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수명이 굉장이 짧아졌다. 대학의 지식은 2~4년이면 끝난다. 새로운 지식으로 대체된다. 대학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호텔이나 물류 창고로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대학의 위기다."(도정일 교수)
"대학이 제 기능을 못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교수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다. 에덱스, 무크 등 온라인 강의가 보편화되면 한국 교수들은 학원 강사로 전락할 것이다."(최재천 교수)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의 대표 격으로 만난 두 사람은 대학의 위기를 함께 소리 높여 얘기했다. 취업을 위한 ‘직업훈련소’로 전락한 대학에 대한 개탄이자 우려였다.
도정일(73)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과 최재천(60)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겸 국립생태원 원장이 지난 28일 책 '대담'의 출간 10주년을 앞두고 다시 마주 앉았다. 출판사 휴머니스트와 의류업체 마인드브릿지가 공동 개최한 2014 인문학 콘서트 '대담' 무대였다.
'대담'은 앞서 2001~2005년 사이 두 사람이 '생명공학 시대의 인간의 운명'을 화두로 13회 대담과 4회 인터뷰 한 내용을 엮어 2005년 11월에 출간된 책이다. '대한민국 지식 사회의 열린 횡적 소통'을 주제로 한 기획으로 당시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이날 두 교수는 다시 한번 한국 사회 지식의 현주소를 점검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통섭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새로운 세대를 위한 교육과 융합적 사고는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열띤 의견을 주고받았다.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가 사회자 겸 토론자로 참석했고,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가 공동 사회를 맡았다.
이날 행사장인 서울 동숭동 유니플렉스 공연장에는 700여명의 인파가 몰렸다. 강연장의 2개 층이 거의 다 찼다. 마인드브릿지 관계자는 "3000여명이 신청했고 선착순으로 700명만 받았다"고 말했다.
강연은 4개 세션과 질의응답 순으로 진행됐다. 1부에서는 두 교수의 10여년 전 만남과 대화를 소개하고, 2부에서는 통섭의 개요, 3부에서는 대학의 미래, 마지막 4부에서는 새로운 교육과 사회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이하 김): 지구상에 존재하는 많은 나라 중 한반도에만 존재하는 것이 있다. 바로 비무장 지대다. 그것 때문인지 우리의 일상은 너무나 많은 장벽 속에 둘러싸여 있다. 오늘 모신 분들이 다루는 주제도 그랬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두 교수가 만나기 전부터 이런 실갱이를 해왔다. 2001년 12월 10일로 기억한다. 인문학자 도정일과 진화생물학자 최재천이 서울 서교동에서 만났다. 당시 만남을 ‘대한민국 지성사 최초 프로젝트, 대담’이라고 명명했다. 두 분의 만남이 4년이나 이어질 줄 몰랐다. 4년 동안 대담과 인터뷰를 가졌고, 2005년 11월 책으로 출간됐다. 내년이면 열 살이 된다. 10주년을 기념해 이 자리를 마련했다. 도정일 경희대 교수,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겸 국립 생태원장을 모시겠다.
◆ 10년 만의 재회…무슨 변화가 있었나
김: 두 교수가 첫 대담을 가진 게 13년 전이다. 기억하나?
도정일 교수(이하 도) : 하도 오래되서 기억이 안 날 정도다.
김: 도 교수는 그 때의 만남을 ‘동물을 연구하는 인간, 인간을 연구하는 동물’로 표현했다. 도 교수의 인상을 가만히 보면 동물적이다.(웃음) 두 교수는 당시의 대담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도: 대담을 시작했지만 그게 끝나서 책으로 나올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냥 했다. 그렇게 시작했는데 자연과학자들이 역시 굉장히 재빠르다는 것을 느꼈다. 원고를 빨리 쓰고 정리도 빨리 하더라.
반면 인문학자들은 느리다. 어떤 해는 두 줄 밖에 못 썼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 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최재천 교수와 천지신명의 도움이 컸다.(웃음)
김: 최 교수는 그 때 만남을 두고 책의 후기에다, 처음 만날 때는 ‘설렘 반 두려움 반’이었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맞짱 뜰 때’ 어떤 표정을 지을까까지 생각했다는데, 만나보니 눈 녹듯 두려움이 사라지고 행복했다고 했다. 실제로 그랬나?
최재천 교수(이하 최): 처음엔 대담을 한다고는 했는데 자연과학자로서는 겁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인문학자들은 입으로 먹고 살지 않나.(웃음) 자연과학자가 감히 인문학자와 대담을 해서 뼈나 추릴 수 있을까 생각했다. 인문학자라고 해서 인문학의 전반을 다 아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인문학은 자연과학보다 학문간 경계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저는 생물학자고 생물학을 다 아는 것도 아닌데, 화학과 물리학으로 넘어가면 사실 아는 게 별로 없다. ‘자연과학을 대표해서 나온다’고 생각하니 두려웠다. 그러나 이미 내가 통섭이라는 주제를 우리 사회에 던졌던 터라 결실을 보기 위해 ‘목을 내놓는 심정’으로 덤벼들었다. 도 교수가 워낙 편하게 해줘서, 내가 조금 밀린다 싶으면 안아도 주고 했다.
김: 책 ‘대담’이 나온 후에 두 교수의 행보에 변화가 있었다. 최 교수는 서울대 생명공학부에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통섭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도 교수는 경희대에 교양 과목 전담 대학인 ‘후마니타스 칼리지’를 설립했다. 대담과 어떤 연관이 있나. 그간 살아온 모습을 소개해달라.
