법안을 때려부수겠다” “국민과 더불어 분노한다” "국민적인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이런 말들을 하는데, 나는 여기서 말하는 국민이라는 말이 그야말로 ‘공허한 허깨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검증될 수 없는 개념어들을 만질 수 없게 되니까, 내가 쓸 수 있는 어휘가 점점 줄어들어, 이제는 한옴큼밖에 안 남은 말들을 이리저리 조립해가면서 가난한 살림을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요즘 세월호 참사가 난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의 앞바다에 있는 선감도라는 작은 섬에 들어가 있다. 나의 일상은 거기서 하루 3시간쯤 일을 하고 나머지는 노는 것이다. 바닷가 갯벌에 가서 노는데, 대개 마을을 어슬렁거리면서 고깃배들을 보고, 어로 작업의 동작을 보고, 밀물과 썰물을 보고 어민들의 표정이나 농부들의 표정을 관찰하는 것이 나의 놀이이자 일이다. 그리고 그 느낌을 내 맘 속에 쌓아놓는다. 그 느낌은 대부분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만 나한테는 그런 느낌의 초점은 소중한 것이다. 요즘은 어촌 마을에서 생선을 잡아다 빨랫줄에 널어서 건어물로 말린다. 그걸 들여다 보면 거기에 가을 햇빛이 비치면서 생선의 내장들이 투명하게 들여다 보이면서 말라가고 있다. 가오리 같은 생선의 경우 굉장히 크고 연처럼 생겼는데, 말라가는 꼴을 보면, 그 뼈대 안에 아주 먼 옛날의, 수억만년 전의 새의 느낌이 살아있다. 물고기가 진화해서 새가 됐다는 진화론의 먼 흔적이 말라가는 가오리 속에서 들어있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그런 느낌들은 나에게 굉장히 소중한 것이다. 물론 과학적인 것은 아니지만 내가 삶의 직접적인 현장에서 체득한 느낌이기 때문에 소중하다.

    내가 있는 마을의 어선들을 보면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개 2톤 정도의 배다. 보통 5톤을 넘지 않는 연안 낚시 어선들이다. 2톤짜리 배라고 하면 여러분은 잘 상상이 안 될 것이다. 2라는 숫자를 개념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무게가 (머리 속에) 안 들어오는 것이다. 아마 100톤이라고 해도 그 무게의 크기가 안 들어올 것이다. 2톤짜리 어선은 영업용 택시 두 대를 붙인 정도의 크기다. 어선이 성립할 수 있는 최소 단위다. 이런 어선은 간단한 엔진이나 경운기 엔진을 떼다 달고 있다. 어선의 갑판을 보면 굉장히 무질서하다. 많은 어구들이 흩어져 있고 지저분하고 어수룩하고 엉성하고 헐렁하고 무질서해 보인다. 그러나 배를 운영하는 어부들을 보면 그것이 무질서한 것이 아니고, 그 많은 도구와 장비들이 자기에게 필요한, 손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는 것이다. 배는 굉장히 엉성해 보이고 가벼워 보인다. 배가 살아온 많은 고난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가벼워 보인다. 그런 가벼움을 가지고 앞으로 닥칠 고난을 그 배들이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런 느낌은 나한테 소중한 것이다.

