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크주의' 배순훈, 화려한 부활을 꿈꾸다

입력 2013.04.06 13:59 | 수정 2013.04.06 19:18

"탱크주의 정신으로 지속가능한 미래 기술 개발하겠다"

노인은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읊조렸다.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검은색 뿔테 안경 너머 눈은 창원 기계공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원공단은 노인에게 고향과 같다. 그는 경남 창원시 성산동 소재 GM코리아 자동차공장을 세웠다. 이 땅에 전자, 기계, 자동차 산업의 씨를 뿌렸고 동료와 함께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냈다. 노인은 지난 1일 17년 만에 창원에 돌아왔다.

/사진=송병우 기자 sono@chosun.com

‘탱크주의’ 광고로 유명한 배순훈씨가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배 씨는 지난 1일 방위산업체 S&T중공업 회장에 취임했다. 1997년 말 대우전자 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기업 경영에서 손을 뗐으니 17년 만의 복귀다. 이제 칠순을 앞둔 그가 복귀한 이유가 궁금했다. “향수다. 6개월 전 창원 기계공단을 방문했다. 경제발전을 위해 이곳에서 청춘을 불살랐던 때가 그리웠다.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배 회장은 1993년 초 한국 가전사업의 표준을 제시했다. 그는 세탁기 TV 광고에 출연해 ‘탱크주의’를 내세웠다. 광고는 시쳇말로 ‘대박’이 터졌다. 그 덕에 그는 탱크박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배 회장은 K2 전차의 파워트레인 생산업체로 돌아왔다. 배 회장은 앞으로 자동화다단변속기 개발을 총괄한다. 탱크박사가 진짜 탱크를 만들게 된 것이다.

배 회장은 공학박사답게 기술개발 실태부터 꼬집는다. K2 냉각기의 불량사건을 예로 들었다. “K2는 1500 마력 전차다. 냉각시스템에 하자가 있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 신기술은 반복 실험을 거쳐 안정성에 대한 확신이 선 다음 떠들어야 한다. 신기술 개발에 성공했다고 철저한 검증 없이 발표부터 해서는 안 된다.”

그는 탱크주의가 아직도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고장 나지 않고 오래 쓰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옛날에는 일제보다 싸니까 팔렸지만 지금은 품질이 우수하고 오래 쓰니까 팔리지 않나.”

배순훈 회장은 만 39세의 나이에 대우전자 사장에 올랐다. /사진=송병우 기자 sono@chosun.com
배 회장만큼 인생 유전이 가파르고 화려한 이도 드물다. 경기고와 서울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공학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1976년 40세 청년 사업가 김우중 대우그룹 창업주를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급물살을 탄다. “김 회장은 나보다 한 수 위다. 그가 깃발을 들면 칭기스칸의 기마대처럼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배 회장은 대우엔지니어링, 대우조선 부사장을 거쳐 만 39세에 대우전자 사장에 취임했다. 대우전자 설립 초창기 단칸방에서 직원 6명과 카세트라디오를 생산하기도 했다. “1982년 카세트라디오 1000만대를 생산했다. 일본 소니 요청으로 영국 소니 공장까지 가서 품질을 봐준 적도 있다.”

배 회장은 인터뷰 내내 김 회장과 있었던 일화를 자주 꺼냈다. 김 회장은 배 회장이 보스로 인정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김 회장이 1985년 봄 느닷없이 전화를 걸었다. 당시 배 회장은 미국에 체류하고 있었다. MIT가 배 회장에게 교수직을 제의한 터였다.

배 회장이 “이 시간(새벽 2시)에 무슨 일이에요? 저 자야 해요. 내일 아침에 통화해요”라고 전화를 끓으려 했다. 김 회장은 “지금 사우디야. 여긴 낮이니깐 상관없어. GM이 한국에 자동차부품공장을 짓자고 한다. 하지 않을 거야? 디트로이트로 날아와라”고 말했다.

배 회장은 바로 미국 디트로이트에 있는 GM 본사로 날아갔다. 그 곳에서 GM 회장을 만나 공장 설립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자동차 조립공장(GM코리아 창원공장) 건설에 들어갔다. “김 회장이 350만원에 팔 거니까 자동차 만들어 오라고 하더라. 기술이 없던 탓에 일본 스즈키 엔진을 분해·연구해 대우차 엔진을 만들어냈다.”