도: ‘대담’은 2005년에 출간됐다. 나는 2006년 6월 정년이 되어 퇴임했다. 그런데 4~5년이 지난 후 경희대에서 다시 와달라고 요청했다. 경희대는 교양 교육을 완전히 쇄신해서 새로운 교육 체계를 만들려고 하는데, 그걸 나더라 맡아달라고 했다. 생각해보면 조인원 경희대 총장이 내가 대담이라는 책도 냈고,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대화를 시도했는데 내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런 사람한테 새로운 대학교육 설계를 맡기면 되겠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물론 오판이겠지만.(웃음)
후마니타스 칼리지를 만들면서 지난 4~5년을 고생했다. 당시 허리를 다쳤는데 지금도 아프다. 새로운 교육 체계를 준비하고 4년 전에 그걸 진수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큰 도움을 받은 게 대담의 출간이다.
최: 후마니타스 설립 2주년을 기념하고 평가하는 자리에 갔다. 당시 교무처장이 보고 과정에서 경희대 학생들이 후마니타스 칼리지를 끔찍이 싫어한다고 말했다. 학부에서 뭐 이리 힘든 것을 시키냐, 교재가 장난이 아니다, 분량도 방대하고 세상의 고전이라는 고전은 다 읽히냐는 등 불만이 많다더라.
그런데 경희대 학생들이 다른 대학 학생을 만나면 후마니타스 칼리지를 자랑한다더라. 그래서 평가할 때 일단 성공했다고 했다. 대한민국 대학 중 후마니타스 칼리지만큼 교양 교육을 하는 곳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대학의 교양 교육의 새로운 틀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김: 9년 만에 본격적인 대담을 한다. 오늘의 각오는? 어떤 생각을 했나?
도: 어쩌면 한판 더 붙어야 할지 모른다. ‘한판 뜨자’ 생각하고 나왔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되고, 여기서 자라나는 젊은 세대가 행복하게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기독교도도 아니지만 늘 머리에 떠오르는 성경 구절이 있다. 구약 레위기다. “너희는 거룩하여라.” 왜 그 말이 그렇게 가슴에 와닿는지 모르겠다. 나는 대한민국 사회가 좀 더 거룩했으면 좋겠다. 사회도 새로 만들어야 하고 여기서 태어나 자라는 젊은 세대가 아름다운 인간으로 성장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가지고 지난 10년을 살아왔다. 우리가 이런 대화로 조금이라도 우리 사회를 그런 방향으로 밀고, 거룩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인간이지만 조금 거룩해지려 노력하라는 당부라고 생각한다.
최: 도 교수가 인문쟁이는 게으르다고 얘기했는데 지난 10년 동안 많이 변한 것 같다. 나는 오히려 감성에 젖어서 나왔다. 선생님은 예전에 게으르다고 했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변화가 있었다. 거의 매 사진마다 선생님 손에 담배가 잡혀 있었는데, 이제는 담배도 끊었고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나는 며칠 전 책을 봤는데 10년 동안 많이 늙었더라. 그 전엔 굉장히 젊은 모습이었는데 10년이 참 긴 세월이구나 했다.
◆ 왜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야 하나
김: 본격적인 대담을 시작하기 전에 한 분 더 모시겠다. 사회 겸 특별 게스트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새로운 통섭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책 ‘다윈의 서재’ ‘다윈의 식탁’(바다출판사)으로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를 모시겠다.
도: 장 교수는 다윈이 없었으면 어쩔 뻔 했나?(웃음) ‘다윈의 정원’을 준비 중이라던데.
장: 내년 초 나올 예정이다. ‘다윈의 식탁’을 내고 식탁에서 파티를 했다. ‘다윈의 정원’을 내면 가든 파티를 할 예정이다.(웃음)
김: 장 교수가 오늘 대담을 앞두고 각오를 이미 밝혔다. 두 분의 긴장감을 세 배로 높이고 청중을 흥미롭게 하겠다고 밝혔다. 장대익 선생 역할이 중요하다. 지켜보겠다.
장: 책 대담을 보면 내 이름도 있다. 뒷 부분에 도움을 주신 분으로 나온다. 여기는 카이스트 강사라고 돼 있는데 책 나오기 전에 초고를 봤다. 최 교수와 일을 많이 했었는데 당시 초고를 보고 ‘왜 이리 싱겁나, 좀 싸워야 하는데’ 하는 불만이 있었다. 이후 10년이 지났다. 오늘은 내가 악역을 맡아서 서로 날카로운 지점이 어딘지 드러내겠다. 두 분은 먼저, 왜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만나야 하는지를 얘기해달라.
도: 최 교수는 통섭이라는 말을 먼저 유행시켰고 두 학문의 만남을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최: 통섭 강의를 할 때 이런 얘기를 한다. “진리의 존재는 무엇인가” “진리는 우리가 만든 학문 경계를 존중해줄 것인가”. 진리는 무슨 형체가 있는 게 아니고 모든 사회 현상에 걸쳐 있는 것이다. 학문의 구분은 우리가 편의상 만든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혼자 다 할 수 없으니까 쪼개서 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만날 수 밖에 없다. 방법론적으로 모든 것을 펼쳐서 할 것이냐, ‘각개 격파’를 한 후 모을 것이냐 이런 차이는 있다. “문과는 과학은 몰라도 된다. 이과는 인문학 신경쓰지 말아라” 이런 방식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보다 더 기막힌 원시성이 어디 있을까 생각한다.
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편의상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나눠져 있는데 만나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통섭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이 기가 질리는데 이 우주에 존재하는 생물 종들 가운데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질문하는 생물은 인간밖에 없다. 우리가 우주를 다 뒤져보지는 못했지만 아직까지 인간 말고는 이런 생물이 없다. 오직 인간만이 인간의 기원과 인생의 방향과 목적, 존재의 의미를 생각한다.
최 교수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지구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나? 아니다. 태양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나? 아니다. 우주에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형이상학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니다. 그런 질문에 대한 답변이 없이는 우리의 생존이 불안해서 살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의 특징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이 세계가 문제투성이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문제가 보통 많은 게 아니다. 문명의 지속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관심거리다. 이 문명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문명에 산적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이 없이는 안 된다.
