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큰손들]① 재벌 총수도 일어나 전화받은 '현금왕' 단사천

조선비즈
  • 진상훈 기자
    입력 2014.10.16 06:03 | 수정 2014.10.16 08:20

    사채업자(私債業者)라고 하면 고리의 이자로 돈을 빌려주고 되받는 형식으로 부를 축적하는 사람을 떠올린다. 이 때문에 사채(私債)를 사채(死債)로 여기며 거들떠보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사채는 급하게 돈이 필요한데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유용한 측면도 있다. 과거 지금과 같이 금융시스템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기에는 사채시장이 오늘날의 은행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시대가 바뀌면서 한 때 우리나라 경제의 그늘에서 세를 과시했던 사채업자 중에는 그룹을 일궈 양지로 나온 인물도 있고, 재산의 대부분을 탕진한 채 쓸쓸히 노후를 보낸 사람도 있다. 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들이 한평생 벌어들였던 막대한 돈들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편집자주]

    지난달 증권시장에서는 부동산 임대ㆍ관리업체인 해성산업의 주가 급락이 화제였다. 해성산업은 지난 5월부터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5만원대 중반이었던 주가가 3개월여 만에 8만원대까지 치솟았지만, 9월 들어 연일 하한가를 기록한 끝에 3만원 밑으로 하락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작전세력이 들어와 주가를 띄우고 나서 물량을 털어내며 주가가 널뛰기했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해성산업(034810)은 연간 매출액 100억원, 영업이익 30억원 정도로, 실적으로만 따지고 보면 코스닥시장 안에서도 별다른 주목을 받기 어려운 종목이다. 그러나 주식시장 전문가들 사이에서 해성산업은 강남을 비롯한 서울 주요 상권에 수 조원대에 달하는 부동산을 보유한 대표적인 자산주로 꼽힌다. 해성산업은 어떻게 이렇듯 엄청난 규모의 자산을 보유한 회사가 될 수 있었을까.

    사실 오늘날 해성산업과 오너인 단재완 회장이 가진 부동산들은 대부분 선친인 고(故) 송남 단사천 회장이 일궜다. 단사천 회장은 명동 사채업계를 주름잡았던 인물로,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재계의 내로라하는 총수들에게도 돈을 빌려줬다고 전해진다. 하루에 수천억원의 현금을 움직여 사채업자들 사이에서는 ‘현금왕’이라고도 불렸다.

    정주영, 이병철 회장도 손 벌렸던 ‘현금왕’

    재계 원로들 사이에서는 단사천 회장과 고(故) 정주영 회장의 관계를 알려주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현대그룹 창업주로 재계에서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것 같은 위세를 떨쳤던 정주영 회장도 단사천 회장에게서 연락을 받을 때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건설과 중공업, 자동차 등 대규모 사업을 펼쳤던 정 회장은 사업 추진 과정에서 자주 돈이 마를 때가 있었는데, 매달 직원에게 월급을 지급하는 날처럼 큰돈이 필요할 때가 되면 은행에서 돈을 다 빌리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고 한다. 이때마다 정 회장에게 현금을 빌려주며 자주 급한 불을 꺼줬던 인물이 단사천 회장이었다.

    마찬가지로 삼성그룹을 일궜던 고 이병철 회장이나 다른 여러 재계 총수들도 사업을 확장하다 가끔 돈줄이 막힐 때면 단 회장의 도움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과거 단 회장을 둘러싸고 재계와 명동 사채시장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재벌 몇 정도는 금방 날려버릴 수 있다’, ‘그가 부르면 기업 총수들도 두말하지 않고 달려온다’는 식의 무성한 소문들이 떠돌기도 했다.

    은행 등 금융시장의 자금조달 능력이 기업의 성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던 경제개발 시기, 단 회장은 현금에 목말라 있는 기업들에게 은행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사채업계를 주름잡았던 단 회장이 큰돈을 빌려주면서 기업이나 공장, 토지 등을 담보로 잡아 일부에서는 그를 ‘재계의 전당포’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1970년대 종합소득세 납부액 재벌들 제치기도

    단사천 회장은 1950년대부터 명동 사채시장을 주름잡는 ‘큰 손’으로 꼽혔다. 자신이 보유한 사채자금도 풍부했지만, 명동 사채업계에서 수많은 중ㆍ소규모 사채업자들을 거느린 ‘전주(錢主)’로 군림하며 재벌들이 손을 벌릴 정도로 큰 규모의 현금을 손쉽게 조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신이 다 조달하지 못하는 규모의 자금이 필요할 때면 휘하의 사채업자들까지 동원해 자금을 빌려줬기 때문에 ‘지하경제의 재벌’로 불리기도 했다. 오늘날 대부업체에서 대출금이 입금됐을 때 울리는 전화를 이른바 ‘해피콜’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급전이 필요했던 재벌 총수들에게 단 회장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바로 해피콜이었던 셈이다.

    지난 1960년대 중반 단 회장이 한 번에 빌려줄 수 있는 자금의 규모는 약 60억원대 정도였다고 한다. 그 무렵 이미 재벌이었던 삼성그룹의 당시 연간 영업이익 규모는 약 190억원이었다. 하루에 삼성그룹 연간 이익의 3분의 1 이 넘는 자금을 빌려줄 수 있는 자금력을 가졌던 것이다.

