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Wisdom] 92세에도 연주회 '살아있는 전설'… "최고만 추구하면 개성이 사라진다"

  • 오윤희 기자

  • 입력 : 2014.05.31 03:00

    바이올린 거장 기틀리스에게 듣는다

    음악 할 때 예의를 차리지 마라… 연주의 정답만 찾다보면 예술은 점점 빈곤해진다

    음악은 '사랑에 빠지는 것'
    청중이 연주에 아예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느끼게 하는 게 정말 좋은 연주

    매 순간 살고, 매 순간 느껴야
    최근 20~30년간 연주자들 너무 평준화
    기술적인 틀 벗어나 새로운 것 만들어야

    나에게 연주는 '숨을 쉬는 것'
    며칠만 연습 안 하면 '잘 켤지' 늘 걱정
    곡목 안 정해… 의외일 때 예술은 재밌어

    자신의 삶을 음악 안에서 구현
    예술가의 내리막길, 표현 풍부하게 해
    한 곳에 매몰되지 말고 다양한 경험해야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오랜 경험에서 묻어나는 지혜입니다. '위즈덤(Wisdom)' 코너는 위클리비즈가 그동안 만나 온 경영·경제 구루 외에 인문학·예술·종교 등 각 분야에서 한 획을 그은 현인(賢人)들을 만나 그들의 지혜를 독자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이브리 기틀리스
    92세 노인이 주름진 손으로 301년 묵은 스트라디바리우스의 팽팽한 현(絃)을 지그시 눌렀다. 86년간 바이올린 줄을 누르고 튕겨 온 왼손 손가락은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여 있었고, 네 번째 손가락엔 반창고가 칭칭 감겨 있었다.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바이올린을 턱에 괸 노인은 활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빠르게 내리그었다.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3악장의 날카롭고 강렬한 선율이 울려 퍼졌다. 비평가들로부터 "듣는 순간 누군지 바로 가려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바이올리니스트"라고 찬사를 받는 '이브리 기틀리스 표' 음색이었다. 지난 22일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에서 열린 마스터 클래스(뛰어난 음악가가 학생들을 직접 지도하는 수업) 참가자 150여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의 손으로 쏠렸다.

    기틀리스는 20세기 중반 세계 바이올린계를 대표하는 최정상급 연주가 중 한 명이자 지금까지 꾸준한 연주 활동을 펼치는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비르투오소'(virtuoso·거장)라는 칭호를 붙이길 주저하지 않는다.

    "이렇게 오랜 시간 연주를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당신이 몇 날 며칠 숨을 쉬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연주란 내게 그런 의미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25일 연주회 전날 계단에서 굴러 어깨를 심하게 다쳤다. 입원 치료를 받아도 차도가 없었다. 그래서 미리 준비했던 곡목을 모두 간단한 소품으로 바꿨다. 하지만 그는 연주회를 포기하지 않았다. 도중에 연신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사과와 더불어 "내 '짧은' 인생에 이런 일이 벌어지긴 처음"이란 농담을 섞어 가면서 연주회를 끝까지 마쳤다.

    최근엔 다리 힘이 약해 의자에 앉아 연주하는 게 습관이 됐지만, 이날은 어깨 통증이 심해서인지 일어서서 바이올린 끝 부분을 반주자 피아노에 고정한 채 연주를 이어갔다. 기대와 전혀 다른 공연이었지만, 객석에선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다. 어쩌면 이 예상 밖의 공연이야말로 '즉흥적이고, 틀에 박히지 않고, 개성적인 연주'로 유명한 기틀리스다운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저는 지금도 여전히 바이올린 연습을 합니다. 완벽한 테크닉을 연마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게 연습이란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한 훈련입니다. 어떤 이들은 베토벤이라든지, 바흐를 연주할 때 '그 곡은 이런 식으로 연주해야 해' '이것이야말로 그 곡을 연주하는 단 하나의 올바른 방식이야'라고 말하죠. 그런데 질(quality)을 높이는 데 치중하다 보면 결국엔 동일성(equality)까지 높아집니다. 정형화된 테크닉을 연주하기 위해서 질주하다 보니 오늘날 연주에선 개성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는 그게 서글픕니다."