장: 두 분에게 대답할 수 있는 시간을 주면 도 교수는 2분을 이야기하고 자연과학자인 최 교수는 1분 안에 핵심을 이야기한다. 역시 차이가 난다.(웃음) 좋은 대답들을 해줬다. 침팬지 연구를 예로 들겠다. 인간만이 우주의 의미 묻는다고 했는데 침팬지도 보면 사색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다. 침팬지가 철학자같다. 하지만 40년 연구한 분이 그러더라. “멍 때리고 있는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인간과 우주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성찰적 존재구나 생각했다. 과학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과학을 공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직 인간만이 인간에 대해 우주에 대해 생각하는 성찰적 존재라는 점을 확실히 알았다. 인간의 의미를 알기 위해 과학이 대답해주고 있다. 자연과학자와 인문학자가 왜 만나야 하는가를 반대할 분은 없을 것 같다. 그럼 ‘어떻게 만나야 하나’가 중요한 물음이다. 에드워드 윌슨(85)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주창한 통섭이라는 개념을 최 교수가 화두로 던졌고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한편으로는 최 교수가 과학으로 ‘패권’을 차지하려는 것 아닌가라는 비판도 있었다. 도 교수의 공식 입장이 궁금하다. 어떻게 하는 것이 통섭인가 답해달라.
도: 에드워드 윌슨은 통섭이라는 말을 만든 ‘원흉’이다.(웃음) 윌슨이 통섭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최 교수는 그의 책도 번역했다. 그거 보고 깜짝 놀랐다. ‘자연과학도도 번역을 이렇게 잘할 수 있구나’하고 생각했다.(웃음) 윌슨 예를 들어보려고 사진을 준비했다. 윌슨은 현재 팔순이 넘었다. 그런데도 계속 책을 쓰고 강연한다. 이해할 수 없다.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웃음) 이 교수가 지난해 ‘지구의 정복자’(사이언스북스)라는 책을 냈다. 인문학자가 보기에 저 책은 다소 문제가 있지만 노학자다운 영감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책은 이 교수가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하는 형식이다. 첫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둘째, 우리는 무엇인가. 셋째,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 세 가지 질문을 보면 생물학자의 질문 같나? 책 표지에 미술가 고갱의 그림이 있다. 윌슨 교수는 저 질문을 가지고 나와서 생물학자인 그가 예술가의 질문이자 인문학자의 질문을 했다. 이 세 가지 질문은 다 인문학이 수천년간 던져온 질문이다. 생물학은 이렇게 답할 수 있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내용을 다 소개하기 어렵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신화와 종교의 답변이 있지만 자연과학자 윌슨 관점에서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 인간의 기원은 생물학적으로 답이 나와있다. ‘어디로 가는가’는 일종의 목표성 질문인데, 자연과학은 원래 목적이나 목표와 같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이런 과감한 질문을 했다. 자연과학자가 인문학의 질문을 드디어 자연과학 자체의 질문으로 받아들이는구나 했다.
최: 사실은 우리 대학 역사를 놓고 보면, 내 생각에 우리가 대담을 할 때 도 선생님이 한 말인데 인문학은 질문하는 학문이라고 했다. 그럼 자연과학은 질문하는 학문이 아닌가. 나는 그 점에 동의하지 못한다. 사실 자연과학도 질문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 자연과학이 공학 또는 기술의 시녀가 됐다. 어느 순간 자연과학보다 과학기술이라는 말을 자주 쓰이게 되었다. 과학이 기술의 형용사로 변해 버렸다. 이러한 현상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지금 이 자리다. 이곳은 예전 서울대 문리대 있던 자리다. 당시에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같이 있었다. 그러다 관악산으로 서울대가 이사를 가면서 중앙도서관을 중심으로 인문대와 사회대를 붙였는데, 자연대는 중앙도서관 건너편으로 보내버렸다. 그 후 공대가 들어서면서 자연대를 품에 안아버렸다. 졸지에 자연대는 공대의 시녀가 됐다. 공대에 근거 자료를 제공해주는 대학으로 전락했다. 원래 자연과학도 질문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연과학이 답을 내는 학문이라기보다는 질문을 하고 공학이 답을 내는 식이다. 우리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이라고 하지만, 다시 만나는 ‘재회’라고 생각한다. 결국 다시 만나서 하나가 되기 위한 그런 몸부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도: 한 마디 토를 달고 넘어가겠다. 자연과학도 질문하는 학문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질문은 근본적으로 다른 데가 있다. 자연과학은 답이 없거나 없어 보이는 질문은 절대로 안 던진다. 인문학은 무식해서 답이 나올 가능성이 전혀 없는 질문, 그런 질문일수록 오히려 더 질문한다. 자연과학이 우주의 기원에 대해 빅뱅 이론을 다 내놨다. 생명은 어떻게 지구에서 시작됐나? 자연과학은 지구의 역사가 45억년이 됐다는 답을 내놓으면서도 빅뱅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서 답을 할 수 없다. 빅뱅은 원시 원자가 급팽창을 했다는 이론인데 그렇다면 그 원시 원자는 빅뱅 이전에 어디에 있었냐는 점이다.
최: 나도 토를 달겠다. 자연과학에서 묻는 질문은 두 가지다. 하나는 how, 하나는 why다. 진화생물학에서는 how에 대한 답을 내도 why에 답을 내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자연과학도는 왜라고 질문하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로서는 굉장히 섭섭하다.
도: 생물학이 던져서 안되는 질문도 있다. 그 생명은 왜 생겼는가? 이런 질문도 하나?
장·최: (함께)질문한다. (웃음)
장: 이런 모습을 기대했다. 깊이 들어가면 분명히 대립각이 나온다. 각자 위치에서 얘기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원론적인 이야기를 했다. 구체적인 예를 소개하겠다.
도: 오늘 이 자리에 고등학교 교사들도 여러 명 왔다고 들었다. 이 분들은 지금 중등 교육 과정에서 통섭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을 거다. 나중에 질문과 발언을 통해 중등 교육에서는 어떻게 교사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알고 싶다.