    최근에 안산에서 올라와서 한강 유역을 답사한 적이 있다. 팔당강 쪽에서부터 한강 하구 임진강까지 내려가 봤다. 그 임진강 근처에 도립 선사박물관이 있는데 거길 가보면 재미있는 게 많다. 거기에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고인류의 유골 복제품이 있다. 어린 아이가 죽었는데 머리 위에 돌로 만든 실로폰이 놓여있었다. 100만년 전쯤의 구석기 시대 유적이다. 당시에도 어린 아이를 묻을 때 장난감 실로폰을 머리맡에 묻어주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었다. 어린 아이의 몸 주변에서 많은 꽃가루가 발견됐다. 아기를 묻을 때 많은 꽃을 던졌고 머리 위에는 장난감 실로폰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로부터 수만년 동안 또 인간은 수많은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 약탈과 살육의 흔적까지도 박물관에 다 남아있다. 인간의 아름다움과 고귀함과 야만성과 잔악 행위의 흔적들이 동시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 인간이라는 것은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인간은 일방적으로 아름답거나 추한 것이 아니고 여러 모습이 매장터에 섞여서, 그 전체가 인간일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강 상류인 팔당면과 조안면 능내리 쪽도 가봤다. 정다산 선생의 고향이고 성장지다. 강 건너편이 퇴촌면 천주교 묘지인데 마주보고 있다. 다산은 아마도 이 동네에서 자라면서 강을 보면서 많은 영감을 얻었던 것 같다. 거길 가보면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서 더 큰 흐름을 이루면서 대도시 서울 쪽으로 흘러가는 웅장한 모습이 보인다. 다산은 그곳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두 강이 합쳐져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고 굉장히 많은 영감을 느꼈던 것 같다. 자신의 호를 열수(洌水)라고 지었다. 그때 한강을 열수라고 불렀다. 다산이 사용한 많은 호 중 하나가 젊었을 때 열수다. 그걸 보니까 그 강에 대한, 두 물줄기가 큰 흐름을 이룬다는 데 대한 다산의 자부심과 애착, 그가 느꼈던 영감을 알 수 있었다. 그 강 건너편이 바로 퇴촌면인데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인 천진암이다. 다산은 거기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서 천진암에서 형제들과 천주교를 배웠던 것이다. 강 건너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강을 건너가 천주교를 배웠기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다산은 천주교를 배반하고 살아남았고 큰형 약종은 자신의 진리를 증거하다 순교했다. 강 건너편의 천주교 묘지에는 이승훈, 정약종, 권철신 같은 순교자들이 묻혀있고 바로 건너편에는 다산이 묻혀 있다. 순교자와 배교자의 무덤이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구도가 참 비극적이면서도 인간의 역사는 영원한 의문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그 성지에 묻힌 정약종이나 이승훈 같은 분들이 다 순교자인지는 분명치 않다. 이승훈 같은 경우는 모르겠다. 마지막 순간에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약종은 분명한 순교자였던 것 같고. 하나의 강을 끼고 양쪽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대칭 관계, 그런 것들이 또 하나로 합쳐가지고 더 큰 강을 이루면서 미래로 흘러가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며칠을 한강가를 떠돌고 살았다. 결국 내가 이번 한강을 다니면서 느낀 것은 인간의 희극과 비극은 끝이 없고 인간의 야만과 아름다움이 뒤섞여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런 자리에서 정돈된 얘기를 할 수는 없다. 머릿 속이 정돈된 사람이 아니다. 질서나 체계나 시스템이 머릿 속에 들어있지 않다. 나는 머릿 속에 어떤 질서가 들어있는 사람, 시스템이 들어있는 사람들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내 머릿 속에 시스템이 없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물론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다만 무질서하고 뒤죽박죽인 세상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상대로 글을 쓰기 때문에 뒤죽박죽인 사람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양쪽에 무슨 우열의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머릿 속에 질서나 시스템이 들어있는 사람들은 시스템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잘라 버린다. 가지런함만 유지한다. 나는 그 가지런한 것은 알겠는데, 그런 가지런함으로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는 잘 알 수가 없다. 우열의 관계를 말하는 게 아니고, 사람의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가령 나의 무질서와 계통 없음을 말하는데, 누군가 인간의 신념에 대해서 묻는다면, 나는 신념을 가진 자의 편이 아니고 의심을 가진 자의 편인 것 같다. 신념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구태여 내가 어느 편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의심을 가진 자들 쪽에 더 많은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아까 들어와서 사진(강연장 벽에 걸린 흑백 기록 사진)을 봤는데, 아주 유명한 사진이다.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끊어진 대동강 철교를 피란민들이 개미떼처럼 기어서 남하하는 사진이다. 6.25를 대표하는 비극적인 사진인데 퓰리처상을 받은 사진이다. 1.4 후퇴 직전이다. 내가 3살 때 찍힌 사진이다. 나는 1948년생이다. 그때 대한민국이 수립됐고, 북한에는 인민공화국이 들어섰다. 저 사진을 보니까, 저 사람들이 어느 나라 사람이라는 느낌이 안 들었다. 어느 국가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다만 서식지를 박탈당한 야생동물의 떼들 같았다. 그냥 서식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찾아 남하했다고 했지만 내게는 그런 느낌이 없었다. 저 사진을 보고 너무 무서워서, 내가 자란 후에 세 살 무렵의 신문을 다 찾아봤다. 조선일보, 부산일보를 읽었다. 내가 세 살 때 이 나라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고. 저게 1.4 후퇴 직전에 찍은 사진인데, 저 피란민들이 서울까지 내려와서, 1월4일 대한민국 정부는 서울을 버리고, 2차로 피란을 가게 된 것이다. 1월 2일쯤 인민군들이 개성까지 내려왔는데, 개성에서 서울은 한나절 거리다. 기자들이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에게 몰려가서 물었다. “우리 시민은 피란을 가야 하나” “정부는 서울을 사수할 것인가” 대통령의 답변은 이랬다. “피란을 가는 것은 무방하다. 피란을 가지 않는 것도 무방하다. 그리고 국민은 주거권을 선택할 수 있다.” 날씨가 추우니까 “피란을 가기로 한 사람들은 이부자리와 식량을 지참하는 것이 좋겠다. 피란을 갈 때는 국군이 작전을 해야 하니까 간선도로를 피해서 샛길로 가길 바란다. 피란민들은 대구나 부산으로 집결하지 말고, 각자 소도시로 산개하기 바란다. 대구는 반격 기지이고 부산은 병참기지이기 때문에 그쪽으로 피란민이 몰리면 작전을 수행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런 얘기를 했다. 국방부 장관은 “피란을 갈 때는 가져가지 못하는 김치와 된장은 국군에게 기증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게 다 신문에 난 얘기다. 내가 세 살 때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걸 보니까,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그 생각이 난다. 저 원수 같은 사진을 보니까.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러, 내가 고등학교 때가 60년대 초였는데, 당시 국민 소득이 82달러였다. 세계 최빈국이었다. 나는 그런 나라에 태어나서 전쟁의 시대와 최빈국의 시대를 지나 2만달러 시대의 늙은이가 됐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아득하기도 하고, 그 82달러에서 2만달러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를 이제는 돌이켜 보게 된다. 가끔 옛날 신문을 본다. 50~60년대 신문을 들여다본다. 얼마나 많은 비리와 억압과 부조리를 바탕에 깔고 그걸 베이식으로 삼아가면서 2만달러 시대로 넘어왔던가를 들여다봐야 할 때가 됐구나 싶다. 그것은 마치 박물관에 가보면 100만년의 시간이 흘러도 인간의 야만성이 청산되지 않은 흔적이 남아 있듯이. 그 인간의 야만성의 흔적 속에 실로폰과 꽃가루가 같이 있듯이, 그렇게 고통스럽게 역사가 전개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요즘 내가 놀러 다니면서 느끼는 생각들이다.

    내가 좋아하는 망원경이 있는데, 강 건너 풍경을 당겨서 본다. 농부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일할 때는 부부가 같이 일하는데 밭에 앉아서 아무 말도 안 한다. 저녁 때가 되면 남편이 경운기를 끌고, 부인이 뒤에 적재함에 탄다. 역시 말을 안 한다. 표정을 보면 말을 안 해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표정에 도달해있다. 저런 표정을,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않는 사람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건 정말 카메라가 아니면 안되는 것이다. 글로는 할 수가 없는 표정들이다. 그런데 한결같이 말을 안 하면서도, 말을 하고 싶어하는 열망도 없어 보인다. 그런 걸 다 떠나서, 고요하고 평화로운 느낌만 준다. 나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서 마치겠다.

    사회자: 더 길게 해도 할 말이 많겠지만 약속대로 30분 정도만 하겠다. 이제 질문을 받겠다.

    -두 가지를 묻겠다. 식사는 직접 해드시나? 사모님이 함께 있나?

    나는 옆에 누가 있으면 일을 못하니까 늘 혼자 있다. 내 방에는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책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런 자리에서 말을 할 때 혹은 글을 쓸 때 자기가 읽은 책을 들이대는 사람을 나는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 책을 갖고 와서 여기에 이렇게 돼있다고 하는 사람을 보면 답답한 생각이 든다. 나는 책 세 권을 갖고 있다. 국어사전, 영어사전, 한문사전만 있다. 다른 책은 한 권도 없다.

    -책을 드시는 게 아니라 식사를 어떻게 하시는지 물었다.

    내 냉장고에는 감자, 옥수수, 우유, 치즈, 달걀, 그런 게 들어있다. 그리고 소금, 물도 있다.

    -아까 세 시간을 일한다고 했는데 그 일이 글을 쓰는 것인가?

    글 쓰는 것이거나, 아니면 가만히 앉아 있는다. 남들이 보기에 저 사람 놀고 있구나 할 때 나는 일을 할 때가 많다. 잘 설명하기 어렵지만.

    -소설가 지망생이다. 나는 누군가 마감만 정해주면 하루에 열편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마감이 없으면 절대 글을 못 쓴다. 마감이 없을 텐데 어떻게 자율적으로 글을 쓰고 있는지? 마감 없이도 글을 쓰는 법을 알고 싶다.