    연주 도중 잠시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청중에게 말을 거는 등 기행(奇行)으로 유명한 기틀리스의 면모는 기자회견 때도 그대로였다.

    "20년 만에 한국에 온 감회는 어떤가"라는 질문에 "20년 만인지 얼마 만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지난 세기'에 왔다는 것"이라고 답했고, "방한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엔 이렇게 직격탄을 날렸다. "오,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다니! 당연히 연주를 하러 왔죠. 셰익스피어도 '음악이 사랑의 양식이라면 연주하라(If music be the food of love, play on)'고 말했잖아요?"

    마스터클래스가 끝난 뒤 그와 단둘이 마주 앉은 기자는 "선생님의 독특한 연주 스타일은 어떻게 형성됐나요"라는 질문을 던져 봤다. 그는 기자를 골똘히 응시하면서 대뜸 "당신 이름이 뭐라고 했죠?"라고 되묻고 나서 이렇게 대답했다.

    "좋아요, 윤희. 내가 당신과 얼굴이 닮았다고 생각하나요? 혹은 당신과 저기 저 자리에 앉아 있는 직원 얼굴이 닮았다고 생각하나요? 아니죠? 우린 모두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요. 내가 '나'이고, 당신이 '당신'이듯 우리는 모두 다른 존재죠. 다름이라는 것은 우리가 모두 저마다 다른 색채를 갖고 있고, 다른 접근 방식을 갖고 있고, 다른 스타일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상상해 봐요. 우리가 만약 다른 사람과 모두 똑같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얼마나 재미없을까요? 당신은 아마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과 달라질까'라는 걸 묻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는 이미 다 다르니까요! 어린아이는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자고 싶을 땐 자죠. 그렇게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나이가 들면 점점 주변 사람 눈치를 보고 자신을 제약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미 가진 고유한 색채를 발전시키고, 개발할 수 있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다름과 개성을 장려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음악가 15명이 똑같은 소나타, 똑같은 콘체르토를 정확하게 똑같이 연주한다면 왜 사람들이 연주회에 가겠습니까. 우리는 연주회에 갈 때 그 연주자만이 할 수 있는 어떤 것, 남들과 색다른 것을 보려고 갑니다. 하지만 요즘엔 많은 스승이 학생이 가진 것을 일깨워주는 게 아니라 이미 정해진 한 방식으로 수정하려고 들지요. 만약 바흐에게 사라사테처럼 '치고이너바이젠'을 연주하라고 하거나, 사라사테에게 바흐처럼 푸가를 연주하라고 해 보세요. 어떤 일이 일어나겠어요? "

    그는 "내가 하는 말이 이해가 가느냐"고 물은 뒤 잠시 생각을 고르는 듯 말을 멈췄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최근 20~30년간 연주자들이 너무나 평준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상업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산업화된 사회, 대량 생산을 하는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먹고, 비슷한 방식으로 살고, 비슷한 공간에서 살아가고, 심지어 호텔도 전 세계 어딜 가나 대부분 비슷해요."

    [그래픽] 이브리 기틀리스 - 이스라엘 출신의 현역 최고령 바이올리니스트
    아직도 연습을 하지 않으면 걱정된다

    기틀리스가 바이올린을 시작한 것은 여섯 살 때이다. 네 살 때 부모님에게 생일 선물로 바이올린을 사 달라고 졸랐던 것이 그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백발이 성성한 그는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바이올린을 선물받고 너무나 좋아서 온종일 연습하곤 했다. 하지만 갈수록 어렵더라.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때 장난감 비행기 같은 거나 사 달라고 할걸" 하고 말했다.

    그는 "80년 이상 연주를 하면서 심각한 슬럼프를 겪은 적이 없었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게 무슨 의미냐"고 되물었다.

    ―그러니까, 훌륭한 연주를 못 해 우울하다거나 비관적인 기분이 든다거나 하는 상태….