장: 내가 얘기 꺼내겠다. 7~8년 전에 MIT 미디어 랩에서 스터디를 했다. 인지로봇을 만드는 실험실이었다. 수업에 참여했다. 당시 깜짝 놀랐다. ‘융합이 여기까지 와있구나’ 생각했다. 질문을 하나 하겠다. 여러분이 로봇을 만드는 연구자이고 1000억원을 받았다면, 어떤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집할 것인가?
우리나라는 주로 기계공학, 전자공학, 컴퓨터, 기계공학, 재료공학의 전문가를 부를 것이다. 당시 세미나에는 심리학자, 철학자, 진화학자, 언어학자인 노엄 촘스키가 참여했다. 촘스키는 “로봇은 절대로 인간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 그를 초대했을까. ‘언어학의 신’인 촘스키가 왜 로봇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답을 들어보지 않는 이상 로봇을 개발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MIT 미디어랩이 로봇 개발에 회의적인 사람까지 초대하는 시도를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가장 반대하는 사람의 의견까지 수렴하는 융합을 시도하더라. 우리가 이런 것까지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최: 우리가 생각하는 융합의 폭은 너무 좁다. 이걸 어떻게 넘어서야 하느냐 하는 게 문제다. 우리나라는 문과와 이과의 장벽이 특히 심하다. 삼성전자에서 어느날 전화를 받았다. 특강을 해달라고 얘기하더라. 시간이 없다고 했더니 “교수님이 (통섭을) 하라고 해서 프로그램 만들었으니 오셔야 한다”고 하더라. SCSA(Samsung Convergence Software Academy)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더라.
삼성에는 소프트웨어 디자이너가 수천명이 필요하다. 그동안은 한결같이 컴퓨터 전공자만 채용했다. 하지만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 스티브 잡스처럼 ‘말도 안 되는 게’ 안 나온다더라. 그래서 삼성 관계자들이 내 강의를 듣고 만든 게 인문학 전공자 500명을 뽑아서 컴퓨터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이다. 생각해보니 그럴듯했다. 그래서 달려가서 강연을 했다. 두 번째 프로그램인 2기가 만들어지기 전에 한마디 했다.
덩쿨장미의 예를 들었다. 신기하게 덩쿨장미가 우리집에도 있고 이웃집에도 있는데 왜 이웃집에서 건너온 장미가 더 붉을까 고민했다. 내 울타리 안에는 뒤질 게 없는데 이제는 담을 넘지 않으면 창의적인 것을 만들기 힘들다. 담을 넘는 방법을 보면 인문학을 평생한 사람이 넘어올 수도 있고, 자연과학자가 반대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배움에도 단계가 있고 시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수학의 예를 들면 70대에는 힘들다. 삼성의 시도는 신선하다고 생각한다. 컴퓨터를 전공한 사람들을 합숙 시켜서 “인문학 해라” 하는 것보다,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을 합숙 시켜서 “컴퓨터 해라” 하는 게 더 효율적일 수 있겠다 생각했다. 500명을 뽑아서 전부 다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낼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한 명이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낼 수도 있다. 당장 제품화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더라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시도가 보인다.
장: 삼성이 선생님에게 연구비를 많이 줘야겠다.
최: 한푼도 안 준다.(웃음)
도: 인문학도를 뽑으려는 회사들이 늘고 있다. 융합과 통섭의 필요성은 학문의 세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단음 단계에 뭘 먹고 사나 생각할 때 통섭과 융합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된다. 기업들도 뒤늦게 알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자연과학 교육은 절대 이해 못할 부분이 있다. 촘스키의 예를 들면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의 언어를 결코 흉내낼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판단을 하는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기계는 상징언어를 쓸 수 없다. 예를 들겠다. ‘밤이 아이들을 무섭게 한다’ 이렇게 하면 문법적 의미는 다 맞다. 문법의 구조가 옳고 의미론적으로도 맞다. 이걸 뒤집어서 ‘아이들이 밤을 무섭게 한다’라고 쓰면 문과 학생들은 말이 된다고 하는 반면, 자연과학자나 공학도들은 무슨 소리냐고 한다. 바로 역설의 상상력이다. 역설의 진술이 이해될 수 있는 단계까지 상징적 언어 기술을 연마할 때까지 교육을 시켜야 한다. 이것이 공학도들에게 필요한 인문학 교육이다.
랭보의 시를 예로 들겠다. ‘축제’라는 제목의 시다. “나는 바위를 먹는다. 나는 바람을 먹는다. 나는 흙을 먹는다.”
공학도들은 이 글을 보면 “이 미친놈” 할 것이다. 뭔 소리냐고. 인문학의 상상력, 인문학적 상징 용법을 조금이라도 들어서 아는 사람은 말이 된다고 이해하기 시작한다. 상징은 곧바로 지시하지 않고 둘러서 말하는 것이다. 이 화자가 말하는 세 가지 물건들은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흙, 바람을 먹나. 이걸 뒤집어 보면 ‘먹을 수 없는 것만 먹는 상태’, 즉 굶주림이다. 역설적으로 굶주림의 상태에 축제라는 이름을 붙였다. 중학교 때 이런 상징 언어의 용법을 충분히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인문학 교육이 자라난다고 생각한다.
장: 끝이 없다. 갈 길이 멀다. 우리가 일단 융합의 구체적인 사례와 행복한 만남을 이야기했다. 삼성과 MIT 미디어랩 얘기 등을 했다. 그 사례의 정수에 해당되는 칼 세이건(1934~1996)의 ‘코스모스’는 80년대에 처음 나왔는데 최근 리메이크됐다. 동영상 13~14편을 7분짜리 동영상으로 압축했다. 이런 것이 융합은 아닐까?
