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야당, 시민단체, 노조 등까지 종북 세력과 동일시했으며,이들의 제도권 진입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선거 기간에는 종북 세력 대응 활동이 야당에 불리한 여론 조성 활동으로 귀결돼 선거운동이 될 수 있었다."

국정원 정치·선거 개입 의혹 사건을 수사한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윤석열)이 지난 두 달간 수사한 뒤 내린 결론이다. 원 전 원장이 종북의 개념을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사이버 대북 심리전을 벌이던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이 북한 비판을 넘어 대선 기간 야당 후보를 비방하는 게시글까지 인터넷에 달았다는 것이다. 검찰은 심리전단 직원 70여명 중 4명을 기소유예하고 나머지는 무혐의 처리했다.

14일 오후 채동욱 검찰총장이 굳은 표정으로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사를 나서고 있다. 본지가 이날 국정원 댓글을 입수해 단독 보도하자 채 총장은 유출 경위를 밝혀내겠다며 특별 감찰을 지시했다.

국정원, '국정홍보처' 역할

검찰에 따르면 원 전 원장이 취임 내내 강조한 사항은 ▲대통령의 원활한 국정 수행을 보좌하고 지원하는 것 ▲종북 좌파 세력을 척결하는 것 등 2가지였다. 먼저 그는 세종시, 4대강 사업, 제주 해군기지, 주택 정책, 복지 문제 등 주요 국정 현안에 대해 정부 입장을 옹호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야당과 좌파 세력에 적극 대응하는 한편, 대통령의 외교·경제 성과 등을 널리 홍보할 것을 반복 지시했다. 전 직원이 열람하는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에는 "주택시장 침체 관련 분양가 상한제 도입은 지난 정부의 정책 과오에서 비롯된 것이고, 현 정부가 이를 바로잡으려 해도 야당에서 반대하고 있는 상황임을 국민들에게 정확히 알려주어야 함" "그간 정상외교 성과, 경제위기 극복 등에도 불구, 국내 정세는 야당의 무조건적인 반대 등으로 그 어떤 때보다 힘든 상황"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이에 따라 심리전단 직원들은 "이명박 해외 순방, 역대 최고" 같은 정권 홍보글을 올렸다.

검찰은 국정원 직원들이 올린 게시글 총 5333개를 찾아냈고, 이 중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비방함으로써 정치 또는 선거에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 글은 1977개라고 밝혔다.

검찰 관계자는 "정보 수집에 쓰여야 할 예산이 정권과 국책사업 홍보에 쓰였고, 이는 정치 개입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종북 좌파 제도권 진입 저지 지시

검찰은 원 전 원장이 직위를 이용해 직원들에게 선거운동을 지시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를 적용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가 간부회의 등을 통해 수시로 "선거 때 종북 좌파가 제도권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대응할 것"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검찰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그의 지시 발언에는 "지방선거도 이제 있고, 좌파들이 여기 자생적인 좌파도 아니고 북한 지령받고 움직이는 사람들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에 대한 확실한 싸움을 해서" "종북 좌파들이 40여명 여의도에 진출했는데 이 사람들은 우리나라 정체성에 대해 계속 흔들려고 할 거고, 우리 원 공격도 여러 방법으로 할 거예요" 등이 담겨 있다. 결국 원 전 원장이 제도권 정치인들 다수를 종북 좌파로 규정함으로써, 이런 인식을 국정원 직원들에게 심어주고 이와 관련한 활동을 하게 했다는 것이 검찰의 판단이다. 검찰이 선거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본 게시글은 직원들이 '오늘의 유머'나 '일간 베스트' 등에 올린 73개다. 검찰은 또 국정원 직원들의 트위터 계정에서 특정 대선 후보들에 대한 글 320개가 발견돼 미국에 사법공조를 요청해 최종 확인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향후 쟁점은

검찰은 원세훈 전 원장이 선거에 개입할 의도가 있었고, 국정원 직원들의 실행까지 나타났다고 판단했지만, 향후 선거법 위반 혐의를 입증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먼저 국정원 직원들이 게시글을 다수 올린 '오늘의 유머' 사이트는 네티즌 방문 순위(지난 5월 기준)가 231위로 매우 낮다. 일간베스트(73위), 보배드림(163위), 뽐뿌(56위) 등도 마찬가지다. '적극적인 당선·낙선에 대한 목적의식'이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또 원 전 원장이 지시를 내린 결과물을 다시 보고받는 등 지시·활동 체계의 '연결 고리'가 명확히 입증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김무겸 법무법인 로고스 변호사는 "원 전 원장의 발언은 국가 안보를 지키는 국정원장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얘기들일 수 있다"며 "이런 지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되고, 보고됐는지 입증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