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이. 이상훈(가명), 이상훈, 허~이. 4300원 866번."
지난 7일 밤 11시 서울시 송파구 가락시장 배추 경매장. 전동차에 올라탄 30년 경력 최현근 경매사가 배추가 쌓인 트럭 30여대를 지나가면서 경매를 진행하고 있었다.
최씨가 배추 트럭을 지날 때마다 중간도매상 60여명은 구형 휴대전화같이 생긴 응찰가 입력기를 움켜쥔 채 마음에 드는 배추가 나오면 재빠르게 가격을 입력하고 있었다. 최씨가 부른 이름들은 배추를 팔려고 내놓은 출하자, 4300원은 배추 3포기가 들어가는 망당 낙찰가격, 886번은 낙찰받은 중간도매상의 번호이다.
낙찰이 안 되면 경매사는 그냥 "다음"이라며 넘어가는데, 이날은 경매 초반부터 "다음"이 자주 나왔다. 3개 트럭 연속으로 낙찰이 안 되자 최 경매사는 "아, 이거 죽겠네"라며 혀를 찼다.
이날 배추 낙찰가는 4000원대 초반이었고, 간간이 3000원대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9월 초까지만 해도 망당 1만5000원을 호가했던 배추 값이 3분의 1로 떨어졌다. 배추 경매 가격은 계속 떨어져 최근에는 망당 평균 낙찰가가 3040원까지 추락했다. 간신히 포기당 1000원 선을 유지하는 중이다. 한 도매상인은 "경매에 나온 물량의 10% 정도는 임자도 못 찾고 헐값에 김치 공장으로 넘어간다"고 말했다.
◇농산물 80%는 경매로 가격 결정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채소와 과일 가격은 급등락 폭이 너무 크고, 지나치게 자주 급등락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지적한다. 지난 2010년 배추 파동 당시에는 배추 값이 포기당 1만원을 넘겼고, 올해는 배추 값이 너무 떨어져 포기당 도매가격이 1000원대로 떨어졌다.
우리나라 농산물 값의 변동이 이처럼 큰 이유는 가격 결정이 거의 송파 가락시장 한 곳에서, 경매로 이뤄지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우리나라 1년 과일·채소 유통 물량의 4분의 1을 취급하는 가락시장의 도매가격은 전국 표준가격 역할을 하는데, 이곳에서 이뤄지는 거래 중 80% 이상이 경매로 가격을 정한다.
주어진 물량을 두고 경쟁하는 경매는 물건이 없을 때는 가격을 더 올리고, 물건이 많을 때는 가격을 원가 이하로 떨어뜨리는 경향이 있어 가격이 급등락할 수밖에 없다.
남양호 국립농수산대학 총장은 "1년간 농산물 값 평균을 내보면 거의 일정하다. 문제는 들쑥날쑥한 변동성"이라며 "도매시장 경매는 이런 변동성을 오히려 부추기는 부작용이 있다"고 말했다.
농산물 도매가격이 경매로 정해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다. 경매 제도가 처음 시행될 때는 농산물이 소비자에게로 가는 유통 경로가 도매시장뿐이었고, 상인들의 담합이 심해 경매가 가격 결정의 투명성을 보장한다는 순기능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농산물 유통의 투명성이라는 목표가 달성된 이후에도 경매만으로 농산물 값을 정하다 보니, 가격 급등락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정가 수의매매' 늘려야
경매를 보완할 농산물 가격 결정 방식으로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것이 '정가(定價) 수의(隨意)매매' 방식이다. 농산물 재배 농가와 도매상이 일정 기간의 가격을 미리 정해 농산물을 거래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배추 수확기에 매일 트럭 1대분을 출하하는 농민은 매일 달라지는 시가 대신 미리 계약을 한 도매상에게 배추를 넘기고 한 달 단위의 평균 가격을 정해 나중에 정산하는 방식이다.
정부는 작년 8월 도매시장 관련법을 바꿔 이 같은 정가 수의매매 방식을 전면 허용했지만, 가락시장에서도 비중이 10% 남짓에 불과하다〈그래픽 참조〉.
이미 대형화된 도매상들이 기존 방식인 경매로도 마진을 충분히 남기고 있기 때문에 정가 수의매매라는 새로운 방식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가 수의매매는 가락시장 같은 대형 도매시장보다는 틈새를 노려야 하는 지방 시장에서 성공적인 사례가 나오고 있다. 대전 노은시장에서 활동하는 도매법인인 대전중앙청과는 친환경 농산물만 거래하는 저온(低溫) 경매장 안에 농산물을 가공하는 시설을 갖추고, 올해부터 정가 수의매매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아직 실적이 많지 않지만 국내 도매법인 중에서는 첫 시도다. 대전중앙청과는 충청권에서 농협공판장에 이어 둘째로 큰 도매법인인데, 작년 거래실적이 1500억원에 이른다. 대전중앙청과는 향후 대부분 거래를 정가 수의매매 방식을 도입해 처리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