코스모스가 처음 방송 될 때 미국에 있었다. 폭스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9시 뉴스에서 30분 동안 방송 시작 카운트다운을 했다. 패널들이 나와서 칼 세이건의 부인인 앤 드루얀, 닐 타이슨 흑인 천체 물리학자 등이 나와서 9시 뉴스에서 카운트다운하더라. 충격이었다. 과학 다큐멘터리를 메인 뉴스에서 추천했다. 이런 문화가 있구나. 과학 다큐를 9시 뉴스가 30분 광고하고 같이 보자고 하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도 추천했다. 두 교수는 어떻게 봤나. 간단한 소회를 말해달라.
도: 코스모스가 1980년에 책이 나왔고 당시 코스모스 다큐 1편이 나왔다. 책은 굉장히 잘 만들었다. 생명은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우주에서 왔다. 우리는 별에서 왔다. 별에서 온 여러분 환영한다. 세이건의 책이든 다큐든 놀라운 것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이게 정말로 통섭이다. 우주과학자이다 보니 과학에 방점을 찍었다. 그렇지만 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과 역사가 들어가 있다. 많은 것들이 섞여 들어가 있으면서 과학적 질문과 인문학적 질문이 섞여 있다.
요새 데이비드 크리스천 호주 맥쿼리대 교수가 ‘빅 히스토리’라는 개념을 주창하면서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데 그 이전에 칼 세이건의 다큐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최: 나는 원래 자연과학자가 될 생각이 별로 없었다. 이상한 교육 제도의 희생물로 과학자가 됐다. 하지만 다시 삶을 살면 자진해서 과학자가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지금 도 교수도 계속 말하지만 거창한 빅 히스토리가 아니더라도 요즘 우리 사회에서 새롭게 읽히는 책이 제러드 다이어몬드의 ‘총 균 쇠’(문학사상사)다.
다이어몬드 교수는 원래 세포막을 연구하는 생리학자였다. 의과대학에 근무하면서 휴가 때마다 뉴기니에서 새를 관찰하면서 새를 연구하는 분야의 거물로 올라섰다. 생태학과 진화생물학을 거쳐서 요새는 UCLA에서 지리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총 균 쇠’를 읽어보면 전통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무색하게 한다. 인류 역사를 완전히 새로 꿰뚫어 본다. 그런 게 통섭이다. 그분이 과학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의미있다. 곱씹어 봐야 한다.
◆ 우리 대학에 미래는 있는가?
장: 다른 주제로 넘어가보자. 대학 얘기를 하면서 이어가자. 대학생도 많고 졸업생도 있고 들어가려는 학생들, 교사들도 있다. 대학이 예전과 달리 지식을 생산하고 창조하는 게 아니라 서로 네트워킹하고 가공해서 어떻게 돈 벌까 고민하는 취업 준비생들을 길러낸다.
다른 한편, 밖에서는 오픈코스를 만들어서 누구든지 배우게 한다. 대학이 뭘하는 곳인가 하는 근본적 물음이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대학이 곧 없어지고 “사교장만 남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동창생들을 만들기 위해 다닐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공부는 딴 데서 하고. 대학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두 교수가 생각하는 대학은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를 말해달라. 고등교육기관으로서 대학이 어떻게 하면 좋은 모습으로 진화할 것인지 얘기해달라.
최: 나는 서울대에 있다가 2006년에 이화여대로 갔다. 그때 거의 모든 일간지에 보도됐다. 이것이 보도돼야 하는가 생각했다. 자리를 옮기면서 나는 다른 교수가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정년을 70세까지 보장받았다. 하지만 사실 얼마 전부터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굉장히 많이 든다. 대학교수를 별로 하고 싶지가 않다.
예전 은사님들이 대학교수 하던 시절에는 교수라는 게 참 멋있었다. 요즘 대학 교수는 노동자도 이런 노동자가 없다. 중학교 시절 친구들을 보면, 술값을 낸다고 하면 “교수가 무슨 돈이 있냐”라고 말하면서도 “그래도 넌 시간이 많지 않냐”라고 말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내가 술값을 낸다. 왜냐하면 회사 다니는 친구는 퇴근하면 일을 안 하더라. 술도 한잔 하고 놀기도 하더라. 근데 나는 일을 끼고 산다. 하루에 내 시간을 조금 더 융통성있게 쓴다는 차이는 있지만 24시간 일에서 떠나지 못한다. 그래서 이제는 “나도 시간 없어”라고 말한다.
장 교수 말처럼 언제부턴가 우리 대학은 직업훈련소가 됐다. 지금 어느 대학도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탓할 수는 없다. 대학 졸업 후 직장을 얻어야 하니까. 문제는 과연 대학이 직장을 제대로 얻어주는 곳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미래학자들의 예측에 따르면 지금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평생을 살면서 적어도 직업 5~6번 바꾼다고 한다. 예전에는 50~60세까지 살았으니까 평생 직장이라는게 있었지만, 이제는 90~100세까지 살아야 하는데 60대나 50대 중반에 은퇴하면 먹고 놀 수 있는 경제 구도가 유지가 안된다. 그래서 정년 제도는 반드시 없어지게 돼있다. 누구나 죽을 때까지 일하면서 사는 시대가 올 것이다. 실제로 대한민국에서 은퇴한 분들도 지금 계속 일자리를 찾는다.
평생 5~6번 직업 바꿔야 하는데 지금 대학은 기껏해야 첫 직장만 얻어준다. 나머지 4~5번의 직업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것만 봐도 지금 우리의 대학은 제 기능을 못한다. 게다가 첫 직장이 의미가 너무 크다 보니 가르치는 사람은 재미가 없다. 학생들은 내 과목 중 하나를 두고 졸업 전에 꼭 들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40명 정도만 수강신청한다. 큰 강의실을 주고 석좌교수라는 직도 주고 1000여명씩 가르쳐 달라고 그러는데 40명 밖에 안 온다.
