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수무책으로 떠나보낸 첫 환자가 콩 연구의 씨앗 됐다

조선일보
입력 2013.07.10 03:00

[CEO가 말하는 내 인생의 ○○○]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의 첫 환자

-베지밀 개발의 시초
모유나 우유 소화 못하는 장기 설사병 원인 아무도 몰라… 유학 가서 의문 풀고 연구
-내 인생을 바꾼 등사기
평양 기성의학 강습소 사환 때 등사 하던 의학 교재에 관심… 가난 벗어나려 의사의 길로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이 5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베지밀 개발 스토리를 들려주고 있다.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이 5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베지밀 개발 스토리를 들려주고 있다. /정식품 제공
"우리 형편에 무슨 서울 유학이니? 괜히 헛바람 들어서 그러지 말고 사범학교 시험 쳐서 형처럼 선생이 돼라."

서울에 가고 싶은 나의 간절한 꿈은 어머니의 한마디에 깨지고 말았다. 1929년, 내 나이 열두 살이었다.

나는 황해도 은율 산골짜기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형, 누나와 함께 밀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배고픈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사를 밥 먹듯 했고, 열 살 무렵 보통학교에 다닐 때에는 월 수업료 60전을 못 내 등교 정지까지 당했다. 어머니는 누에치기, 콩밭 매기, 품삯 일로 모질게 자식 공부를 시켰다.

나는 보통학교 졸업 후 어머니 소원대로 황해도 도립 사범학교 시험을 쳤다. 그러나 보기 좋게 낙방했다. 이듬해 치른 평양 관립 사범학교 시험에도 미끄러지고 말았다. 집에 돌아갈 염치가 없던 나는 평양에 남아 목욕탕 잡부, 모자점 사환 등을 전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등사기(謄寫機) 영업 사원이던 외사촌 형님의 소개로 평양 기성 의학 강습소 사환으로 취직했다. 당시 열다섯 살, 내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꾼 등사기와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온종일 의학 교재를 잉크로 등사하는 게 내 업무였다. 매일 3000장을 검정 잉크를 묻힌 롤러 붓으로 한 장 한 장 등사해야 했다. 처음엔 기계적으로 등사하기 바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교재 내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무슨 소린지 몰랐으나 날마다 똑같은 교재를 반복해 등사하다 보니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교재를 읽는 양도 늘어나 하루 50쪽까지 읽기도 했고 나중엔 주말에 도서관을 찾아 의학 서적을 탐독하기까지 이르렀다.

1930년대 당시 의사가 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세브란스의전 같은 의대를 졸업하거나, 의학 강습소 같은 곳을 수료하고 의사 검정고시에 합격하는 것이다.

그러던 중 한 수강생으로부터 병원이나 관련 기관에서 5년 근무 경력이 있으면 응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평양에 오기 전 황해도 송화의원에서 일한 경력에 의학 강습소 경력을 합치니 응시 자격이 됐다. 그때부터 등사기를 대하는 내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교재 한 장 한 장에 꿈과 목표를 담아 정성스레 등사하며 밤낮으로 시험 준비에 몰두했다. 오직 가난과 배고픔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 하나로 의사 시험을 준비했다. 등사기와 처음 만난 이후 4년 만인 1936년 의사 검정고시 14과목을 모두 통과해 19세 최연소 나이로 합격했다. '등사기'와 맺은 인연이 나를 의사로 만들고 서울까지 오게 한 것이다.

1937년 나는 당시 모든 의사가 근무하고 싶어 했던 명동 성모병원의 견습 의사로 새 인생의 첫걸음을 뗐다. "닥터 정!" 당시 원장이 나를 부르던 호칭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평양 목욕탕에서 "야!"로 불렸던 내가 "닥터!"라니.

그곳에서 나는 등사기만큼이나 운명적인 만남을 또 한 번 가졌다. 신의주에서 어머니 등에 업혀 온 갓난아기였다. 아기는 배가 불룩 솟아 있고 묽은 녹색 변을 계속 쏟아내는 '장기 설사병' 환자였다. 힘겹게 생명을 이어가는 아기의 고통스러운 모습에도 병원장을 포함해 의사 단 한 명도 원인을 모른 채 속수무책이었다. 아기는 결국 죽고 말았다. 죽어가는 아기를 지켜보며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하는 의사로서 무력감과 죄책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1955년 베지밀의 산실인 서울 중구 회현동 정소아과 건물을 배경으로 정재원 당시 원장이 뒷짐을 지고 서 있다.
1955년 베지밀의 산실인 서울 중구 회현동 정소아과 건물을 배경으로 정재원 당시 원장이 뒷짐을 지고 서 있다. 현재 정소아과 자리에는 정식품 서울사무소가 들어서 있다. /정식품 제공
이후로도 여러 장기 설사병 갓난아기를 무기력하게 사지로 떠나보냈고, 6·25전쟁 후 서울 회현동에서 개업한 병원에서도 똑같은 일을 겪었다. 그러니 장기 설사병의 원인에 대한 의문은 내게서 떠날 수가 없었다. 결국 해답을 찾는 방편으로 아내와 6남매를 남겨두고 43세 나이에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반년을 계획한 유학이었지만 해답을 찾지 못한 나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유학 5년째인 1964년에야 U.C.메디컬센터 도서관에서 의문을 푸는 논문과 조우했다. 신의주에서 온 첫 번째 갓난아기 환자를 만난 지 27년 만이었다.

장기 설사병의 원인은 유당 불내증이었다. 이 병은 선천적으로 유당분해효소가 없는 아이가 모유나 우유를 소화하지 못하면서 창자 점막에 염증이 생겨 구토와 설사를 반복하다 영양실조로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신의주에서 온 아기도 선천적으로 몸에 락타아제라는 유당분해효소가 없어서 엄마 젖을 먹다가 죽은 것이었다.

귀국 후 유당 불내증 치료법을 찾기 위해 밤낮없이 연구에 매달렸다. 결국 유당이 없는 영양 식품이 '콩'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콩국에 영양소를 첨가한 음식으로 병원을 찾는 장기 설사병 아기들을 살릴 수 있었다. 이것이 1966년 '베지밀'의 시초가 됐다. 이 과정에서 숱한 어려움이 많았다. 유학 기간 생활비와 학비를 대려고 아내는 빚을 얻다 병원을 빼앗기기도 했다. 베지밀 대량 생산에 필요한 기계 제작과 자본 조달의 어려움 등, 그동안 겪은 고난과 시련은 형언할 수가 없다.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 것은 어린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의료인으로서 지닌 직업적 사명과 열정,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도전 정신 덕분이었다. 환경이 어렵다고 쉽게 포기하기보다는 이를 극복하려는 열정과 패기, 돈과 인기가 아닌 직업적 사명을 갖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며 공부하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누구에게나 희망은 있다는 것을 배웠다.

인생의 끝자락에 서있는 지금 나는 인류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대체 식품으로서 두유의 이로움을 널리 알리고자 오늘도 평생 끝나지 않을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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