    "그건 언제나 그런걸요! 저는 10대 때부터 지금까지 전문적으로 바이올린을 켰지만, 아직도 며칠간 연습을 하지 않으면 '내가 과연 바이올린을 켤 수 있을까' 걱정이 돼요.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생각을 안고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면 그건 내게 숨을 쉬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는 예술가의 기복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만약 쇼팽이나 바흐가 늘 행복하거나 기쁘기만 했다면 어떻게 훌륭한 작품이 나왔겠는가. 예술가의 내리막길은 표현의 풍부함을 더해 준 원천"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곧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당신이 24시간 거의 움직임이 없는 상태로 땅에 고정돼 있다고 가정해 봐요. 가사(假死) 상태로 있는 것처럼 거의 움직이질 않지만, 호흡을 하면서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하니까 아래위로 몇 ㎝ 정도씩 몸이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겠지요. 그러한 작은 오르내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예를 들어서 사하라같이 드넓은, 끝이 보이지 않는 그런 사막에서 몇 걸음도 내딛지 못한 채 한 곳에 고정돼서 그렇게 아래위로 아주 작은 미동(微動)만 하는 것인데 말이죠. 넓은 맥락에서 봤을 때 예술가의 오르막과 내리막은 에베레스트를 향해 가는 머나먼 여정에서 그런 미동 수준에 불과한 겁니다."

    의외성이야말로 예술의 묘미

    결과적으로 어깨 부상 때문에 미리 준비한 곡도 죄다 바꿀 수밖에 없었지만, 원래부터도 기틀리스의 공연 2부엔 곡목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관객의 반응을 보고 즉석에서 연주회 분위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곡을 정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런 독특한 시도를 한 이유를 묻자, 기틀리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당신에겐 그게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나요?"라고 되물었다.

    ―이상하기보단 흥미로웠죠. 한국에선 그게 평범한 일은 아니거든요.

    "나 역시 '평범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난 이 콘서트를 '아마도(maybe) 콘서트'라고 불러요! '아마도' 콘서트에선 아마도 난 이런 곡을 연주할 수도 있고, '아마도' 저런 시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모든 것을 다 예상하고 연주회에 온다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뭔가 새로운 것을 기대하면서 연주회에 가는 거 아닌가요? 놀라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새로운 느낌을 갖기 위해서죠. 사실 요즘은 관객들이 아무런 선입견이나 사전 정보 없이 연주를 듣거나 의외성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지요. 하지만 그런 예상할 수 없음이야말로 예술의 묘미가 아닐까요?"

    ―오랜 세월 무대에 서 왔는데, 과거와 지금 무대에 설 때 마음가짐과 느낌이 어떻게 다른가요?

    "모든 무대마다 그 느낌이나, 분위기나 당시에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은 매번 달랐어요. 우리가 익숙하다고 느끼는 것도 매번 변해요. 당신이 매일 정원을 산책하지만, 어느 날 그전엔 아직 발견하지 못했던 작은 꽃이나 식물을 보고, '아, 여기 이런 게 있었다니!' 하고 놀랄 때도 있죠. 만약 당신이 정말로 열심히 연습해서 매번 똑같은 하나의 결과만 손에 쥘 수 있다면, 예를 들어서 어떤 곡은 어떤 형식으로 연주하고, 어떤 라인은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등등 매번 모든 것이 동일하기만 하다면, 다시 말해서 당신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을 느끼고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래서 그것을 당신의 연주에 녹여낼 수가 없다면 우리는 연주라는 걸 차라리 그냥 기계한테 맡겨 버리고 버튼을 누르는 게 더 나을 겁니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최근 음악계의 변화에 대해 불만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는 건, 그것도 피상적으로 변해 버렸다고 생각하는 건 음악을 가르치는 방식입니다. 너무나 정형화된 방식으로 음악을 가르치고 그럴 받아들이려고 해요. 단 하나의 방식으로 음악을 해석하려 한다면 그건 매우 빈곤한 음악이며, 그러한 예술은 매우 빈곤한 것입니다. 음악이 깊어지고 풍부해질수록 거기엔 매번 새로운 가능성의 여지, 매번 새로운 도전을 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22일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에서 한국 학생들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지도하는 이브리 기틀리스. 그는 수줍어하는 학생들에게 “당신 방에서 혼자 노래하고 대화하듯 마음 편하게 연주해 보세요”라고 말했다.
    22일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에서 한국 학생들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지도하는 이브리 기틀리스. 그는 수줍어하는 학생들에게 “당신 방에서 혼자 노래하고 대화하듯 마음 편하게 연주해 보세요”라고 말했다. / 김연정 객원기자
    "음악을 할 때 예의를 차리지 마라"