    단 회장은 1960년대 후반부터 납세실적 상위자 명단에 자주 이름이 오를 정도로 막강한 재력을 과시했다. 1974년에는 종합소득세 납부 순위 7위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경제규모가 본격적으로 팽창하던 1980년대 들어서 단 회장의 현금동원 능력 역시 더욱 커져 하루에 움직이는 자금의 규모가 약 3000억원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사채로 돈 불려 부동산 투자해 거부로…다른 사업에서는 고배 마시기도

    단 회장은 젊은 시절 사업을 통해 일군 밑천을 사업 확장을 위한 재투자 등에 쓰지 않고 착실하게 사채를 통해 굴리며 자금 규모를 키웠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일찍부터 끊임없이 전국 요지의 부동산을 사들이며 재산을 불렸다.
    황해도 서흥 출신인 단 회장은 무일푼으로 서울에 내려온 이후 모은 돈으로 일만상회라는 재봉틀 조립회사를 열어 제법 많은 돈을 모았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본격적으로 명동을 무대로 사채업에 뛰어들어 돈을 굴리기 시작했다. 1950년대까지 비교적 작은 규모로 이뤄지던 그의 사채업은 1960년대 들어 정부 주도로 본격적인 경제개발이 시작되면서 규모가 빠르게 커진다.

    단 회장은 해성산업과 한국제지 등 사업에도 몰두했지만, 그가 재산을 일군 주 영역은 사채업이었다.

    이북 출신으로 남의 돈을 빌려 사업을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그는 차입 경영을 하지 않는 대신 자신이 모은 돈을 높은 이자에 빌려주고 받는 식으로 재산 규모를 키웠다. 그는 간혹 경영하는 회사의 실적이 나빠지거나 자금 회수에 문제가 생겨도 절대로 은행에서 차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단 회장의 주요 투자영역은 부동산이었다. 그는 자신의 주된 활동 무대였던 명동 근처 도심을 비롯해 주요 상업 지역의 땅을 사들였고, 1960년대 후반부터 정부의 한강 이남 개발이 본격화되기 시작할 무렵 강남 땅에도 투자했다.

    서울 강남의 강남역과 삼성역을 잇는 테헤란로의 해성빌딩 2개 동을 비롯해 서초동 송남빌딩, 중구 북창동의 해남빌딩, 성수동 우영테크노센터, 부산 송남빌딩 등 현재 해성그룹의 주요 자산들은 대부분 단사천 회장이 일궜다. 1970년대 서울시에 기부한 강동구 명일동의 땅 1만2000여평까지 합치면 그가 남긴 부동산 자산은 지금보다 훨씬 많은 규모에 이른다.

    사채업과 부동산 투자를 통해 큰돈을 벌었던 단 회장도 사업에서는 여러 차례 쓴맛을 보기도 했다. 단 회장이 1953년 설립했던 한국모방은 당시 섬유 수출 붐을 타고 순항하는가 싶었으나 재투자에 실패하면서 제일모직, 경남모직 등 경쟁업체들에 자리를 내주고 1970년 사라졌다.

    사금융 양성화를 목적으로 도입된 단자회사(종합금융사) 설립에서도 그리 재미를 보지 못했다. 단 회장은 1982년 단자회사 설립이 자유화되자, 같은 북한 출신 기업인인 김종호 세창물산 회장, 남상옥 타워호텔 회장 등과 손잡고 신한투자금융 설립에 참여했다. 그러나 공동 설립자 간의 경영 분쟁과 정부의 경영 개입 등으로 이렇다 할 실적을 내지 못한 채 결국 지분을 털고 사업을 접었다.

    이후 단 회장은 점차 사금융에서 발길을 빼면서 지난 200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해성산업과 한국제지, 계양전기, 한국팩키지 등의 회사를 경영하며 한평생 모은 재산을 지키는 데 집중했다.

    ‘현금왕’의 유산 해성그룹, 부동산 가치는 수 조원…성장 한계 부딪혀 골머리

    현금왕의 유산은 현재 수 조원의 자산을 가진 해성그룹으로 남아있다. 아들인 단재완 회장이 아버지가 남긴 자산을 착실히 지키는 데 주력한 덕에 현재 해성그룹은 해성산업(034810)과 한국제지, 계양전기(012200), 해성디에스, 한국팩키지(037230)등 5개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기업이 됐다.

    그러나 금융시장 관계자들은 단사천 회장의 유산, 해성산업이 이제는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한다. 보유자산의 규모가 크고 부채비율은 낮아 안전하지만, 이렇다 할 신규 성장동력이 없어 결국에는 많은 자산만 움켜쥔 채 도태될 수도 있다는 우울한 전망도 나온다. 지난달 16일 해성그룹 출범식을 열면서 단재완 회장이 ‘혁신’과 ‘성장’을 목 높여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해성그룹은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데 이전과 비교하면 훨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4월 해성산업은 삼성테크윈(012450)으로부터 반도체 부품 사업부를 인수했고, 그 동안 복사용지 생산에 주력해 온 한국제지도 지난해 국일제지(078130)의 중국 공장을 인수하며 특수지사업 생산으로 보폭을 넓히기도 했다.

    한국제지(002300)는 단사천 회장의 맏손자인 단우영 한국제지 전무가 주축이 돼 지난 2011년 새 복사용지 브랜드인 ‘밀크’를 내놓으며 제지업계에서의 점유율을 높이는데 안간힘을 쏟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부동산 임대ㆍ관리와 제지, 전기부품 등이 주력이 된 그룹 구조를 감안하면 대규모 인수ㆍ합병(M&A)이나 신규 투자가 없이는 이렇다 할 성장원을 찾기 어렵다는 분석이 많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해성그룹이 높은 성장률을 기록할만한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과거 주류사업에서 대형 M&A를 통해 중공업, 기계, 건설 등으로 탈바꿈한 두산그룹처럼 많은 투자를 진행해야 한다”며 “차입 경영을 멀리 하고 자산을 유지하는 데 주력하는 창업주의 경영철학이 확고해 이 같은 대규모 투자가 실제로 이뤄질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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