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집 전야(前夜) 같은 분위기입니다." 회사 측이 이달 12일 전격적으로 임원 260명 전원에 대해 사표 제출을 요구한 현대중공업 그룹 내부 관계자의 얘기이다. 대상 임원 가운데 적어도 90명 안팎은 이달 안으로 해임 통보를 받을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와 별도로 13일 현대미포조선 신임 사장에 강환구 현대중공업 부사장을 승진 발령하는 등 속사포처럼 일부 인사를 단행했다. 김외현 현대중공업 사장은 조선사업본부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김 사장은 이달 31일 열리는 임시주주총회 전까지 대표이사직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최원길 현대미포조선 대표도 실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원래 현대중공업 임원 인사 시기는 매년 11월 말~12월 초이다. 하지만 올 상반기 1조3000억원의 영업적자에 이어 3분기(7~9월)에도 대규모 적자설(說)이 나도는 상황에서 회사 측이 한 달 반 이상 빨리 '초강력 인사 태풍' 카드를 꺼낸 것이다.
한국 재계가 '인사(人事) 칼바람'에 벌벌 떨고 있다. 예년에는 승진 후보자를 추려내고 들뜬 분위기가 생길 시점이지만, 올해는 주요 기업마다 실적이 크게 뒷걸음질쳐 임직원 모두 좌불안석(坐不安席)이다. 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코리아 대표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중국의 대규모 경기부양책 등에 힘입어 한국의 주력산업 대부분이 구조조정을 피했지만 이번에는 주력산업 모두 최악의 실적을 예고해 올 연말 인사의 물갈이 폭은 2008년 금융위기 당시를 크게 웃돌 것"이라고 말했다. 한 대기업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정부 눈치를 보느라 신입사원 채용 규모를 수년간 줄이지 못한 상황에서 기존 임원들에 대한 구조조정 압력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問責性 인사 태풍' 불듯
삼성그룹의 경우 지난해만 해도 전체 임원 승진자 475명 가운데 절반 정도가 삼성전자에서 나왔다. 하지만 12월 초 단행될 올 정기인사에서는 사정이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올 2분기와 3분기에 연속 '어닝 쇼크(예상보다 실적이 크게 낮은 것)'를 낸 삼성전자의 4분기 실적도 나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은 '성과 있는 곳에 보상 있다'는 원칙을 어느 그룹보다 철저하게 지켜왔다"며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삼성전기·삼성디스플레이는 물론 삼성중공업·엔지니어링 등은 문책성 경질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SK그룹도 하이닉스·SK텔레콤을 제외하곤 승진자가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관측이 파다하다. 그룹 관계자는 "이노베이션·증권·해운·네트웍스·건설 등은 실적이 워낙 좋지 않아 임원 승진자가 극소수에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해운업계는 시황 회복은커녕 뾰족한 탈출구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현대상선은 지난달 30일 임원인사를 단행해 기존 20명의 임원 중 7명을 퇴사시켰다. 이 회사는 올 4월에도 7명의 임원을 내보냈다.
포스코·한화·한진·두산 등은 업황 부진으로 상시(常時) 구조조정 체제에 돌입해 있다. 한화 관계자는 "승진자 관련 자료를 취합 중이지만 실적 부진으로 분위기가 예년과 다르다"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은 올 2월 최한영 현대차 상용차담당 부회장을 시작으로 설영흥 현대차 중국사업총괄 부회장(4월)에 이어 이달 6일 박승하 현대제철 부회장마저 내보냈다. 현대차 관계자는 "정기 승진인사는 12월 말이지만 그전에 수차례 비정기 인사가 단행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수백명 '전직 임원 市場' 형성될 듯
국내 100대 기업 임원 수는 7000명 안팎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일자리를 잃을 경우 연말 인사 이후 '제2의 일자리 시장'이 생겨날 전망이다. 하지만 업계에선 고위직 임원의 경우 당분간 '일자리 보릿고개'를 겪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 대다수 업종에서 동시다발적인 불황을 겪고 있는 탓이다.
글로벌 헤드헌팅사인 하이드릭&스트러글스 코리아의 김재호 파트너는 "풍부한 경험과 노하우를 갖고서 물러나는 고급 인력들이 적재적소에 재활용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