    하지만 세월의 변화에도 절대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이를테면 사랑과 같은 감정이다. "내가 여섯 살 때 함께 학교를 다니던 동네 여자아이 릴리에게서 느꼈던 첫사랑의 감정이나 예순 살에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나 하면 그건 그렇지 않아요. 몇백 년 전에 쓰인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으면서 여전히 감동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가 예전에 했던 "음악을 할 때 너무 예의를 차리지 마라. 그건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다(Don't be so polite with music. It's like in love)"는 말의 의미를 물어보았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음악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둘 다 본질적으로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둘은 강렬하고, 밀도가 높고, 바로 그때 그 순간에 취해 있는 것이니까요. 예를 들어서, 누군가의 연주를 듣고 사람들이 그에게 '이번 연주는 어땠고, 저랬고, 기교가 어떻고, 운지법이 어쩌고 하면서 아, 정말 대단히 열심히 연습하셨군요'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건 어떤 면에선 모욕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좋은 연주는 어떤 의미에선 청중이 연주에 아예 신경을 쓰지 않고 그냥 느끼게 하는 연주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연주가, 훌륭한 예술가가 되길 꿈꾸는 젊은 음악가들에게 조언을 한마디 해 주신다면요?

    "'훌륭한 예술가가 되는 것 따윈 잊어버려! 그냥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술가가 돼!'라고 말하고 싶군요."

    ―예술가가 된다는 건 어떤 의미죠?

    "음악 속에 자신을 구현하는 거죠. 예술가는 단순히 어떤 레퍼토리를 기계적으로 연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음악 속에 '자신'을, 자신의 취향과 이해심과 지성을 불어넣는 것이죠. 내가 갖고 있는 삶을 음악 안에서 구현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주자는 연주할 때 어떤 물리적인, 테크닉적인 프레임에서 벗어나 매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고, 매 순간 살고, 느끼고 있어야 합니다."

    "지옥은 바로 당신들이다"

    ―자신을 어떤 예술가라고 생각하시나요?

    "장 폴 사르트르가 쓴 희곡 '닫힌 방'에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지옥은 바로 당신들이야!'라는 유명한 대사죠.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신이 당신에게 지옥과 천국을 보여 줍니다. 당신이 보는 지옥의 모습은 풀밭이 우거지고 태양이 빛나는 아름다운 곳이에요. 당신은 그걸 보고 '지옥이 이렇게 좋은 곳이라니' 하면서 지옥을 선택합니다. 신은 당신에게 '선택에 후회는 없겠지?' 하고 물어보고, 당신은 후회를 안 할 거라고 하죠. 그런데 당신이 선택한 순간, 발밑이 꺼지면서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진짜 지옥이 나타납니다. 당신이 어떻게 된 거냐고 항의하자, 신은 이렇게 말하죠. '아까 보여 준 건 그냥 홍보용일 뿐이야!' 타인이 내리는 정의란 건 그런 게 아닐까요. 나 스스로 정의를 내린다… 일단 '좋은 예술가'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좋은 예술가는 어떤 건가요?

    "그걸 한마디로 표현할 순 없겠죠. 예술을 한두 마디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어요. 다만 '좋은 예술가'라는 건 A가 B보다 낫고, B가 A보다 덜하다는 식의 어떤 경쟁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또 하나, 제가 생각하는 훌륭한 예술가가 되기 위한 조건은 '한 곳에 매몰되지 말라'는 겁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훌륭한 화가였지만, 훌륭한 설계자였고, 훌륭한 과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구스타프 말러는 훌륭한 작곡가였고, 훌륭한 지휘자였습니다. 다양한 경험이 예술가의 삶을 풍부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