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대우그룹의 회사채 파동 이후 최대 규모인 4만여명의 기업어음(CP) 피해자를 쏟아낸 '동양 부실 CP 쇼크'의 배후엔 부실한 신용평가 기능이 한몫을 하고 있다. 신용평가만 제대로 했더라도 부실 CP 발행이 불가능했고, 그랬다면 피해자도 그만큼 줄었을 것이란 얘기다.

이번 '동양그룹 사태'에서 신용평가사들은 자본잠식 상태인 동양 계열사에도 채무 상환 능력이 인정되는 B등급을 주고 있었는가 하면, 줄곧 우량 등급을 주다가 법정관리 한 달 전부터 무려 5단계를 초스피드로 떨어뜨렸다.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뒷북도 이런 뒷북이 있나' 하는 탄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반 투자자들이 기업들의 내부 사정을 들여다보기 쉽지 않다. 그래서 가장 의존하는 것이 기업에 대한 신평사들의 신용평가 등급이다. A는 투자 적격, B등급은 다소 위험하지만 그래도 투자는 가능한 수준으로 본다. C등급 이하가 나오면 사실상 개인들조차도 거의 투자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 무더기 법정관리 신청을 해버린 동양그룹 계열사 중 8월 말 이전에 C등급을 받은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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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평가사들이 뒷북을 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LIG건설은 지난 2011년 3월 법정관리를 신청하기 직전까지 6개월간 투자 적격인 'A3-' 신용등급으로 개인 투자자들에게 2000억원 이상의 CP를 발행했다가 막판에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작년 9월에는 웅진홀딩스가 'A2-'등급으로 1000억원대의 CP를 발행한 상태에서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일이 벌어졌다.

◇2년간 우량등급 주다 법정관리 신청 직전 5개 등급 내려

A3(상환능력 양호 등급·2012년 1월)→A3-(2013년 1~8월)→B+(상환능력 인정 등급·2013년 8월 29일)→B-(2013년 9월 27일)→D(채무불이행 등급·2013년 10월 1일)

한국기업평가와 나이스신용평가 등 국내 2개 신용평가기관이 지난 1일 법정관리 신청을 한 동양시멘트에 대해 최근 2년간 내려온 신용등급의 변화 추이다.

'믿고 투자해도 좋다'는 등급(A)이 법정관리 신청 불과 한 달 전인 8월 29일부터 무려 5등급이나 초스피드로 급락해 D(채무불이행)등급으로 떨어졌다. 투자자들 입장에선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신평사인 한국신용평가는 동양 계열사에 대해 평가를 중단했거나 하지 않아왔다.

현재 만기가 돌아오지 않은 동양시멘트 CP 발행 금액만도 358억원. 대부분 '휴지 조각'이 될 위험에 노출돼 있다. 특히 법정관리 돌입 석 달여 전부터 (주)동양이 집중적으로 1500억원대 이상 발행한 CP(자산담보부 기업어음·ABCP)는 동양시멘트의 '건전성'을 담보로 발행된 것이다. 에프엔 자산평가의 최원석 대표는 "'엉터리 뒷북 신용평가'만 없었더라도 동양 계열사들이 부실 CP를 마음대로 발행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본잠식 상태인데도 B(상환능력 인정)등급

동양그룹 사태에서 뒷북 평가의 대상은 동양시멘트뿐만 아니다. 동양그룹 계열사 중 가장 먼저 법정관리 신청(9월 30일)을 한 동양레저와 동양인터내셔널의 신용등급 추락도 마찬가지다. 두 회사는 작년 연말부터 완전 자본잠식 상태였다. 자본잠식이란 회사가 자본금을 다 써버려 빚만 남아 있는 상황이란 뜻이다. 그런데도 이들 기업에 대해 한기평과 나이스는 9월까지 B등급을 줬다. 그러다가 언론에서 '동양그룹 10월 고비설'을 제기한 직후인 9월 11일에 가서야 B-로 한 등급 낮췄다. 하지만 여전히 B등급이라, CP 발행과 유통이 가능한 등급이었다. 두 회사가 발행해 아직 만기가 돌아오지 않은 CP규모는 4500억여원이다.

이후 오리온 그룹의 동양 지원 거부(9월 23일)로 시중에서 동양증권에 대한 '인출 사태'가 시작된 상황에서도 신평사들은 '신용등급 조정'을 하지 않았고, 9월 27일에 가서야 C등급(상환능력 매우 가변적)으로 내렸다. 동양레저 등 2개 회사는 사흘 후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대기업에서 자유롭지 못한 구조

왜 부실 신용평가가 반복되는 것일까. 일부 신평사 관계자들은 "과거의 실적을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예측하는 것이다 보니 한계가 있다"고 해명하지만, 이번 사태의 과정과 그 파장을 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전문가들은 대기업들로부터 수수료를 받아 운영되는 우리 신평사들의 구조적 문제점을 지적한다. 우리나라 신용평가 시장은 실제 신용평가의 수요자인 투자자보다는 신평사에 수수료를 지급하는 주체인 대기업이 주도하는 시장이다.

외국의 신평사들도 기업으로부터 평가수수료를 받기는 하지만 시장의 압력을 의식해 투자자 관점에서 객관적이고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기 때문에 기업에 휘둘리지는 않는다.

☞기업어음(CP) 신용등급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가 대주주인 한국신용평가, 피치가 대주주인 한국기업평가, 토종사인 NICE신용평가 등 3개 기업 신용평가사가 CP에 매기는 신용등급. A1(상환능력 최고)부터 D(채무불이행)까지 총 12단계로 구분된다. 신평사가 기업으로부터 수수료를 받고 등급을 매기며, 기업 입장에서 신평사 3곳 중 2곳으로부터 평가 등급을 받으면 CP를 발행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