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그룹이 창사 이후 최대의 경영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권오갑식(式) 개혁에 고삐를 조이고 있다. 서슬퍼런 개혁의 칼날을 겨눈 첫 대상은 방만한 조직이다. 권오갑(63·사진) 현대중공업 사장은 12일 오전 울산 본사에서 긴급 본부장 회의를 소집해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공업의 임원 260여명으로부터 사표를 받겠다고 통보했다. 회사 안팎에서는 이번 조치로 전체 임원 30% 가량이 교체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재계에서는 권 사장이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현대중공업의 전문경영 체제가 정착되면서 방만해진 조직을 현장 중심으로 재편하고, 관료화된 조직문화를 뜯어고쳐야 회사의 미래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보고 있다. 임원진 대거 교체로 시작된 조직개혁이 회사 전체의 구조조정으로 이어질 것이란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 “정체된 조직, 임원진 교체로 활력 넣는다”
현대중공업에 따르면, 이날 이뤄진 임원진 사표제출 통보는 권 사장 등 그룹 최고층의 결단에 따른 것으로 전해졌다. 권 사장은 지난달 15일 취임 직후부터 그룹기획실에 경영진단 TF(태스크포스)팀을 가동하며 고강도의 조직혁신을 예고했었다. 경영진단 TF팀은 올 2분기 1조원 이상의 적자를 보는 등 회사 영업실적이 급격하게 악화된 구조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설치됐다. 팀은 권 사장이 현대오일뱅크 사장으로 있는 동안 최측근이던 조영철 전무(경영지원본부장)와 금석호 상무(인사지원부문장), 송명준 상무(기획부문장)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권 사장이 돌연 임원진 대거 교체 카드를 내놓은 것은 조직이 지나치게 정체됐다는 최종 판단을 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현대중공업 임원 약 220명 가운데 40대는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16명에 불과하다. 전무급 이상에서 40대는 한명도 없을 뿐더러, 전무급 이상 고위 임원의 평균 연령은 60세에 이른다. 이런 인력 적체 현상은 2008년 글로벌 경영위기 이후 조선산업의 업황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이 정체되면서 경영 효율화에 뒤쳐졌다는 평가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사표수리가 예상되는 30% 가량의 임원진 대부분 최근의 실적악화에 책임이 있는 고위급일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재성 회장 시절 회사를 이끌던 고위 임원들이 대거 짐을 쌀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 관계자는 “새 조직에 필요한 임원들은 재신임을 통해 중용하고, 임원 인사를 조기에 단행해 능력있는 부장급을 조직 리더로 발탁해 젊고 역동적으로 변모시켜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 관료적 조직문화에 ‘메스’
권 사장은 최근의 위기를 회사 조직 문화에서도 찾은 것으로 보인다. 임원진 교체와 함께 대대적인 조직개편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본사 지원조직은 대폭 축소하고 영업과 생산 중심으로 조직을 개편하는 것이 우선 목표다. 특히 지원조직에 속해 있는 우수 인력을 대거 현장에 투입해 경영효율성을 높일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최근 현대중공업에서만 볼 수 있었던 수석 부장 직제를 폐지하고 임원직급을 단순화하기로 한 것도 이같은 조치의 하나로 평가된다.
관료적이라는 평가를 듣는 조직문화에도 메스를 가할 방침이다. 사장 직속으로 제도개선팀을 신설해 젊은 직원들과 사장이 직접 소통하는 통로를 만들기로 했다. 직원들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회사의 미래에 대해 토론하는 행사를 여는 등 사내 소통을 강화한다. 임원들이 매달 말일 회사 각 출입문에서 퇴근하는 직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등 경영진의 스킨십을 활성화시킬 계획이다.
조직문화 개선안은 이미 권 사장이 현대오일뱅크 사장 시절 몸소 실천했던 방안들이다. 권 사장은 당시 매주 충남 서산시 대산공장을 찾아 하루를 보내는 등 현장 중심의 경영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새벽 6시30분에 출근해 중역들과 조찬을 하는 것으로 하루 일정을 시작하고 매주 금요일 저녁에는 직원들과 함께 ‘경영진과 대화’ 시간을 가졌다. 틈틈이 일일 주유원으로 나서 현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회사 관계자는 “권 사장이 취임한 뒤 울산 공장에서 노조원과 출퇴근 인사를 했고, 점심시간 마다 직원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노력을 했다”고 말했다.
◆ 임원교체, 본격적인 구조조정 신호탄되나
일각에서는 이번 임원교체가 대대적인 구조 조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전문경영인이 경영을 전담하는 현대중공업은 최근 6년 이상 부진에도 불구하고, 인력 구조조정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몸집을 줄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현대중공업은 과거 정 전 의원이 정치 일선에 있을 때는 여론을 의식해 구조조정에 소극적이었다”면서 “정치 활동 일선에서 물러난 정 전 의원이 회사 경영을 전반적으로 챙기면서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