왜 안오냐면 수업이 힘들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더라. 3학점 수업이 아닌 ‘30학점 수업’이라고. 학생들 얘기를 들어보니, 내 수업을 듣는 학기에는 다른 수업을 듣지 말라고들 한다. “그 과목 들으면서 다른 수업 못 듣는다”는 말이다. 내가 그렇게 심하게 가르치고 있나 싶었다. 하지만 나는 미국에서 교수를 하다 왔는데 미국에서 하던 분량의 반의 반도 학생들에게 요구 못하고 있다. 그 정도인데도 절절매는 학생들을 데리고 밥 벌어먹겠다고 교수를 하는 것에 대해 자괴감이 심하게 든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오픈 코스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에덱스, 무크 같은 곳을 보면 MIT 같은 명문대가 만든 과목을 무료로 인터넷에 올린다.
그런 과목들이 앞으로 모든 교육을 말아먹을지도 모른다. 나는 서울대에 처음 돌아왔을 때부터 영어로 강의했다. 첫 질문을 영어로 강의하는 게 좋은가, 우리말로 하는게 좋은가 손들라고 해서 영어 쪽이 좀 더 많길래 영어로 강의했다. 학생들 반쯤 나가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대학에서 절대 영어강의는 하지 않는다. 학교는 섭섭해 한다. 영어강의를 바라는데 하지 않아서.
그런데도 내가 안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진화학 강의를 한다고 치자. 스탠포드에도 진화학 강의가 있다. 그 수업보다 내 강의가 좋겠나? 절대 아니다. 그 사람은 조교도 많고 도와주는 사람도 많다. 내가 더 잘났더라도 그렇게 안 된다. 게다가 나는 남의 나라 말로 하고 그들은 자기들 언어로 한다.
조만간 수업에서 나나 학생이나 다같이 온라인 강의를 듣고, “여러분 이해 안 되는 부분 있어요”라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학원강사로 전락하는 것이다. 여러가지 면에서 대한민국에서 교수 할 마음이 안난다.
도: 앞으로 교수가 될 젊은이들의 장래에 닥칠 수 있는 불운을 미리 위로한다. 실제로 대학 수명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현재와 같은 강의실, 큰 건물, 도서관 같은 형태의 전통적 대학은 짧으면 20년, 길면 30년, 아주 길면 50년이면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들이 많다.
왜냐하면 첫째, 지식의 수명이 굉장이 짧아졌다. 대학 지식이 2~4년이면 끝난다. 새로운 지식으로 대체된다. 그때마다 대학을 가야 하나. 아니다. 지식의 수명이 짧아졌다는 것은 지식의 전파 양상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지식 생산 방식과 전파되는 방식이 바뀐다. 지금 대학 강의실에서 강의하는 방식만이 유일한 지식 전파 방식은 아니다. 이미 지나가고 있다.
대학들은 지금 이렇게 대학의 모습이 극적 변화하는 것에 대비한 준비를 해야 한다. 대한민국 대학들만 그런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 가만 있어도 학생들이 몰리니까. 지금 대학에서 학생들이 외국어만 되면 방 안에 가만히 앉아서 들을 수 있는 1급 강의가 지천이다. 앞으로 우리말로 된 강의 전파 수단도 늘어날 것이고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학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호텔로 바꿔야 한다. 물류 창고로 바꾸던가.(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존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대학이 계속 지금처럼 존속해야 할 강력한 이유를 A4용지 3장에 써내야 한다. 그리고 대학의 존재 정당성을 입증해야 한다. 대학의 위기다. 이것은 불가피한 추세다.
장: 해법이 있나?
최: 지금은 암울하지만 그래도 대학이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까 장 교수가 동창생이 필요하니까라고 표현했지만 지금 미국에서 무크나 온라인 강의들이 잘 될 것처럼 시작했지만 문제점이 드러났다. 우리가 잘 아는 마이클 샌델 교수는 흥미로운 윤리학 강의를 한다. 그걸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가져다 하려고 했는데 그 대학 철학과 교수들이 들고 일어나서 샌델 교수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다. 샌델 교수는 결국 자신도 그걸 원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하버드대 강의가 캘리포니아에서 통한다는 법이 없다. 온라인으로 하는 강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 마주보면서 토론하고 조율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는 사실 교과서에 다 있는 내용을 앞에 서서 강의하는 교수가 필요한 게 아니다. 나는 이미 10년 전부터 한 학기 수업 내내 강의하는 숫자를 줄였다. 학생들이 스스로 발견하고 찾게 하는 강의를 해왔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학생들에게 30학점(부담)이 된 것이다.
우리가 습득해야 할 지식은 이미 산재해 있다. 머리에 넣고 가지고 다닐 이유가 없다. 지식은 주머니 안에, 스마트폰 안에 다 있다. 이걸 어떻게 활용할까를 배워야 한다. 이런 교육은 모여서 하는 게 흩어져서 하는 것보다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앞으로는 직업을 5~6번 바꿔야한다고 하는데, 대학 4년 동안 그 직업을 바꿀 것을 미리 예상하고 다 배울 수는 없다. 첫 직장을 위해서 하는 것 하자고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직장 준비할 때 다시 공부해야한다. 그게 피터 드러커 교수가 한 얘기다. 21세기는 지식의 시대이고, 끊임없이 또 배워야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벌어지고 있다.
나는 대학이 평생 고객 서비스(A/S)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학 졸업생들 직장 찾아가서 다음 직장 준비하는 공부를 시켜주겠다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 우리나라 대학 중 제일 먼저 하는 대학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해 몇몇 대학 총장에게 말했다.
도: 실제로 대학교육의 미래를 생각할 때 암울한 그림만 있는 게 아니다. 그래도 대학이 존재해야 할 이유는 여전히 있다. 사회 차원에서 함께 생각해봐야 한다. 교육은 특성상 지식의 전수와 습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대학 강의실에 왜 질문과 토론이 있는가. 그것이 최상의 교육 방식이기 때문이다.
온라인 강의는 지식 습득에는 유리하지만 토론과 질문하는 데는 젬병이다. 상당히 오래 전에 탈무드에서 이런 말을 했다. 위대한 교육은 위대한 스승 앞에 앉았을 때 생겨난다. 이것은 세월이 지나고 지식 전파, 습득 방식이 달라져도 변함없는 진리일 것이다.
