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주 라투슈 지음ㅣ정기헌 옮김ㅣ민음사ㅣ144쪽ㅣ1만2000원


전 세계 여성의 생활 필수품이 된 나일론 스타킹. 1940년 듀폰사에서 처음 출시된 스타킹은 올이 풀리지 않고 자동차 한 대를 끌 수 있을 정도로 튼튼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신는 스타킹은 틈만 나면 올이 풀리고 구멍이 나는 제품이 됐다. 어떻게 된 일일까. 저자는 코지마 단노리트세르의 영화 '전구 음모 이론'에서 다룬 나일론 스타킹에 관한 실화를 소개한다.

"산업 논리가 스타킹 생산에 적용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엔지니어들은 이 기적의 섬유를 덜 질기게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고의로 결함의 시기를 앞당기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자외선으로부터 나일론을 보호하기 위해 넣는 첨가물의 양을 조절하면서 임무가 완수됐다. 여성들은 좋든 싫든 규칙적으로 새 스타킹을 구입할 수 밖에 없게 됐다."

그는 이런 현상이 성장만을 추구하는 사회가 낳은 '계획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se)' 때문에 나타났다고 진단한다. '계획적 진부화'란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제작자가 인위적으로 기계 등의 수명을 단축하거나 결함을 삽입하는 행위를 말한다. 예를 들어 프린터를 제작하면서 인쇄 매수가 1만8000장이 넘어가면 자동으로 작동을 멈추게 하는 마이크로칩을 삽입하거나, 제품 보증 기간이 끝나자마자 기계가 고장나도록 설계하는 식이다.

저자는 진부화를 크게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기술적 진보 때문에 기계·설비가 구식으로 전락하는 '기술적 진부화', 광고·유행 등을 통해 혁신 없이도 제품을 구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심리적 진부화', 제작자의 의도가 가미돼 나타나는 '계획적 진부화'다. 오늘날 이 세 가지 진부화는 교묘하게 결합돼 성장 중심의 사회를 이끌고, 소비자의 사고방식을 지배히자만 결국은 자연 자원의 낭비와 쓰레기의 범람이라는 문제를 불러온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계획적 진부화는 성장 사회를 이끌어가는 소비주의의 절대적인 무기다. 우리는 광고를 거부하고 대출을 거절할 수는 있지만 제품의 기술적 결함 앞에서는 대부분 속수무책이 된다. 전기 램프부터 안경에 이르기까지 특정 부품의 의도된 결함으로 고장을 일으키는 시점이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그러나 새 부품이나 수리가 가능한 곳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찾아낸다 하더라도 동남아시아의 공장에서 저임금으로 생산된 신제품을 구입하는 것보다 돈이 더 들 수도 있다. 그 결과 컴퓨터, 텔레비전, 냉장고, 식기세척기, DVD 플레이어, 휴대 전화 등이 산더미 처럼 쌓여 각종 환경 오염을 유발한다. 매년 제3세계 쓰레기 처리장으로 수출되는 컴퓨터가 1억5000만 대에 달한다.”

이런 관행은 성장을 추구하는 현대 경제 시스템 때문에 더욱 심해지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탈성장 이론가로 명성이 높은 저자는 인류에게 미래가 존재하기를 바란다면 계획적 진부화를 제품의 지속 가능성·수리 가능성·계획적인 재활용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촛불을 사용하던 시대로 되돌아가거나 금욕주의적인 고행을 실천하자는 말은 아니다. 검약과 자기통제를 선택해 소비주의적인 양식과 기술과학·시장이 결합된 독재 체제를 거부하면서 최소한의 자율성을 확보하자는 것”이라고 말한다.

가능한 실천 사례로는 세탁기를 들었다. 라틴 문화권 등에서는 세탁기를 대부분 각 가정 욕실에 두고 개인적으로 사용한다. 평균 3년 주기로 교체한다. 스웨덴의 경우 공동 주택 지하에 공동 소유 세탁기를 설치해 건물 관리인이 관리하는 등 내구재 공유를 실천하고 있다.

저자는 “내구재의 공유를 통해 공동체 구성원은 물질적인 일상생활에서 더 큰 회복력(resilience)을 가질 수 있고, 미래의 도전 과제를 함께 풀어가기 위해 필요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스웨덴 모델로 가야한다는 얘기다.

끊임없이 새로운 기능을 갖춘 최신형 스마트폰이 출시돼 소비자를 유혹하는 현대 사회. 이런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 번쯤 돌이켜 생각해볼 만한 주제다. 탈성장 이론가로 오랜 기간 활동해 온 저자가 풍부한 사례를 들어 계획적 진부화의 뜻과 기원, 한계를 고르게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