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서울역사박물관 주변. 고(故) 김중업 건축가가 설계한 욱일빌딩 옆 경희궁1길을 따라가니 네모 반듯하고 푸른빛을 띠는 정방형 커튼 월(유리마감) 건물이 눈에 띄었다. 경사가 높은 대지를 이용해 입구가 있는 1층 부를 기단으로 삼고, 2층 부에 정원 겸 휴식공간을 조성해 현대적이면서도 담담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경희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건물은 2009년 건축가 유걸(73)이 설계한 ‘아산정책연구원’이다.
한국 건축의 큰 대들보인 유걸의 작품 중에서도 백미(白眉)로 꼽히는 이 건물은 외관보단 내부가 압도적이다. 날이 선 육면체 박스로 들어가는 순간 유영하는 물고기같이 유려한 곡선으로 이뤄진 비정형적 공간이 나온다. 이 공간은 건물 꼭대기까지 트여 있고, 심지어 천정이 뚫려 있어 빛이 쏟아진다. 이 공간에는 건물을 지탱해야 할 기둥과 보가 없다. 고도의 공학기술이 적용된 철강 빔(Steel beam)이 꽉 짜여 있어 유걸 특유의 공간미가 돋보인다.
유걸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건축가다. 지난해 문을 입주한 서울 신청사의 원(原)설계자로 청사 외관이 ‘쓰나미를 연상시킨다’·‘옆면은 메뚜기나 사마귀 같다’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받으며 세간의 입에 오르내렸다. 건축 설계의 문제보단 서울시의 발주방식과 건설 과정에 문제가 컸음에도 불명예를 안았다.
건축계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유걸을 살아있는 한국 건축의 증인으로 꼽는다. 1940년생으로 1963년 무애 건축연구소에서 건축을 시작해 김수근 건축연구소를 거쳐 독립했고, 40여년간 건축 설계만 해왔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활동한 유걸은 1998년부터 3년 연속 미국 건축사 협회상을 수상한 유일무이한 인물이기도 하다.
유걸은 건축계에서 최고참이지만, 현재 왕성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스스로 극단적 개인주의 성향이라고 말하며, 무엇보다 동적인 공간은 넓게 트여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작업을 통해 설득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서울 신청사 외에도 40여년간의 축적된 그의 작업은 여전히 곳곳에서 빛나고 있다.
◆ 유걸의 열린 건축의 시작점, ‘강변교회’
‘넓고 트인 공간’·‘공간 전체에 가득한 빛’·‘노출된 구조체’ 등 유걸 건축의 특징은 1993년 설계가 시작된 ‘강변교회’를 시작점으로 볼 수 있다. 서울 강남구 도곡2동 459-1의 이 건물은 밖에서 보기엔 하늘로 치솟은 계단 위의 대형 십자가 정도만 눈에 띌 정도로 평범하다. 그러나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 유리로 마감된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이 예배 공간 전체를 밝히고, 장식 없는 날 것 그대로의 흰색 구조체가 건물을 지탱하는 이색적인 광경을 볼 수 있다. 어두컴컴한 내부에서 새어들어 오는 빛을 통해 경건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이전 종교 건축물과는 궤를 달리한 설계다.
유걸은 설계 당시 “빛이 예배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점은 동감하지만, 일시적인 빛의 연출이나 색유리를 통한 광선 효과는 개신교 공간의 성격과는 다르다고 봤다”며 “쾌적한 환경을 조성한다는 측면이나 만민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의 성격을 고려해 설계했다”고 말했다.
강변교회를 통해 자기 건축의 정체성을 구축한 유걸은 연이은 작품을 통해 이를 공고히 굳히는 작업을 계속했다. 전주대학 교회와 밀알학교, 밀레니엄 커뮤니티센터가 그 전형을 보여준다.
강변교회 관계자는 “본당의 천장은 불투명 창으로 햇빛이 강하지 않으면서도 내부를 밝게 해 교회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화기애애한 편”이라며 “엄숙한 분위기가 일반적인 다른 교회와는 사뭇 다르다”고 말했다.
전진삼 건축평론가는 “대부분의 교회는 예배당에 비해 친교실이 밀려 있는데, 이 교회는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 가능한 식당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신자 간의 교제를 우선했다”며 “신앙 지도 방법과 공간 배치가 잘 어우러진다”고 평했다.