    신문사 다닐 때 마감을 못 지켜서 많은 선배들한테 무수히 혼났다. 그때 마감을 못 지킨 것은 아마 나 자신의 무능력도 있었고, 도저히 마감을 지킬 수 없는 과중한 업무 때문이기도 했다. 두 가지 결함이 다 있었다. 내가 나의 잘못을 변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대개 취재를 열심히 한 기자들은 기사를 금방 쓴다. 취재한 내용이 없으면 관념으로 짜맞춰야 하니까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거다. 지금은 내게 강요된 마음이 없이 자유롭게 살고 있기 때문에, 가장 무서운 것은 규율이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한 규율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규율로 잡아줄 사람이 없다. 내가 나 자신을 다스려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에 나의 삶의 성패가 달렸다.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규율이 없으면 건달 밖에 안 된다. 스스로 시간을 정해놓고 매일 열심히 하려고 한다. 오늘은 책을 조금 읽자, 오늘은 글을 몇 자 쓰자는 식으로 지키려고 한다. 항상 마감은 정해놓지 않고 하루 다섯 장(200자 원고지 기준)을 쓰려고 정해놨다. 시간을 정해 놓은 게 아니라. 책상에다 ‘필일오(必日五)’라고 써놨다. 반드시 하루에 5매를 쓰자는 뜻이다. 그러니까 시간은 없고 양을 정해 놓고 살고 있다.

    -언론인을 지낸 사람이다. 예전에 인터넷에서 봤는데 김훈 선생은 탈고 이후 일체 원고를 보지 않고 팽개친다고 읽었다. 나같은 경우 탈고 후에도 퇴고를 많이 하는 습관이 있다.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 지금도 탈고한 원고는 보지 않는지 궁금하다.

    탈고한 원고를 들여다보지 않을 뿐더러 출판사에서 책을 나중에 보내와도 열어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지겹고 다시 들여다보면 죽을 것 같았다. 지긋지긋하고, 또 보면 ‘내가 이것 밖에 못하나’ 하고는 책을 덮었다. 꼴을 보기 싫어 가지고. 내 책에 오자가 있는 것을 안다. 그것을 고치지 않았다. 오자를 고치라고 하면 다시 읽고 해야 하니까 지겨워서 하지 않았다. 죽을 것 같았다. 지금도 오자를 그대로 놔뒀다. '칼의 노래'에는 이순신 부대가 감자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감자를 쪄먹었다’고 썼는데, 어느 문과대학 교수가 전화해서 "감자는 임진왜란 이후에 국내에 들어온 건데, 이순신 부대가 감자를 먹었냐. 고쳐라"라고 했다. 하지만 안 고쳤다. 왜냐면 다시 또 보려면 너무 지겹고 해서. 그 대신 글을 넘길 때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넘기는데, 다 써놓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항상 이게 아닌데 싶다. 거기까지는 알겠는데, 그러면 이게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럼 할 수 없이 출판사에 원고를 갖다 준다. 그렇게 해서 책이 나오면 열어보지 않는 거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 같다.

    -김훈 선생을 말하자면 선친 김광주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어느 인터뷰에서, 선친에 대한 글을 쓴다고 들었는데, 언제 쓸 계획인지 궁금하다.

    (이때 갑자기 어디선가 ‘이히히힝’하는 말울음 소리가 들렸다. 김 작가 휴대폰에서 나는 벨소리였다. 뜻밖의 컬러링에 청중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김 작가는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들고 소리를 죽이려 했지만, 여의치 않은 듯 말울음 소리는 7-8초간 계속됐다. 사회자가 “아주 절묘한 시점”이라면서 “있다가 보충 설명을 드리겠다”고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1910년생이다. 우리나라가 망해서 없어지던 해, 한일합병 해에 태어나셨고, 나는 나라를 다시 만들 때인 1948년에 태어났다. 1910과 1948년은 우리 부자의 운명적인 좌표 같이 돼있다. 아버지는 만주에 가서 김구 선생 밑에서, 별 중요한 직책은 아닌, 양말을 꿰매거나 잔심부름을 하는 당번병 같은 일을 했다. 작전 참모 같은 것은 아니고. 그런데 그걸 부친은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겼다. 김구 선생 수발 들고 팔다리 주물러 드리고 하는 일을.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6.25 전쟁을 겪고 이승만, 박정희 때까지 사셨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 때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 얘기를 쓰려면 82달러에서 2만달러 사이에 벌어진 일을 써야 하는데, 너무나 힘들고 어려워서 마무리를 못하고 밀쳐놨다. 그 소설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생애를 보면,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안 울었던 것 같다. 한쪽 눈으로만 울고 딴쪽 눈은 안 운 것 같다. 나는 아버지의 생애 같은 삶을 살면 안 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허랑방탕하고 집에 안 들어오시고, 술 먹고, 돈은 어디에 갖다 쓰는지 몰랐다. 우리 아버지만 그런 게 아니라, 그 시대 아버지는 다 그랬다. 우리 엄마는 지금 미국에 계신데 치매에 걸려서 요양원에 있다. 내가 가면, 가끔 정신이 돌아오는데 포대기에 베개를 눌러서 업고는 그걸 훈아 훈아 하고 부른다. 내가 어릴 때 업고 다닌 걸 회상하는 거다. 그리고 베개 위를 찢어서는 그걸 입이라고 생각하고는 거기다 음식을 넣고, 그게 썪으면 간호원한테 야단맞고, 베개 밑에 기저귀도 채우고 그런다. 그걸 보면 나는 옆에서 울 수밖에 없다. 용돈을 쓰라고 드리면 노인이 쓰지도 못하고 고기를 산다. 고기를 사서 인편으로 보낸다. 내가 어렸을 때 고기를 못 먹여서 한이 된 거다. 우리가 피란 갈 때 아버지는 피란을 안 가고 어디론가 혼자 가신 모양이다. 우리 엄마가 어린 4남매를 데리고 부산으로 피란 열차를 타고 갔다. 그때 사진을 보면 피란 열차 지붕 위에 새카맣게 피란민들 자식들을 태우고 가지 않나.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당시 젊은 여자가 어떻게 어린 네 남매를 데리고 그 열차 위에 올라탔는지 알 수 없다. 어머니한테 물어볼 수도 없다. 치매에 걸리셔서. 간호원을 통해 자꾸만 나보고 오라고 하신다. 가서 뵙고 오면 또 전화가 온다. 어디 갔냐, 왜 안 오냐고 자꾸 물으신다. 우리 부모 세대는 그런 인생을 사신 거다. 아버지는 시대와 더불어 좌충우돌하고 허랑방탕했고. 바람도 폈고. 그 당시 아버지는 다 그랬다. 박정희 대통령이 들어와서 가장 먼저 한 것이 축첩 공무원을 처단했다. 당시엔 공무원들이 9급만 돼도 첩이 있었다. 학교에 가면 내 친구 아버지들이 바람 피운 것도 다 알았다. 친구들이 다 얘기했다. 우리 아버지는 어쩌고 하니까 다 안다. 심지어 친구 아버지 첩이 어느 다방 마담인지도 알고 있었다. 특징적인 차림이 있었다. 머리를 한 쪽으로 몰면 하얀 목이 보였다. 핸드백, 단추가 달려서 열면 딱 소리가 나는 게 있었는데, 거기서 우리한테 돈을 꺼내서 주고는 공부 잘해라 그러고는 딱 하고 다시 닫고는 옆구리에 끼고는 가고 그랬다. 옥색 구두 같은 것 신고. 그런 기억이 난다. 그런 얘기들을 얘기한 것처럼 잘 쓸 수 있을런지는 잘 모르겠다. 고민을 해봐야 알겠다.

