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동에 있는 이마트의 장(醬)류 판매코너. 총 7단의 진열대 중 주부들의 눈높이에 맞춰 이른바 '골든존'으로 통하는 3단과 4단에는 '이마트' 브랜드를 단 고추장·된장·쌈장이 진열돼 있었다. 다른 자리보다 매출이 3~4배 높은 것으로 알려진 진열대 양쪽 끝(엔드캡) 자리도 모두 이마트 제품 차지였다.

이마트는 중견 식품업체인 S사가 만들어 공급하는 PB(Private Brand·자체 브랜드) 고추장을 판매하고 있다. 가격은 경쟁업체 제품은 물론 S사의 자체 브랜드 제품보다 30% 이상 저렴했다. 롯데마트·홈플러스도 중견업체로부터 고추장 등을 공급받아 PB 제품으로 팔고 있다. 주부 조모(29)씨는 "용량·원재료·생산공장이 거의 똑같은데도 가격은 PB 제품이 수천원 이상 저렴해 기왕이면 싼 걸 찾는다"고 말했다.

고추장·된장·간장 등 장류는 동반성장위원회가 2011년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권고한 품목이다. 중소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적합업종으로 지정되면 해당 제품을 제조하는 대기업의 신규 참여나 사업 확장 등이 제한된다. 이후 CJ제일제당·대상 등 대기업과 샘표 등 중견기업은 신제품을 출시하지 않는 등 사업 확장을 자제했다. 아워홈은 아예 청국장 생산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제조 대기업들과 달리 유통 대기업들은 중소업체에서 저가(低價)에 제품을 공급받는 방식으로 규제를 피해 각종 PB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실제로 이마트와 롯데마트·홈플러스 등에는 순대·세탁비누·어묵·김치·원두커피 등 중기(中企) 적합업종으로 지정된 상당수 품목이 PB 제품으로 나와 있다.

대형마트 측은 PB 상품이 소비자에겐 질 좋은 제품을 저렴하게 제공하는 효과가 있다는 입장이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품질이 괜찮지만 브랜드 파워가 떨어지는 업계 3~4위 수준의 업체로부터 제품을 공급받아 유통 단계를 줄이는 방식으로 가격을 낮춘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업종 침해 논란에 대해서도 "직접 생산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문제되지 않고 동반위 권고에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중소업체들의 성장에 PB 제품이 도움이 된 측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대형마트가 요구하는 품질·위생기준에 맞추면서 납품업체는 경쟁력이 높아지고, 판로(販路)가 넓어지는 효과도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상당수 중소 식품업체는 대형마트의 해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식품업계 협동조합 관계자는 "값이 싼 PB 제품이 소비자에게 일시적으로 혜택처럼 보일지 몰라도 한정된 매대(賣臺)에서 중소업체 제품이 밀려나면 결국 소비자 선택의 폭이 제한될 수 있다"고 말했다.

OEM(주문자상표부착) 방식이 중소업계에 도움이 별로 되지 않고, 대기업이 이를 악용(惡用)한다는 주장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거의 원가 수준으로 납품을 요구하기 때문에 공장은 쉴 새 없이 돌지만 남는 것은 없고, 독자 브랜드도 키우지 못한 채 결국 대기업에 종속되고 만다"고 주장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최근 이 문제에 대해 실태조사에 들어갔다. 양찬회 중기중앙회 동반성장실장은 "중기 적합업종을 비롯해 대형마트에 납품하는 중소업체들의 애로 사항이 무엇인지 파악해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