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 회장은 지난 2004년 최고경영자 세미나에서 '부진불생(不進不生)'이란 화두를 제시했다. '해외 수출로 성장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다급한 목소리였다. 그다음 해 SK텔레콤이 창사 이래 처음으로 매출 10조원을 돌파하면서 2조650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을 때도 축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룹 내부에선 오히려 '내수시장 성장 한계론'이 불거져 나왔다. 당시 SK그룹 수출액(121억달러)이 국가 전체 수출액에서 담당하는 비중은 4.3%에 불과했다.
SK그룹은 자산 기준 재계 3위로 SK이노베이션과 SK텔레콤 등 최고의 알짜기업을 갖고 있지만, 항상 내수 시장에서 '땅 짚고 헤엄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룹 차원에서도 사업 포트폴리오를 수출형으로 다시 짜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려왔다.
그런 SK그룹이 올해 수출액 600억달러를 돌파하며 '내수기업 콤플렉스(열등감)'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동안 '통신·정유' 위주의 내수기업이란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은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SK그룹은 25일 "이노베이션·SKC·케미칼·건설·하이닉스 등 주요 수출 계열사 8개사 실적을 추정한 결과, 올해 수출액이 614억달러(약 65조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지난해 634억달러에 이어 2년 연속 600억달러를 넘어선 것이다. 올해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 예상치인 5586억달러의 10.9%에 해당하는 것이다. 8개 계열사의 매출액 대비 수출 비중도 71.7%에 달하고 있다.
SK그룹은 지난 2005년 120억달러로 100억달러 벽을 돌파한 이후, 2007년 260억달러, 2011년 446억달러로 매년 수출이 급증해왔다.
◇내수 이미지 벗자는 강박증이 수출 원동력
SK그룹의 변신을 가능하게 한 것은 하이닉스 인수와 SK이노베이션의 사업 다각화다. SK그룹은 2011년 말 세계 2위의 D램업체인 하이닉스를 그룹에 편입시키면서 대규모 수출제조기업을 보유하게 됐다. 실제 하이닉스 인수전 당시 그룹 내부 보고서는 "원유를 수입해 정제유를 수출하는 방식으로는 'SK=수출기업'이란 이미지를 심기 힘들다. 첨단 산업체인 하이닉스를 인수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SK하이닉스의 올해 수출액은 120억달러에 달한다. 모바일D램 같은 반도체 시장 호황으로 지난해보다 40%나 수출이 늘어났다. 에너지 기업인 SK이노베이션도 올 한해 450억달러를 수출하면서 계열사 중 최대 수출액을 기록할 전망이다. 수출 내역을 보면 기존 휘발유·경유뿐 아니라 윤활유·석유화학제품 등에 걸쳐 골고루 선전했다.
구자영 SK이노베이션 부회장은 5년 전부터 정유사업 중심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 석유화학제품과 신재생에너지, 자원개발 등으로 영토를 넓히는 '탈(脫)정유'를 시도해왔다. 그는 "수년 내 삼성전자와 같은 회사가 되자"는 얘기를 임직원들에게 하고 있다. SKC와 SK케미칼 등은 LCD(액정표시장치)용 광학필름과 고부가가치 석유화학제품 등으로 연간 12억달러가량의 수출고를 올리고 있다.
◇반도체·통신·에너지로 그룹 구조변화
재계에선 SK그룹이 기존 양대축인 통신·에너지에 반도체를 더한 '3각체제'로 재편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1994년 한국이동통신을 사들여 통신과 에너지란 양대축을 만든 후 20년 만에 큰 틀에서 변화가 일고 있다는 것이다. 경기도 이천에 1997년 이후 처음으로 신규 반도체 라인을 증설하면서 향후 8년간 15조원을 쏟아붓겠다고 발표한 것도 그룹 포트폴리오 변화를 상징한다.
이만우 SK그룹 부사장은 "석유화학제품과 반도체를 앞세워 글로벌 시장을 개척하겠다"며 "이제부터 더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