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시중은행의 상품 개발 담당자인 A씨는 지난해부터 새로 출시하는 중소기업 관련 대출 상품 이름에 웬만하면 '창조' 혹은 '기술'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그는 "요즘은 대출 상품 앞에 창조를 붙여야 할지 기술을 붙여야 할지 좀 헷갈린다"고 말했다. 정부에서 지난해에는 정부와 금융당국에서 '창조금융'이라는 말을 부쩍 쓰더니, 올 상반기부터는 갑자기 '기술금융'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어서다.
그는 "정부에서 정책을 발표하면 은행도 뭔가를 하고 있다는 시늉도 해야 하다 보니 일단 급한 김에 기존에 있는 대출 상품을 약간씩 변형해 '창조'나 '기술'이라고 붙여 출시하는 것"이라며 "지난 정부 시절 녹색금융 바람이 불 때 은행들이 출시했던 상품도 약간만 변형하면 창조금융 상품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권에선 지난해 중반부터 시중은행과 국책은행을 중심으로 대거 출시된 창조·기술 관련 대출 상품의 종류가 적어도 40여개가량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녹색금융이 추진됐던 정부 시절에는 각 은행에서 '신녹색기업대출' '그린그로스론' 등 녹색이라는 이름을 단 금융 상품이 대거 출시되기도 했다.
◇동북아 금융허브, 녹색금융… 정권 바뀌면 사라져
한국 금융의 수준이 동남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의 저개발국가보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배경에는 금융이 정치에 휘둘리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금융 산업이 성장 전략과 수익률 향상을 목표로 움직이기보다는 정치권에서 주문하고, 금융당국이 정한 목표를 뒤쫓아 가는 식으로 흘러가다 보니 장기적인 비전이나 성장을 위한 동력(動力)을 제대로 비축하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대형 금융 정책은 대통령이 바뀌면 용도 폐기 되는 일도 반복되고 있다. 정치권에서 추진하는 금융정책은 정책 추진 기간이 길어봐야 대통령 재임 기간인 5년 미만이다. 동북아 금융 허브와 녹색금융이 그랬다. 금융권에선 창조·기술금융정책도 '길어야 5년짜리'라는 냉소적인 반응도 나오고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야심 차게 추진했던 동북아 금융허브는 사실상 허깨비만 남아 있다. 한국이 도쿄, 홍콩에 이어 아시아 3대 금융허브가 되는 것은 고사하고, 세계 50대 자산운용사 본부 중 서울에 들어온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지난 2012년 준공된 여의도 IFC에는 3개 동 건물 중 1개 동은 입주한 금융사가 없어 2년째 비어 있다. 지난달 22일 준공식을 갖고 문을 연 63층짜리 부산국제금융센터에는 9개 금융기관이 입주했지만, 우리나라 금융 공기업뿐이고, 외국계 금융기관은 한 곳도 없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 추진됐던 '녹색금융'도 마찬가지다. 이 대통령 재임 기간이었던 2009~2013년 사이 녹색 성장 관련 펀드만 총 86개가 출시됐지만, 정부가 바뀌면서 녹색금융은 시장에서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권 5년 주기로 생겨났다 소멸되는 금융정책
정권마다 대형 금융정책이 등장했다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는 것은 정부가 금융을 독자적인 산업으로 보지 않고, '전리품' 정도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정부도 삼성과 현대차 등 제조 업체를 정부 정책에 동원할 생각은 하지 않지만, 금융회사는 정부 정책에 반드시 협조해야 한다는 의식이 정치권에 퍼져 있다는 것이다.
정부의 눈치를 봐야 하는 금융회사 입장에선 손해가 나더라도, 정부 정책에 끌려가기 마련이다. 시중은행의 부장급 실무자는 "이번 정부에서 추진하는 기술금융만 해도 담보나 보증서도 없이 기술만 보고 싸게 많이 빌려주라는 것인데, 나중에 대규모 부실이 나면 누가 책임지느냐"며 "고객이 은행에 맡겨놓은 돈을 정부가 위험한 대출에 사용하라고 지시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항변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박사는 "정부에서 추진하는 대형 금융정책 중에는 반드시 필요한 정책도 있고, 명분이 있는 것도 있다"며 "하지만 정부가 바뀔 때마다 금융정책이 용도 폐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