특히 지금 젊은 세대들이 기억할 것은 지식 습득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지식을 습득하는지에 대한 방법, 습득된 지식을 어떻게 갈무리하고 보존하고 연결해서 새로운 지식으로 발전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통섭과 융합이 중요해지는 이유가 바로 통섭의 방식 때문이다. 우리가 남의 나라 학문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내 자신이 해야 할 일로 통섭을 받아들여야 한다.
장: 흩어져 있는 지식들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메울 수 있게 됐다. 그걸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해졌고, 통섭과 융합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 문이과 통합 어떻게 할 것인가
장: 평생교육이라는 얘기도 있고, 최근 중고등학교 교육에 대한 혁신적인 노력도 있다. 중고등학교에서는 문이과 통합 교육을 실시하겠다고 한다. 필요하다는 것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데 어떻게 가는 것이 올바른가에 대해 말들이 많다. 정부 차원에서도 그렇고 거기 관여하는 교사분들도 고민이 많다. 오늘 해법을 주셔야 할 것 같다.
최: 위험한 발언일 수 있겠지만, 나는 문이과 통합을 10여년 동안 울부짖었다. 이걸 미루는 것 자체가 직무유기다. 직업을 5~6번 갈아타야 하는데 그 직업이 가지런히 문과 직업으로만, 또는 이과 직업으로만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국가가 나서서 개인의 미래를 “내가 생각할 때 넌 과학을 공부할 필요 없다” 이렇게 말했다가 나중에 그 사람이 과학을 배우지 않아서 노숙자가 되면 누구의 책임인가?
나는 국가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가지고 논의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 100년 전에 해결했어야 하는 문제다. 최근 융합이 사회적으로 대두되면서 어쩔 수 없이 교육부에서 하기로는 했다. 그런데 이 과정을 보면 정말 한심하다. 문이과를 통합시켜 놓고 정부가 발표하는 걸 보면 학부모 반발이 많다. 한쪽을 하기도 바쁜데 양쪽을 다하라는 것이냐고. 그 걱정 때문에 어려운 이과 수업을 줄여주는 식으로 가고 있다. 이건 말이 안된다.
문이과 통합의 핵심은 이과 통합이다. 문과, 이과를 합치겠다고 하고서 어려운 이과 과목을 뺀다면 어불성설이다. 문이과를 통합하는 이유는 이과 공부를 시키려는 것이다. 확실하게 해야 한다. 문이과 통합의 핵심은 이과로 통합하자는 뜻이다.
언젠가는 과학적 소양이 필요한 세상이기 때문에 과학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10대, 20대 초반에 과학을 배우지 않으면 힘들다. 그래서 중고등학교에서 모두가 과학 공부를 해야 한다. 양자역학 수준이 아니더라도 소양 수준에서라도 누구나 과학 공부를 해야 한다. 기껏 문이과 통합한다고 해놓고 알맹이 빼놓고 있는데 절대로 이래서는 안된다.
장: 오늘 부드럽다가 이 대목에서 발톱을 드러냈다. 도 교수도 여기에 대한 의견을 말해 달라.
도: 인문학쟁이라고 해서 최 교수와 반대되는 말을 할 것은 아니다. 과학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한국인이 지난 수백년 동안 조선시대를 거쳐오면서 조선시대의 좋은 과학적 씨앗들이 조금씩 싹트다가 주저앉아버렸다. 과학의 결핍이다. 우리의 큰 문제였고 현재도 그렇다.
과학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과학하면 사람들이 으스스해 한다. 그게 아니라 과학은 쉬운 것이다. 10살부터 하는 것이다. 삶의 현장에서 “어렸을 때부터 하는 게 과학 교육이다” 이렇게 가르쳐야 한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교육학자 존 듀이(1859~1952)가 실험 학교를 만들어서 큰 히트를 쳤다. 그 교실에서 쿠킹을 가르친다. 무엇부터 가르쳤냐면 식재료인 완두콩, 고구마를 가져다가 저울에 달아보는 연습부터 배운다. 일종의 과학 교육이다. 식재료의 화학 성분을 쉬운 용어로 가르친다. 과학 교육은 3살 때부터 할 수 있다. 그러면 과학적 사고가 우리 삶의 일부, 정신적인 버릇이 된다.
다만, 과학 만능주의로 빠지면 안된다. 요즘 과학주의라는 것이 나온다. 과학적 지식만이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과학도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사람들 관점에서는 종교는 웃기는 스토리, 조직적 착각이고, 신화는 거짓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아이를 키울 때도 옛날 얘기를 안 들려준다. 달나라 토끼도 다 거짓말이라고. 이런 얘기를 배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것이 과학주의다. 과학주의 최고 권위자는 ‘진화론 사도’라고 불리는 리처드 도킨스(73) 옥스포드대 교수다. 이 친구의 글을 보면 한심한 이야기가 한두 개가 아니다. 종교를 박살내고 신화를 우습게 아는 이런 태도는 제대로 된 과학자라면 절대 취할 수 없다. 오만함을 드러낸다. 이런 과학 만능주의는 과학에서 빼도 된다고 생각한다. 과학 만능주의자가 되라고 과학 교육 하는 것이 아니다.
최: 실제로 도킨스를 2009년에 옥스포드에서 만났다. 너무 바빠서 안 만나 주려는 그에게 “나는 만나야 한다.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를 한국의 영원한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사진 기자와 20분 전에 도착해서 동네를 걷다가 들어갔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표정이 ‘내가 왜 이런 떨거지들을 만나야 하나’ 하는 표정이었다. 나도 대학교수인데, 한 다리만 건너면 서로 아는 사이인데 그런 대접 받는 게 기분이 안 좋더라. 부인 소개도 안 하고 일단 들어오라더라. 들어가서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모두 단답식이었다. 그래서 뒤에 할 질문을 먼저 했다. “솔직히 당신 책을 전부 다 읽었다. 한국에서 나를 한국의 리처드 도킨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만들어진 신’(김영사)은 당신의 책이라고 보기 힘들겠더라. 당신 책이 좋은 이유는 차가운 두뇌로 책을 쓰기 때문에 냉철한 지성이 마음에 드는데 이 책은 가슴이 먼저 뜨거워져서 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변명을 하는데 2시간30분을 토론했다. 즐거웠다.