    사회자: 제가 보충하겠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김 작가가 감정도 많고 한도 많고 한데. 책에서 읽은 분도 계시겠지만, 김 작가가 한번은 아버지한테 “아버지는 꼭 허클베리 핀 아버지 같아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야, 광야를 달리는(밖으로 나도는) 말이 마구간(가정)을 돌볼 수 있겠느냐”고 답했다고 한다. 아까도 말소리가 났는데 바로 아버지가 전화하신 거다.(웃음)

    -김훈 작가의 작품을 다 읽었다. 나눠준 자료에도 있는데 글에 허무주의적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나도 글을 쓰는 입장에서 김훈 작가의 글을 보면 허무가 묻어나는 느낌이 강하다. 이런 문장, 이런 세계관, 이런 정신 구조를 갖게 된 것이 아버지와 가정 환경의 영향인지, 아니면 더 성장해서 신문기자를 거치면서 책과 지식을 통한 어떤 세계관의 형성에서 나온 건지 궁금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기 정신 세계에 영향을 미친 사건이나 환경이 무엇인지 얘기해 달라.

    허무주의라는 것은 내가 어떤 이념이나 정치 노선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아마 그것이 허무주의적인 것으로 비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한산성을 보면 주전파와 주화파의 싸움이 나오는데 나는 아무 편도 아닌 것이다. 그 어느 쪽도 건전한 이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에게 삶 이상으로 중요한 게 없다고 본다. 살아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나머지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허무주의가 나의 글에 물론 있고, 세상의 허무와 싸우는 인간의 처절한 투쟁의 모습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허무주의냐 낙관주의냐 재단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정신세계의 형성 과정에 관해서는, 아마 나한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내 의식의 바탕을 형성하는 것은 내 유년의 가난, 전쟁, 전쟁에 대한 기억, 깡통 차고 끼니를 얻으러 다니던 거지 아이들 모습이다. 거지 아이들이 와서 밥을 달라고 애걸을 하는데 안방에서는 우리 식구들끼리 모여서 밥을 먹을 때 느끼는 참담함, 부산에서 보낸 유년의 기억, 환도 이후에 서울 와서 학교 다닐 때 천막 교실, 그런 것들이 마음 밑바닥에 쌓여있는 것 같다. 그런이 지긋지긋하고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운 것 가다. 딱 붙어있는 것 같다.

    책에 의해 형성된 부분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책에 의해서 배운 것은 별로 없고, 다 길바닥에서 배운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책보다는 사물이나 사태, 사건에 의지해서 세상을 바라보려고 생각한다.

    -작가라면 책을 자식처럼 분신처럼 여긴다. 그런데 아까 갖고 있는 책이 사전 세 권뿐이라고 했다. 책이 없는 것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면서 가치있게 평가를 안하는 것 같다. 왜 그런지. 어차피 남의 책도 읽을 텐데 그런 책들은 어떻게 하는지 남을 줘버리는지?

    나는 책을 안 읽는 사람은 아니다. 일반 사람보다는 많이 읽는 사람이다. 온갖 책을 다 읽는다. 문학, 철학뿐만 아니라 기계공학, 자연과학서도 본다. 항해사 자격시험 문제도 읽는다. 소방관 자격시험 문제도 읽는다. 여성 화장은 어떻게 하나, 그런 책도 읽는다. 다만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을 추호도 자랑으로 여기지 않는다. 나와 같이 학교를 다닌 친구 중에는 책을 한 권도 보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래도 훌륭한 인품을 갖고 있다. 나보다 넉넉하고 너그럽고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부하들을 잘 통솔하고, 훌륭한 사람이 많다. 모자람 없이 잘 산다. 책을, 글자를 꼭 들여다봐야만 훌륭한 인간이 된다고 할 수는 없다. 삶의 현장에서 배운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내가 전에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 깊은 산간 마을로 들어가면 할머니들 한글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학교도 안 가고 신문도 안 보고. 그런데 이 노인들이 세상만사를 다 알고 있다. 환경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고 개돼지를 어떻게 대하고 외지 사람은 어떻게 대하고, 이웃과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 안다. 알뿐 아니라 그걸 평생 실천하고 있다. 우리 같이 공부한 사람 입장에서 굉장히 부끄럽다. 책을 읽어서 이기심만 발달하고 자신의 똑똑함을 늘 증명하려고 하고. 그러니까 책을 읽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책을 읽은 것은 그다지 대수로운 자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방에는 책을 안 갖고 있다. 책을 갖고 있으면 혼란스럽다. 귀신들이 들끓는 것 같고, 정신 집중이 안 된다. 기자들이 와서 사진 찍자고 하면 꼭 책꽂이 앞에서 찍자고 하는데 저 사람들이 대체 왜 저러나 싶다. 무슨 자랑이라고 거기 가서. 카메라 기자는 그 앞에서 찍어댄다. 참 진땀나는 일이다.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도 책을 들고 있는데 나는 좀 심하다고 생각한다. 이분이 인문주의적 계몽 군주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책을 펼쳐들었겠지만, 임금 정도 되면 책을 구태여 펼치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좀 남사스럽다.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회자: 김훈 작가가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할 때는 사진기자에게 그렇게 찍으라고 했을 것 같은데.(웃음)

    -김 작가는 10여년 전부터 저널이나 인터뷰에서 언어와 관련된 시대적 상황을 많이 이야기했다. 그중 기억나는 것이 “이 시대가, 사실과 의견이 막 혼재된 말이 나온다.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는 게 많다. 이건 말이 안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언론사를 비교하면서 직설적으로 “한겨레 같은 경우 객관적인 사실을 다루는 저널리즘으로 남을지, 하나의 사회 세력으로 남을지 판단해야 한다” “조중동 같은 보수 신문은 자신들이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오만함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이 말들이 지금도 유효한가.