◆ 국내외 건축상 휩쓴 ‘밀알학교’
서울 강남구 일원동 713번지에 있는 ‘밀알학교’는 발달 지연·장애를 겪는 아이들을 위한 교육 공간이다. 1997년 건축주인 남서울 은혜교회는 예배일을 제외한 다른 시간에 상대적으로 공간 활용도가 낮은 교회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복합적인 용도로 사용이 가능한 건물을 유걸에게 요청했다.
이 건물은 지하 2층~지상 4층 규모다. 발달 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공간을 사용함에 있어 층수가 높은 것은 제약을 가져오지만, 유걸은 이를 대형 아뜨리움(atrium·내부 안뜰)을 중심으로 한 동선 구성을 통해 건물 곳곳을 유기적으로 연결했다.
먼저 학교의 서쪽에는 건물 2층으로 직접 출입할 수 있도록 했으며, 2층부터 3~4층을 연결하는 계단은 각층에서 방향을 바꿔 3개 층을 올라가는 심리적 부담을 줄였다. 또 각 층의 교실은 복도로 열려 있고, 모든 복도가 아뜨리움을 둘러싸도록 했다. 학생들이 어디에 있어도 한 공간 속에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한 것.
유걸은 “한국의 학교환경은 시설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 극히 폐쇄적이고, 열악한 상태”라며 “학생들이 공동체 생활 속에서 교육받을 수 있었으면 했고, 창의적으로 개발된 교육 프로그램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공간적인 고민 이외에도 유걸은 진입로와 맞댄 면은 전부 유리로 마감해 학생들이 개방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으며, 색채적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전체적인 색감을 청록색으로 맞췄다.
2007년에 진행된 증축 공사 땐 은은한 색감을 내면서도 강도가 높은 폴리카보네이트 소재를 사용해 마감했다. 알루미늄 패널, 철골, 유리, 노출콘크리트, 폴리카보네이트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했음에도 이질감이 들지 않는 것이 이 건물의 특징이다.
다만 밀알학교 내부에 대해선 이견도 많다. 한 건축업계 관계자는 “밀알학교가 여러 곳에서 건축상을 받을 정도로 평가가 좋지만, 차가운 느낌의 철골·콘크리트를 그대로 드러내는 유걸의 스타일이 발달장애 학생에게 적합한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 첨단 위의 첨단, ‘드래곤 플라이 사옥’
서울 마포구 상암DMC에 올 초 들어선 게임개발업체 ‘드래곤 플라이’ 신사옥은 겉에서 보기엔 일반 오피스 건물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 대형 오피스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마치 또 하나의 도시에 들어온 느낌이 든다.
정방형의 빌딩 안에 감춰진 거대한 공간은 오피스 천장까지 이어져 하늘이 보이고, 저층부에 지그재그형 다리를 만들어 자칫 허전해 보이는 중정 공간을 활발하게 했다. 각층 복도에선 다른 층과 중정의 사람들이 보인다. 앞만 뚫린 복도와 계단으로 이어지고, 층과 층이 고립된 여느 오피스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건물 내부 1층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수천개의 벤처 회사가 서로 소통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드래곤 플라이 관계자는 “논현동 사옥에 있을 때와 사무실 분위기가 딴판이다”며 "이전에는 형광등만 가득한 공간에 갇혀있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햇빛이 들고,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을 볼 수 있어 한층 쾌적해졌다”고 말했다.
이 빌딩은 건물의 척추 역할을 하는 코어(core)를 건물 외곽으로 분산시켰다. 모니터를 오래 보는 사용자의 특성을 고려해 직사광선을 막을 수 있도록 각종 설비 등이 지나는 코어를 외곽으로 뺀 것. 건물 가장자리로 코어가 빠진대신 내부 중정을 통해 채광과 환기를 가능하게 했다. 특히 내부 중정은 빌딩 내부 공간에 채광이 잘 될 수 있도록 고도의 각도 계산으로 이뤄졌다.
유걸 건축가는 “오피스에 부드러운 빛이 스며들고 자연 환기도 가능하게 했으며, 무엇보다 내부 오피스 환경을 공간적으로 하나로 통합했다”고 말했다.
건물 내부는 공간적으로 대부분 널찍널찍하고, 시설 설비 및 콘크리트를 그대로 드러냈다. 푸른 빛을 띠는 전면 창은 채광 효과는 물론 디자인적으로 신비롭고 현대적인 느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