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오전 경남 창원시 진해구 죽곡동. STX조선해양 협력업체 10곳이 모여 있는 죽곡(竹谷)산업단지는 적막했다. STX조선 정문 앞에 있는 한 업체는 아예 공장 문을 닫았다. 10m 높이의 크레인 8개도 멈춰 섰다.

공장을 연 업체들도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라고 했다. STX조선에 선박용 액세스 해치(핸들을 돌려 여닫는 문)를 납품하는 신흥이엔지는 직원 25명 중 13명만 일하고, 12명은 무급 휴직 상태다. 최근 유동성 위기를 겪던 STX조선이 채권단과 자율 협약을 맺고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협력업체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는 것이다. 신흥이엔지 곽철민 사장은 "STX조선으로부터 4월 이후 납품 대금을 전혀 못 받았다"며 "이번 달까지 못 받으면 버틸 수 없다"고 말했다.

STX조선 협력사들 "이달 넘기기 어렵다"

LNG 선박용 각종 밸브를 만드는 태진중공업도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 업체는 이달부터 전체 생산직 근로자 60명을 2개 조로 나눠 1주일씩 교대 근무를 시키고 있다. 최태환 사장은 "개인 빚을 내서 직원 월급을 주고 있는데 이젠 한계에 다다랐다"며 "채권단이 STX조선을 살릴 의지가 있다면 협력사들이 무너지기 전에 빨리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채권단이 STX조선 회사채 상환과 운영 자금 등으로 총 9000억원의 자금 지원을 결정했지만 협력업체들은 아직도 납품 대금을 못 받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2일 경남 창원시 죽곡산업단지에 있는 STX조선해양 협력업체 신흥이엔지의 곽철민 사장이 조업이 중단되다시피 한 작업장을 지켜보고 있다. 이 회사는 STX조선해양으로부터 납품 대금을 두 달 넘게 못 받으면서 회사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해 있다.

STX조선의 전체 협력업체는 1400개에 이르고 고용 인원은 6만명이 넘는다. 한국은행 경남본부는 "STX조선과 협력업체들의 생산이 50% 줄어들면 경남도의 지역총생산(GRDP)이 1.1%포인트 감소하고, 취업자 수는 8700명 줄어들 것"이라고 추정했다. 현재 죽곡산업단지 가동률은 60% 선으로 지역 경제에 심각한 위기 상황이 닥친 것이다.

협력업체들이 휘청거리면서 창원 경제권 내 상권도 타격을 받고 있다. STX조선소에서 약 500m 거리의 고깃집 '천자마루'는 150석 가운데 이날 점심때 손님이 10명밖에 없었다. 정희숙 사장은 "장사가 너무 안 돼 직원 10명 중 3명을 내보냈다"고 말했다. STX조선과 협력사 직원들이 많이 사는 창원시 진해구 용원동의 원룸촌도 공실(空室)이 늘었다. 용원동 호호부동산 팽광덕 공인중개사는 "원룸 공실이 용원동에만 500실 정도 된다"며 "지역 경제가 말이 아니다"고 했다.

빈 공장 늘어나는 구미(龜尾)산단

같은 날 경북 구미시 공단동에 있는 구미산업단지 상황도 비슷했다. 공단 한가운데 6만5000㎡(1만9700평)에 이르는 부지가 허허벌판으로 방치돼 있었다. 이곳은 2010년까지만 해도 TV 브라운관 부품을 생산하는 한국전기초자 공장이 있었던 곳. 직원 1500명에 달하던 이 회사는 LCD TV 등장으로 브라운관 수요가 줄자 공장을 폐쇄했다. 구미상공회의소 심규정 팀장은 "한때 구미를 대표하던 한국전기초자의 폐쇄는 구미공단의 어려움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대우일렉트로닉스는 2009년에, 섬유제조업체인 방림은 올해 초 공장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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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 문을 닫은 구미산단의 대기업 공장은 총 9곳(공장 부지 157만㎡). 없어진 일자리가 9000명으로 산단 전체 일자리의 약 10%에 이른다.

창원과 구미로 대표되는 동남권 산업 벨트의 위기는 현재 한국 경제가 맞고 있는 어려움을 상징한다고 업계에선 말한다. 창원과 구미는 한국 경제 발전을 이끈 중공업과 전자산업의 요람 역할을 했다. 1973년 조성이 시작된 창원국가산업단지는 선박 엔진·자동차·발전·화학 설비 같은 중화학·기계공업을 이끌었고, 1968년 조성이 시작된 구미산업단지는 우리나라 전자산업을 대표했다.

기업들이 하나 둘 떠나면서 현재 구미 지역 경제는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작년 구미산단의 총수출액 344억달러 중에서 두 기업의 비중이 63%였다.

그나마 두 회사도 구미보다 해외와 수도권에 투자를 집중하고 있어 향후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 삼성전자는 2000년대 들어 휴대폰 제조 거점을 중국·베트남으로 이전했다. 또 LG디스플레이가 2010년 이후 구미 공장에 투자한 금액은 경기 파주 공장의 58%에 불과했다. 구미상공회의소 김용창 회장은 "대기업마저 구미산단을 외면하면서 전자산업을 일으킨 구미가 큰 위기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