    나는 언론에서 떠난 지 오래됐지만 우리나라의 주요한 언론들은, ‘A라는 신문은 A라는 신문사의 기관지’ ‘B라는 신문은 B라는 신문사의 기관지’라고 생각한다. 객관적 사실에 바탕한 언론은 점점 쇠퇴해지고, 객관적 사실을 규명하려는 노력도 점차 희미해지는 것 같다. 나는 정의라는 것은 사실의 바탕 위에서만 건설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의 바탕 위에다 정의를 세울 수 있는 것이지 거꾸로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의나 신념의 바탕 위에 사실을 세우려고 하면 다 무너져 버린다. 사실의 토대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언론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사 다닐 때 선배들한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얘기다. 그것을 우리가 실천했으냐 못 했느냐의 문제일 뿐이지 그걸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작가로서 영화를 자주 보나? 지난 여름 개봉한 ‘명량’을 보고 상당히 실망했다. 완성도가 떨어지고 시대가 갈망하던 이순신의 리더십에 관한 감동적인 스토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칼의 노래’ 작가로서 그 영화를 봤다면 어떻게 평가하는가.

    영화를 거의 안 보는데, 명량은 우리집 아이들이 보자고 해서 봤다. 10년 만에 본 것 같다. 나는 영화에 전문적인 식견은 없는데, 명량은 대중적인 볼거리로 만든 영화라고 생각했다. 다만 고뇌하는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 약했고. 과도한 애국주의가 작용한 점은 거북했다. 백성들이 일치단결해서 무너진 배를 살리고 하는 것은 과도한 애국주의라고 생각했다. 나는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을 쓸 때 백성, 국민의 애국심을 전혀 묘사하지 않았다. 국민에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국가가 요구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요구한다면, 그러면 왜 국가가 존재하는 것인지 물어볼 수 있는 게 자유인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남한산성은 임금과 권력자가 도망온 곳이었다. 산성 안에는 본래 자족한 마을이 있었고 백성들이 살던 곳이다. 임금이 오니까 백성들이 못 살 게 됐다. 당연히 임금을 욕했을 것이다. 저 못난 게 여기까지 와서 다 죽게 생겼다고 심하게 욕했을 것이다. 나는 백성들이 어떻게 욕했나 이런 점이 궁금했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은 이런 건 기록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끼워 맞추는 것이다. 명량이란 영화에 나오는 과도한 애국주의도 예술성을 해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를 젓는 병사의 표정과 역동성은 볼 만한 장면이었다.

    사회자: 명량이라는 영화 덕분에 칼의 노래가 다시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좋은 것 아닌가?

    그건… 나쁜 건 아니지.(웃음) 사실은 그전에도 꾸준히 팔리던 책인데, 명량 영화 때문에 또 팔렸다. 그런데 어떤 매체를 보니까, 명량 영화의 흥행과 칼의 노래의 판매고를 말하면서, 명량 ‘덕에’ 라는 말을 썼다. ‘덕에’는 야만적인 말이다. 언론인들이 이렇게 언어에 대해 둔감하고 무식하고 그런 흉악한 말을 쓴다. ‘덕에’라고밖에 쓸 수 없는 사람들은 그냥 나가는 게 좋겠다.(웃음) 내가 전엔 문학상을 받았더니, 어떤 매체는 그렇게 썼다.그때 상금이 5000만원이었는데, 김훈이 상을 받았다고 써놓고는 마지막 문장에다 “이로써 김훈은 5000만원이 생긴다”고 썼다. 그런데 ‘생긴다’는 말은 언론이 쓸 수 있는 말은 아니지 않나. 그 영화 ‘덕에’ 책이 팔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한산성부터 흑산에 이르기까지 선생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읽은 것이 ‘삶과 죽음’에 대한 관찰이었다. 지난 10월3일 JTBC와의 인터뷰를 보니 팽목항을 가서, “자본주의의 이면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번 세월호 사건에 삶과 죽음이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작품 계획이 있나?

    세월호 사건은 참 말하기 어렵다. 나는 이준석 선장과 참사 다음날 자살한 단원고 교감, 두 인물에 대해 관심이 있다. 선장은 우리 시대의 아주 대표적인 한 캐릭터다. 그 선장은 우리의 이웃이고, 나 자신의 상당 부분이 투영돼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그 선장의 아들을 주인공으로,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소설로 쓰려다 힘들어서 미뤄놨다. 내가 설정한 것은 이런 거였다. 이준석 선장은 그 사태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인 것은 틀림없지만, 이 사회가 그 책임을 요구하기는 상당히 무리가 있다. 어쨌든 자신의 직무를 배반하고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다. 교감은 정말 괴롭다. 그는 인솔 책임자인데 제일 먼저 배에서 탈출하고 그 다음날 산에 올라가 목을 매 자살했다. 그런데 교감을 탈출할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육지에 올라가 죽을 때까지 그의 마음의 행로, 그런 것들이 나에게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너무나 괴롭게 다가왔다.

    세월호 사건에 대해 내가 전에 무슨 TV하고 전화로 얘기하면서 자본주의 전체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있어서 지금 질문한 것 같은데. 그 안에는 수많은 자본주의와 권력 사이에 결탁한 세력이 저지른 많은 범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가치를 반성하는 계기가 돼야만 우리가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정부는 모든 경제적인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이 자본주의적인 가치와 지향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규제를 철폐하고 자유 경쟁을 강화하고, 경기장에서 게임을 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을 다 제거해 주겠다, 마음대로 하라는 식이다. 그런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내가 사는 일산에는 대형마트가 최근에 세 개쯤 들어섰다. 도시 상권이 다 무너졌다. 규제를 철폐하니 자유로운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은 경제를 잘 모르는 서민으로서 하는 얘기다. 면세점 허용도 그렇다. 그렇게 허용하면 누가 하나. 삼성과 신세계 같은 대기업들이 하는 것 아닌가. 막대한 매출을 올릴 것이다. 국가는 거기서 올릴 수 있는 세금을 포기하는 대신에 재벌에게 막대한 이익을 허용한 것이다. 그런 것을 규제 완화라고 하고 합리적인 해결책이라고 한다. 나는 그런 게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 나는 의심하는 쪽이다. 나는 그런 문제에 대한 신념이 없다. 경쟁을 저해하는 규제를 다 뽑아버리면 다 행복한 사회가 되는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은 것이다. 거기에 많은 의문을 갖고 있다. 강자와 약자가 공정거래를 하면 공정한 약육강식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시장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구원해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이 세월호가 우리에게 주는 반성이 되어야 맞다고 생각한다. 그때 그 얘기를 했던 것이다.

