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량치차오 지음|최형욱 옮김|글항아리|281쪽|1만5000원

이 책을 읽는 것은 괴로운 측면이 있다. 원저자인 량치차오는 조선이 안으로부터 무너져 내려 망했다고 진단한다. 량치차오는 청나라 말기 지도자로서 신해혁명과 5·4운동 등 중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장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실천적 지식인이다. 신채호·박은식 등 조선의 애국계몽주의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왜 조선이 안에서부터 망했다고 일갈했을까.

량치차오는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대규모 토목공사,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일가의 전횡, 일본당과 중국당으로 나뉘어 외국 군대를 불러들여 서로 죽고 죽인 싸움 등이 조선을 어떻게 멸망으로 이끌었는지 쓰라리게 지적한다.

저자는 당시 지도층이었던 궁정과 양반들의 무능과 탐욕을 현미경 처럼 보여준다. 양반들을 대해서는 "개인만 알고 국가의식이 전혀 없었다"며 “다른 나라에서 관리를 두는 것은 국사를 다스리기 위함인데, 조선에서 관리를 두는 것은 오직 직업 없는 사람들을 봉양하기 위함이었다"고 질타한다.

대표적 예로 일본 정부가 한일병합조약을 공포하기로 이미 결정했는데, 대한제국 정부가 순종 황제 즉위 기념일을 맞아 축하연을 연 뒤에 발표하기를 요청해 한일병합조약 공포가 며칠 미뤄진 일을 들었다. 그는 "이날 대연회에 신하들이 몰려들어 평상시 처럼 즐겼으며, 일본 통감 역시 외국 사신의 예에 따라 그 사이에서 축하하고 기뻐했다. 세계 각국의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은 한국 군신들의 달관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저자는 궁정과 양반 등 지도층의 이러한 성향이 결국 친일파를 만들어 내 망국의 직접적인 주역이 됐다고 주장한다. 량치차오는 친일파들이 조선을 실질적으로 장악해가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한다. 송병준이 이끄는 일진회가 한일강제병합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송병준과 이완용이 경쟁적으로 일본에 아부한 점, 일본이 이들 친일파에게 대대손손 유복하게 먹고살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준 점 등을 여실히 적었다.

지도층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었다. 그는 조선 사람에 대해 남에게 기대기 좋아하는 천성을 갖고 있고 당장 배부르면 미래에 대한 고민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 봤다. 그는 심지어 조선 사람은 모욕을 당하면 분노하지만 금방 식어버린다고 조롱했다.

조선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이어가던 그가 거의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평가한 인물들은 독립운동가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와 국치의 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금산군수 홍범식에 대해서는 긍정을 넘어 찬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그는 "무릇 조선 사람 1000만명 중에서 안중근 같은 이가 또한 한둘쯤 없지는 않았다. 내가 어찌 일률적으로 멸시하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유의 사람은 본래 1억명 중에서 한둘에 지나지 않으며, 설령 한두 사람이 있더라도 또한 사회에서 중시되지 않는다. 대체로 조선 사회에서는 음험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자가 번성하는 처지에 놓였고, 정결하고 자애하는 자는 쇠멸하는 처지에 놓였다"고 말한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량치차오는 "나는 조선의 멸망을 보며 춥지도 않은데 전율을 느낀다"고 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눈을 꽉 감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