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오일뱅크가 국내 정유업계 최초로 유류(油類) 저장사업을 시작한다. 현대오일뱅크는 9일 울산시 울주군 온산읍에 총 28만kL의 석유제품을 저장할 수 있는 오일터미널 준공식을 열었다. 권오갑 사장은 "국내 최초의 상업용 유류 터미널 운영이 회사의 사업구조 다각화에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사상 초유의 실적 악화(惡化)에 빠진 국내 정유 4사(社)가 사업 부문 다각화를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는 한 시도로 꼽힌다. 정유 기업들은 원유 정제(精製) 마진 축소와 알뜰 주유소 등장 등으로 주력 사업인 정유 부문의 실적이 부진하자 새 '성장 동력' 찾기에 사활을 걸고 있다.
'정유만으로는 미래가 없다'는 위기감 속에 고(高)부가가치 석유화학 제품이나 신소재, 자원 개발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달석 에너지경제연구원 박사는 "천수답(天水畓) 농민처럼 유가 등락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에 정유사들이 신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름 장사는 천수답"
현대오일뱅크의 오일터미널은 1000억원을 투자해 2011년 10월 착공, 울산신항 남항부두의 공유수면 8만7000㎡를 매립해 건설했다. 5만t급 유조선이 접안할 수 있는 부두와 총 28만kL를 수용하는 35기의 저장 탱크를 갖췄다.
대형 탱크로리(20kL) 1만4000대를 한꺼번에 채울 수 있는 규모다. 안창희 현대오일터미널 대표는 "작년 말 처음으로 일본계 종합상사와 등·경유 5만t 계약을 시작으로 일본, 싱가포르 화주들을 잇달아 유치해 전체 저장 용량의 90% 이상이 채워졌다"며 "연간 200억원의 매출과 60억~80억의 영업이익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현대오일뱅크는 윤활기유 사업, BTX(벤젠·톨루엔·자일렌) 부문도 주요 미래 성장 동력으로 삼아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
◇비(非)정유사업 강화로 체질 개선
다른 정유사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수년째 정유 부문에서의 손실을 석유화학 부문에서 만회하는 구도가 이어지다 보니 '비(非)정유 부문' 역량 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전기차(電氣車) 배터리 사업을 새 성장 원천으로 결정했다. 이 회사는 베이징자동차그룹·베이징전공과 세운 합작 법인이 올해 초부터 본격 가동 중이다. 2017년까지 생산 규모를 2만대까지 늘려 중국 내 전기차 배터리 점유율 1위가 되는 것이 목표이다. 최근 미국에 석유 광구 2곳의 운영권을 인수하는 등 자원 개발 사업에도 힘을 쏟고 있다.
GS칼텍스는 작년 말 체코와 경남 진주에 자동차나 가전(家電)제품에 많이 쓰이는 기능성 플라스틱인 '복합수지' 공장을 세웠다. 원유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저렴한 부산물로 고부가가치의 탄소섬유 개발에도 뛰어들었다.
에쓰오일은 장기 성장 기반 마련을 위해 서울 마곡지구에 기술센터를 세우기로 하고, 울산에는 고도화시설과 석유화학 제품 증설을 위한 대규모 부지를 확보했다. 나세르 알 마하셔 CEO는 "회사 R&D 역량 강화와 석유화학 부문 신사업 진출에 전사(全社)적인 역량을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유사들이 최근 의욕적으로 나선 PX(파라자일렌) 사업이 중국 경기 부진과 공급 과잉으로 고전(苦戰)하는 등 개별 기업들의 사업 다각화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가격 논리만 앞세워 정유사들의 손발을 묶는 정부의 석유 유통구조 개선 정책의 변화가 절실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