    -‘남한산성’이 작년 대입 논술 문제에 출제된 걸 봤다. 거기에서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지문 중 하나로 나왔다. 대학에서 작품이 인용 출제되면 저작권 협의가 있나?

    대학 출제뿐 아니라 많은 참고서나 교재에서 부분적으로 인용해서 책을 만든다. 나뿐 아니라 여러 작가들 작품 발췌해서 책을 만든다. 참고서로 만드는 게 10여 종이 된다. 한 출판사에 전화해서 나와 협의하고 저작권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다른 출판사에서는 다 했는데 왜 우리한테만 이러냐”고 말하더라. 그래서 너무 힘이 들어서 그만뒀다. 요새는 저작권협회에서 제도적으로 보호해준다고 들었다. 법을 찾아보니 교육적인 목적으로 텍스트를 인용할 때는 일방적으로 써도 무방하다고 돼있더라. 위법은 아니지만 예절 바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까 이야기 중에 머리가 정리가 안 되고, 시스템적으로 돼있지 않고, 그런 것을 혐오한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많은 책을 섭렵했기 때문에, 자신이 소설감이라고 생각하면 시스템적으로 정리가 잘 되었기 때문에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나.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스템이 아니고 구체성이다. 삶의 일상성과 구체성,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체제나 지향성 그런 것은 나에게는 덜 중요하다. 어떤 가치 체계라도 삶의 구체성 위에 건설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자신 주변의 삶을 똑바로 관찰하지 않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게으르고 무책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책 중 하나가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다. 그는 21세 때 영국 해군의 배인 비글호를 타고 5년 동안 전 세계를 다니면서 온갖 해안과 섬에 상륙하면서 모든 현상을 관찰하고 비교하고 기록해 책을 썼다. 이것이 나중에 진화론으로 발전하는 길을 열었다. 그런 분석과 관찰, 비교, 의심, 의문을 제기하는 방법에 의해서 이 세계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인간이 선입견이 없이, 어떤 전제 없이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열어놨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증명된 학설은 아니지만 그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열었다. 당시 배의 선장이 29살이었다. 로버트 피츠로이라는 영국 해군 중위였다. 영국 해사를 나왔다. 그 배는 범선이었다. 엔진과 내비게이션 장치가 없었고 본국과 교신이 안됐다. 모든 위험을 스스로 방어했다. 나는 소설가에게도 선입견 없이 바라보는 태도, 그런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삶을 과학적으로 유물론적으로 들여다보는 전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을, 문학이니까 낭만적으로 정서적으로 로맨틱하게 들여다 보고 그런 얘기를 써야 한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은 작가가 될 수없다. 다 망한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구체성이다. 다윈은 수백만개의 구체성을 종합해서 하나의 원리와 관점을 만들어낸 것이다. 다윈의 경우 구체성이 시스템을 이룬 것이다. 다윈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읽은 범위 내에서 말한 것인데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선생의 작품이나 인터뷰를 보면 글이나 말의 번다함에 대해 혐오까지는 몰라도 굉장히 부정적인 느낌을 말하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일의 좌절감’을 토로한다. 그러면 왜 작가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애써 글로 쓰려 하는 것인지 질문하고 싶다. 또 반대로 글을 쓴다는 것은 독자를 전제로 하는 건데, 왜 김훈의 글을 읽어야 하는지 답을 해달라.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한 문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 글이나 말하기, 언설 행위로 여론 형성에 기여하려는 목표가 없다. 여론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향이 전혀 없다. 그리고 나의 논리 앞에 남을 대령시키려는 의도가 없다. 말을 가지고 남과 정의를 다투려는 의도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글을 쓰느냐. 나는 나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해 글을 쓴다. 내면을 드러내서 그것이 남에게 이해를 받을 수 있으면 소통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와 남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이다. 나와 남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도 크게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반드시 소통이 되고 너와 내가 얼크러져야만 훌륭한 것은 아니다. 너와 내가 소통이 안되고 피차의 차이와 상이점을 아는 것도 아주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배경이다. 나는 내가 소설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설정한 적이 없다. 나는 젊었을 때 나는 ‘나중에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되고 글을 써야지’ 하는 예술적 낭만과 로맨틱한 목표를 갖고 있는 젊은이가 아니었다. 나는 그냥 학교를 졸업하고 밥벌이를 할 생각을 한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74년에 신문기자가 됐는데, 어떤 사람은 물어본다. 왜 기자를 했냐고. 그럴 때 사람들은 대개 장황한 대답을 하는데, 나는 육군을 제대하고 먹을 것이 없어서 길바닥을 헤매다가 취직한 거다. 언론의 지도자가 되고 사회의 목탁이 되고 여론의 리더가 되기 위해 신문기자가 된 것이 아니다. 길바닥 헤매다 취진한 거다. 거기서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인간의 인생이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꼭 훌륭한 목표를 세워 놓고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훌륭한 소설가가 되겠다고 목표를 설정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다만 나의 내면을 표현하겠다는 목표를 추진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다. 왜 글을 쓰느냐 하는 것은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나의 글로 남을 설득하고 진리를 얘기하고 나의 명석함을 증명하려는 이런 욕망이 나는 없다.

    사회자: 그래서 내 글을 읽으라는 것인가?

    나는 내 글을 읽으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글쎄, 글을 읽을 때는, 책을 읽을 때는 양서를 골라서 읽는 게 좋겠다는 정도...(웃음)

    사회자: 김훈 작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에피소드를 덧붙이겠다. 처음 한국일보에 입사했을 때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앙케이트를 했다. 자기 PR을 해보라고 했다. 당시 김훈은 “나는 일체의 깃발을 혐오하는 자이다”라고 했다. “밖에서 본 한국일보와 안에서 본 한국일보를 비교해서 말해보라”는 질문에는 “밖에서도 한국일보를 본 적이 없소. 앞으로도 그럴 것임”이라고 답했다. 한국일보 기자가 되었는데도 어떻게 한국일보를 안 보나? 어쨌든 그렇게 뚜렷하고 특이한 답변을 했던 사람이다.

    -무식한 질문 하나 하겠다. 지금까지 좋은 소설을 많이 써서 엄청난 독자가 돼 있는데, 현재까지 번 돈이 많을 것 같다. 얼마나 벌었나? 어떻게 쓰는지도 궁금하다.

