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고 손실액만 수천억원에 이르는 한국가스공사 주배관 공사 담합(본지 6월 20일자 대우건설 등 17개 대형 건설사 4조원대 가스관 공사 담합…"2000억원 부당이익"> 참고) 사건이 7대 대형 건설사를 넘어 중소·중견 건설사까지 확산 중이다. 조선비즈는 한국가스공사와 건설사간 부정 입찰이 이뤄진 '전자조달시스템' 내역 원본을 입수했다.
전자조달시스템에 따르면 건설사들은 통상 예정가의 70% 선에서 정해지는 공사비를 80% 이상으로 부풀려 수주한 것으로 나타났다. 낙찰자와 낙찰 금액은 사전 모임에서 제비 뽑기를 통해 결정했다. 경찰은 건설사들이 이 같은 방법으로 2921억원의 부당이득을 취한 것으로 보고 있다.
◆ 공사비 부풀려 수주하고 나머지는 ‘들러리’
건설사들의 주배관공사 부정 입찰이 집중적으로 이뤄진 시기는 2009년~2011년 사이다. 한국가스공사는 2009년부터 2013년까지 3조 8756억원을 투자해 주배관을 설치했다. 주배관은 액화천연가스(LNG)를 수송하는 관로(管路)다. 한국가스공사가 대도시까지 주배관을 설치하면, 개별 도시가스 사업자들이 주배관부터 각 가정에 이르는 가스관을 연결한다.
건설사들은 입찰이 이뤄지기 전 모임에서 추첨을 통해 낙찰 업체를 미리 선정했다. 그 외 업체들은 터무니 없이 높은 가격을 써내 일부러 입찰에 떨어지는 방법으로 ‘들러리’를 섰다. 조선비즈가 입수한 한국가스공사 전자조달시스템에는 이 같은 정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예컨대 2009년 5월 21일 입찰이 진행된 상주~영주 간 주배관 건설공사의 경우, 현대중공업이 가장 낮은 공사비를 제시해 낙찰 받았다. 공공기관 입찰은 대략적인 공사비를 산정한 ‘예정가격’을 발주처(한국가스공사)가 정해 놓는다. 건설사 간 경쟁으로 예정가격 대비 가장 낮은 금액을 써 낸 업체가 공사를 수주하는 방식이다. 보통 관급 공사는 예정가격의 70% 초반에서 낙찰 가격이 정해진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의 낙찰가는 예정가격 1074억원의 84% 수준인 908억원에 달했다. 담합이 없다면 751억원(예정가격의 70%)을 써내야 낙찰을 기대할 수 있었다. 현대중공업은 150억원 이상 높은 가격을 써내고도 낙찰 받았다.
현대중공업을 제외한 나머지 업체들은 현대중공업이 낙찰받게 하기 위해 일부러 이보다 더 높은 가격을 써냈다. 대우건설(047040)은 예정가격의 91%에 이르는 987억원을 공사 금액으로 썼다. SK건설도 예정가의 89% 수준인 961억원을 제시했다. 사실상 공사를 수주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이 같은 사례는 부지기수다. 같은 날 입찰이 진행된 울진~속초 간 주배관 건설공사는 삼성물산(028260)이 782억원을 써내 최저가 낙찰 받았다. 최저가지만 예정 금액의 84% 수준이다. 업체간 담합이 없다면 낙찰이 절대 불가능한 금액이다. 삼성물산은 이 공사에서만 최소 130억원의 부당이득을 취한 셈이다.
이 공사에서는 앞서 낙찰자로 선정된 현대중공업이 예정가의 89%(834억원)를 제시해 고의로 탈락됐다. GS건설도 821억원을 적어 내 일부러 떨어졌다.
◆ 담합 없던 공사는 예정금액 70% 수주
건설 업체들이 담합으로 얼마나 부당이득을 취했는지는 담합 없이 진행된 2013년 입찰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진해~거제 간 주배관 제1공구 건설공사는 2013년 4월10일 입찰이 진행됐다.
이 공사의 낙찰 업체는 현대건설(000720)로 예정가 대비 67%에 낙찰 받았다. 한국가스공사가 제시한 공사 예정금액은 1544억원이었는데 현대건설은 1046억원이라는 훨씬 낮은 금액을 제시한 것이다. 이 입찰에 참여한 한화건설, 대림산업, 삼환기업등 상위권 업체는 모두 예정가의 70%에 못미치는 공사 금액을 제시했다.
2013년 10월 11일 입찰이 시작된 안동~군위 및 영주~봉화 간 주배관 공사 역시 낙찰 금액이 예정가의 70%선에 불과했다. 낙찰자는 금호산업이었다.
◆ 한국가스공사, 진짜 몰랐나
이처럼 시장 가격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서 공사가 낙찰되면서 의심의 눈초리는 한국가스공사로 쏠렸다. 한국가스공사는 공기업으로서 수조원 규모 공사를 발주하는 만큼, 입찰 절차를 공정하고 투명하게 진행할 의무가 있다. 주배관 공사에는 정부의 직접 예산도 1542억원 지원됐다. 낙찰 금액이 연속적으로 80% 이상 높은 수준에서 결정됐다면, 공정거래위원회에 이를 통보하거나 입찰을 재검토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2009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김재균 전 의원(당시 민주당)은 “한국가스공사의 배관망 건설공사의 최저가 낙찰률이 평균 84.64%에 달해 일반 관급 공사의 낙찰률 71~72%를 크게 웃돈다”며 담합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당시는 경찰의 담합 수사가 이뤄지기 전이다.
이에 대해 한국가스공사 관계자는 “입찰은 공식 절차이기 때문에 낙찰자가 정해지면 크게 하자가 없는 이상 도중에 절차를 중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