솔직히 나도 이점에 있어서 도 교수와 같은 생각이다. 과학 만능주의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과학 만능주의에 빠져 과학을 한 사람 중에 대단한 업적을 남긴 사람도 없다. 그동안 왜 과학만능주의를 믿을 수 밖에 없었는지, 도킨스가 왜 그래야만 했는지 이해는 한다. 워낙 과학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회를 흔들어보려는 시도다.
너무 과학만을 중요시하는 과학자들의 이론도 대단치 않더라. 큰 과학자 밑에서 조수 역할만 잘하더라. 정말 위대한 과학자들은 인문학적 소양을 풍부하게 갖추고 있었다. 그 사람들 머리에서 새로운 질문이 나오고, 큰 그림이 그려진다. 과학만 죽어라 파는 사람들은 그 문제를 푸는 조수 역할만 한다. 혹시 지나친 과학 만능주의에 잡혀있으면 벗어나야 한다. 일찌감치 인문학적 소양을 갖춰야 정말 큰 질문이 나온다.
장: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지어야겠다. 시간 관계상 두 분의 질문만 받고 답변과 함께 대담 마무리 발언을 듣겠다.
◆ 청중과의 문답
질문: 도 교수가 답해주면 좋겠다. 자연과학도로서 인문학이 삶을 풍성하게 한다는 걸 알았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자연과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도: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늘 분리해서 생각하지 말고 늘 동시에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자연과학을 해서 얻는 게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아까 ‘코스모스’를 잠깐 봤는데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이 책을 내면서 했던 유명한 말이 많다. 그 중 하나가 “인간은 진화의 과정에서 몸에 붙인 참 나쁜 버릇이 많다”는 것이다. 호전성, 그릇된 관습,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 복종, 이방인에 대한 이유없는 적개심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버려야 할 나쁜 습성이다. 인문학과 과학으로 청산해야 한다. 지구는 쥐면 바스라질 듯이 작고 푸른 점이다. 여기에 발 붙이면 안 되는 것이 있다고 세이건이 말했다. 극단적 형태의 민족 우월주의, 우스꽝스런 종교적 광신, 맹목적이고 유치한 국가주의 등이다. 이것들은 현존 문명의 강력한 세력이기도 하다. 이것들을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과학의 힘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김: 다음 질문과 함께 최재천 교수의 마무리 말씀을 듣겠다.
질문: 문이과 통합 이전 세대인 철학도다. 인문학도들은 뒤늦게 자연과학을 배우고 싶어도 배울 곳이 없다. 어떻게 해야 자연과학을 접할 수 있을까?
최: 정곡을 찔렀다. 사실 융합과 통섭 시대에는 자연과학도가 유리하다. 물론 자연과학도가 대단한 인문학자가 되는 것은 별개다. 자연과학도가 인문학적 소양을 어느 정도 갖는 것은 가능하고 누구나 시도할 만하다. 그러나 반대는 쉽지 않다. 자연과학은 입문 과정이 필요하고 돌을 쌓듯이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중등교육 과정에서 자연과학을 제도적으로 가르치지 않으면 개인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다.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기회를 박탈할 수도 있다. 내가 문이과 통합이 반드시 이과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다만 그렇게 얘기하면서도 내가 느끼는 것은 그러면 이미 분리된 교육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독서 관련 책을 연달아 썼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썼는데 ‘기획 독서’ 개념을 말했다. ‘취미 독서’의 반댓말이다. 요즘은 출판업계가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고들 한다. 책들을 많이 안 읽는다. 그나마 읽는 책도 힐링을 받거나 마음 비우는 류의 책만 읽는다. 원래 책은 그런 게 아니라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 책만 읽지 말고 나한테 부족한 분야를 붙잡고 씨름하는 게 진짜 독서다.
다시 학교 돌아갈 수 없다면 제일 좋은 방법은 역시 책을 붙잡고 씨름하는 일이다. 대담을 읽으면서 많이들 느꼈다고 하던데, 읽다보니 다른 책을 읽고 싶다고 하더라. 그게 ‘대담’ 책이 크게 기여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가까이 하면서 계속 노력하시라는 말씀 드린다.
김: 이 자리 만들면서 죄송한 게 우려했던 대로 도 교수가 두 자연과학자에게 협공 당했다. 오늘 자리는 다음 대담을 이어가는 자리기도 하다. 20주년 등 만남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오늘 많은 교사, 학생 여러분 각 대학 다양한 전공 교수들, 일반인들이 오셨다.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으면 했지만 시간관계상 줄인다. 10년 전 두 분 만남이 우리 사회의 장벽에 물꼬를 텃듯이 오늘 이 자리도 만나고 이해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지길 바란다.
◆ 연사 및 사회자 소개
도정일 교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이자 문학평론가. 인간, 사회, 역사, 문명에 대한 인문학의 책임을 강조하고 사회적 실천에 주력해온 인문학자다.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의 기적의 도서관 건립, 영유아를 위한 '북스타트' 운동 등 책읽기 운동에도 힘쓰고 있다.
최재천 교수: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겸 국립생태원 원장. 자연과 생명에 대한 관찰과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통섭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에 중요한 화두를 던져온 과학자다. 세계적 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제자로, 그의 저서를 번역해 '통섭' 개념을 국내에 알렸다.
장대익 교수: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에서 공감과 소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교양의 기준을 제시하는 진화학자이자 과학철학자다. '인문적 과학'과 '과학적 인문학'의 새로운 길을 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