    나는 책 한 권을 쓰면 그걸 팔아서 다음 책을 쓸 때까지 먹고 살 수 있다. 다음 책을 써서 또 그 다음 책을 쓸 때까지 살 수가 있다. 나는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나라 작가 중에서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축복 받은 존재다. 아주 축복 받은 거다. 흔치 않다. 다들 쩔쩔매고 산다. 세무서에 가면 우리 같은 사람을 자영업자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과세 표준점 미만이다. 세무서 용어로는 ‘만성적 준실업’이라고 불린다. 나는 과세 표준점을 넘어온 거다. 나보고 얼마를 벌었느냐 액수를 밝히라는 건가.(웃음) 수입은 그 정도로 올렸고. 세금은 많이 내야 되고. 버는 돈의 4분의 1을 내고, 또 주민세 10%도 낸다. 세금을 1억원을 내면 주민세를 1000만원을 내야 한다. 소득세를 많이 내는 만큼 주민세도 많이 낸다. 주민세라고 하는 것은 참 이해가 안 된다. 그건 죽으면 안 받아간다. 무슨 행위에 대한 세금이 아니고 존재에 대한 세금이다. 내가 안 죽고 살아있는 것에 대해 세금을 내야 한다. 돈을 벌었고 부동산을 취득했고 매매를 했고 월급을 받았기 때문에 세금을 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안 죽고 숨쉬고 살아있는 것에 대한 세금이다. 세금을 내기 싫다는 얘기가 아니고, 더 많이 벌어서 더 많이 냈으면 좋겠다. 그게 내 뜻대로 될런지는 모르는 일이다.

    돈을 어떻게 쓰느냐고 물었는데, 나는 돈을 안 쓴다. 돈 쓸 일이 없다. 돈은 다 우리 집사람이 가져간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쇼핑이다. 백화점 가는 것. 펜시한 가게, 구두방이나 양품점 같은 데를 나는 절대 안 간다. 전에 백화점에 한 번 갔다가 질겁을 해서 나왔다. 여자들이 지갑에 고액권을 가득 넣어서 잘난 척하면서 쓰고 다니는 것을 봤다. 만정이 떨어져서 다신 안 간다. 이런 옷과 신발도 우리 집에서 사다 준다. 내가 돈 쓰는 것은 술값 내고 가끔 경조비 내는 것이 다다. 그 외에는 돈을 안 쓴다. 돈을 안 쓰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

    사회자: 담배는 끊었나?

    담배는 전에 하루에 두 갑을 폈는데 한 5년 전에 끊었다. 전에 너무 많이 폈다. 한 번은 무심코 절에서 무심코 담배를 폈다. 절에서는 담배는 피면 안되지 않나. 늙은 스님이 이리 오라고 하더라. 손가락으로. 그래서 갔더니 담배를 끄라고 했다. 바닥에 비벼서 껐다. 꽁초를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오라고 하더라. 버리고 왔더니 날더러 담배 끊어라 하더라. 화가 나서 스님은 담배 펴봤냐고 물어봤다. 자기는 안 펴봤다더라.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 몰라서 그러는데 이것은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담배를 못 끊는 중생의 고통을 이해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스님이 도력이 높으신 분인데 나를 보더니 “이놈이 말을 하네”라고 말했다. “왜 그걸 못 끊어. 네가 안 피면 끊는 것이고 피면 못 끊는 것인데 그걸 왜 못 끊어”하고 말했다. ‘내가 졌구나’ 하고 내려와서 하도 더러워서 끊으려고 결심을 하고 결국 끊었다. 얼굴에 붙이는 스티커 패치를 수십개를 붙여도 효과가 없더라. 여름에 공원에 가서 너무 힘들어서 티셔츠를 찢으면서 울었다. 그걸 참느려고. 참으니까 괜찮아졌는데 꿈에서는 핀다. 내세에서는 많이 피려고 한다.

    사회자: 벌써 1시간 30분이 지났다.

    -김훈 선배와는 한국일보를 같이 다녔다. 내가 신문사 재직 시절에도 그렇고 가장 관심을 갖고 닮고자 했던 점은 김훈 선배의 문체다. 특히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다. 칼의 노래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를 인상깊게 기억한다. 첫 문장의 화두를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퇴고하는지 알려달라. 요령이 있나?

    소설을 쓰는 것과 기사를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나는 신문기사라는 것은 문장이나 문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수많은 유익한 정보를 논리적으로 배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유익한 정보가 없으면 기사가 아니다. 쓰레기다. 요즘 기자들이, 신문을 보면, 수집한 정보를 전달하려고 하지 않고 멋진 수사를 하고 멋진 문장을 쓰려고 한다. 김훈이처럼 멋진 폼나는 문장을 쓰려고 하니까 그게 다 쓰레기로 보이는 거다. 기자의 본질은 ‘스파이’다. 남을 염탐하는 것이다. 저놈이 무슨 생각을 하나, 무슨 공작을 꾸미고 있나 염탐을 해서 쓰는 거다. 자신이 수집한 팩트들을 관리하고 팩트가 유용한지 아닌지, 남에게 전달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해서 논리적으로 배열해서 전달하는 것이 신문기자다. 어떤 기자들은 정보도 없이 대중을 리드하는 사상가가 되려고 한다. 그런 것은 좋은 기사 문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보에 바탕하지 않은 것은, 수사학이고 사상이고 간에 신문에서는 다 필요없는 것이다.

    소설에서의 문장은, 첫 문장이 힘이 있어야 한다. 칼의 노래의 첫 문장인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의 힘은 간단명료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어+동사’다. 아름다운 수사학에서 힘이 나오는 게 아니다. ‘주어+동사’의 놀라움이 거기에 있다. 나는 그걸 이순신에게서 배웠다. 대학에서 배운 것이 아니다. 난중일기, 임금에게 보내는 보고서 그런 데서 배웠다. 이것은 군인이 아니면 쓸 수 없는 문장이다. 문인이 아니면 범접할 수 없는 주어+동사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 사유의 세계, 결단력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난중일기를 보면 부하를 많이 죽인다. 7년 동안 120번 정도의 군법을 집행한다. 죽이지 않으면 곤장을 치고 감옥에 보내고 강등시켰다. 군율을 어겼을 때에도 ‘거듭 군율을 어겼다, 군율을 어겨 베었다’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지저분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 ‘군율을 어겨 베었다’고 썼다. ‘목을 잘라서 성문에 걸었다’ ‘오늘 남원이 함락됐다는 보고를 들었다’ ‘나는 밤새 혼자 앉아있었다’ 이런 단순성이 갖는 문장의 힘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첫 문장의 힘은 그리 오래 가지는 않는다. 두어 페이지 넘어가면 이 힘이 빠진다. 그럼 또 강한 문장을 갖다놔야 한다. 그럼 거기에 의지해서 십여줄이 나가는 것이다. 중간중간에 힘찬 문장을 박아놔야 한다. 문장 하나 가지고 오래 가지를 못한다. 첫 문장으로 끝까지 우려먹고 살 수는 없다.

    사회자: 첫 문장에 관해 기억나는 이야기를 하자면, 80년대 목동 신시가지 개발을 할 때 현장 취재 갔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 김훈 기자가 쓴 기사의 첫번째 리드가, “목동 마을 사람들은 불도저가 미웠다”였다. 당시 김훈 기자가 쓴 글은 선배들이 고치지를 못 했다. 이걸 고치려면 처음부터 다 뜯어고쳐야 하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함부로 고칠 수 없을 정도의 자신만의 논리적인 얼개가 갖춰져 있었다.

    -김훈 선생은 국내 문학상을 거의 다 섭렵했는데, 우리도 노벨 문학상을 탈 후보로 김 선생을 생각했다. 좀 더 멋진 작품을 써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를 생각이 있는지 궁금하다.

    그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웃음) 국내 상을 몇 개 받은 적이 있었는데, 내가 책을 쓸 때 약력에 수상 목록을 쓴 적이 없다. 그런 것은 일종의 스캔달인 것 같다. 내가 상을 받으면, 많은 작품들이 후보로 올라오는데, 수상작이 탈락된 다른 후보작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을 수량화해서 비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상은 뭔가. 상은 심사위원들의 주관적 편견이고, 그 주관적 편견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노벨상은 수상이 시작된 이래 100년이 넘었는데 수상 작가가 100명이 넘는다는 얘기다. 그런데 사실 우리와 별 관련이 없는 작가들이다. 그걸 다 읽을 필요도 없다. 누군지도 다 모른다. 내가 무슨 상을 받았다고 해도 세월에 의해 풍화되는 것이다. 세월의 풍화를 견디기는 지극히 어려운 것이다. 과거에, 20~30년 전에 문학상을 받은 작품들을 보면 이미 낡고 퇴색되고 풍화되어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작품들이 있다. 상을 받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세월의 풍화를 견디는 일이 힘든 것이다. 한국 문학의 특징은 단절에 있다. 비극적이다. 이광수, 염상섭, 채만식 등 기라성 같은 선배 작가들의 작품을 우리는 더 이상 읽지 않는다. 다 박물관에 가있고 연구자들만 읽는다. 세대가 단절된 것이다. 그러니 상을 논할 때가 아니고, 글읽기의 세대가 단절된 것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는지 궁금하다. 요즘도 자전거를 타는지.

    나는 일하는 것보다 노는 걸 좋아한다. 누군들 안 그렇겠나. 아무리 일해도 스트레스가 없는 방식으로 일하고 싶다. 일과 놀이가 일치가 되면 스트레스가 없을 것 아닌가.할수록 신바람이 날 것이다. 그러나 합치는 건 매우 어렵다. 일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까닭은 우리 자신이 일로부터 소외돼 있기 때문이다. 짐작하건데, 전에 남해안에 갔더니 어부들이 뱃노래를 하는 것을 봤다. 멸치를 잡으면서 노래를 한다. 노래 박자와 동작이 딱 맞았다. 단순한 고기잡이 노래였다. 그걸 보니 그들은 고된 작업에서도 그다지 스트레스가 없어 보였다. 삶과 노동이 일치되어 보였다. 가령 현대식 콘베이어벨트에 앉은 근로자들을 보라. 그들이 일을 하면서 노래를 할 수 있겠나? 절대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완전히 소외된 노동이기 때문에 자기 육체로부터의 생산이 소외돼 있다. 신음밖에 안 나온다. 그래서 스트레스가 쌓인다. 나도 노동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있다. 어떨 때는 굉장히 심하게 나타난다. 그럴 때는 술을 먹는다. 지난번엔 좀 과도하게 먹었다. 운동도 한다. 운동도 너무 심하게 하면 병이 난다. 하루에 5시간씩 걸은 적도 있다. 바닷가를 걷고, 녹초가 될 때까지, 별이 뜰 때까지 돌아다니며 걸은 적도 있다. 그러고 와서 또 술 먹고, 그러고 또 일하고 그런다. 스트레스로부터 영원히 해방될 수는 없다. 현대의 산업화된 노동의 특징이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것도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글을 쓰다 보면 완전히 현실성이 없어질 때가 있다. 내가 현실에서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고 꿈 속을 헤매는 허깨비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어떨 때는 삽을 들고 가서 땅을 팠다. 궁덩이가 생기면 또 메운다. 들어와서 또 몇 자 쓰고 그랬다. 생각하면 참 비참한 생활을 살고 있다.(웃음)

    -정말 힘들거나 어려울 때 찾는 친구가 있나? 술 친구라든가. 종합적인 질문으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가장 어려운 질문이다. 지금 내 친구는 대개 후배들이다. 동년배 중에서는 친구가 없다. 다 늙어가지고 혼자 한적하게 지내는 것 같다. 후배들은 어리니까 술도 사달라고 하는 입장이 되는 것 같다. 의지하거나 기탁할 만한 관계는 아니다. 나는 혼자 살아가는 것에 잘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경우에도 남한테 기대지 않고. 아마 내 직업적 환경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에서의 가치가 무엇이냐. 이것은 참 어려운 건데. 누구나 다 다른 가치가 있겠지만, 나는 남한테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남의 말을 듣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요즘은 사람들이 히어링 기능이 거의 없다. 토킹만 있고 채팅만 있고 듣기가 안되는 세상이다. 듣는 사람은 없이 떠드는 사람만 있다. 사방에서 떠드는데 아무도 안 듣는다. 담벼락에 떠드는 듯한 소음이 가득차 있다. 우리 사회의 언어가 타락한 모습이다. 남의 말을 잘 듣고 친절하고. 얼마 전에, 책 읽은 얘기 또 하면 안되는데, 니체를 읽었더니 이런 얘기가 있더라. ‘정의로운 사람은 빠르게 판단하지 않는다. 정의로운 자는 스스로 서둘러 판단하는 것을 삼간다. 정의로운 자는 남의 말을 경청하는 자이고, 정의로운 자는 남에게 친절한 자다.’ 참 평범한 문장인데 원숙한 철학자의 통찰이 보였다. 우리는 정의로운 자가 친절한 자라고는 상상을 못하지 않나. 흔히 정의로운 자는 강력하고 우뚝하고 자기 생각을 강요하고 남을 복종시키고 정의의 목표를 향해 인류를 끌고 가는 것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데, 정의로운 자는 너무나 빨리 다가오는 판단을 스스로 삼가는 자라고 니체는 썼다. 그것을 읽고 많이 반성했다. 정의라는 것은 남에게 친절하고 남의 말을 잘 듣고 남을 이해하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사회자: 마지막 말씀이 참 좋다.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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