그와 유인촌이 등장한 대우전자의 '탱크주의' 광고는 대히트를 쳤다. 배 회장은 대우전자 회장에서 물러난지 3개월만인 1998년 3월 정보통신부 장관에 취임했다. 당시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사진=송병우 기자 sono@chosun.com

김 회장이 재기할 수 있을지 묻자 배 회장은 고개를 젓는다. “못한다. 빚이 너무 많다.” 배 회장은 요즘에도 김 회장과 자주 연락한다. “두 차례 수술 받고 건강이 좋아졌다. 김 회장은 베트남에 자주 간다. 그가 반드시 귀국한다고 3명이 보증서야 출국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보증 섰다.”

얼마 전 김 회장 희수(77세) 잔치에 참석해 대우 전성기 당시 동료들을 만났다. “대우맨들이 요즘 할 일이 없어 사는게 어렵다고 투정부리자 김 회장은 ‘옛날 대우 시절 생각나지 않냐? 우리가 일이 있어서 했냐. 찾아서 만들어서 했다. 세계 곳곳에 할 일이 쌓여있다’고 말하더라.”

배 회장 인생에 있어 최대 변곡점은 1993년 봄이었다. 그는 셔츠 차림으로 자사 세탁기 광고 모델로 등장했다. 당시 최고경영자가 제품 광고에 나온 적이 없었다. 광고 모델로 나온 배 회장의 모습은 신선했다. 한 스포츠신문은 배 회장을 잘 나가는 광고 모델 1위에 선정하기도 했다. 당대 최고 인기 배우 최진실씨가 2위에 올랐다.

광고 덕에 관운까지 풀렸다. 배 회장은 대우전자 회장에서 물러난 지 3개월 만인 1998년3월 정보통신부 장관에 취임했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DJ)은 프랑스 파리에 체류하고 있는 배 회장을 장관에 임명했다.

배 회장은 장관에 취임하자마자 광대역인터넷망을 깔겠다고 나섰다. 당시 국회가 심하게 반대했다. DJ가 불쑥 물었다. “배 장관 그거 왜 깔려고 해?” 배 장관은 DJ를 설득했다. “목포 사는 고등학교 3학년이 서울 강남에 있는 고등학교의 수업을 받으려면 이걸 깔아야 한다. 정읍사는 최씨 할머니가 손수 재배한 유기농 작품을 서울 부자에게 직접 팔 수도 있다.”

당시 김종필과 조세형 전 의원이 심하게 반대했다. 그 때마다 DJ가 힘이 됐다.

DJ는 “내가 프랑스 파리에서 이 사람(배회장) 데려 왔다. 믿고 맡겨 달라”고 조 전 의원을 나무랐다. 조 의원은 꾸지람을 받고 나와 배 회장에게 “그런 이야기(자기가 반대한다는 것)를 장관이 왜 대통령한테 말하느냐”고 투덜거렸다.

배 장관은 1년 만에 한국을 인터넷 강국으로 끌어올렸다. 당시 정통부는 부처 평가에서도 1위에 올랐다. “당시 행정고시 수석합격자들은 모두 정통부에 오려했다. 공무원들과 호흡도 좋았다. 다만 부정부패가 큰 문제였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돈 받지마. 돈 필요하면 말해. 나 재벌들이랑 친해. 구해다 줄게’라고 말했다.”

장관 재직시절 박근혜 대통령과 친분을 쌓았다. 박 대통령이 배 회장 집에 오기도 했다. “1998년 버시바우 주한미국대사의 환송식을 우리 집에서 열었다. 박근혜 당시 의원은 그 자리에 참석해 내게 ‘광대역인터넷통신망’에 대해 물었다. 그때 ‘아버지는 경부고속도로를 뚫더니 딸은 정보고속도로에 관심을 보이는 구나’고 생각했다.”

업무수행 평가는 우수했으나 배 회장은 10개월 만에 장관에서 물러나야 했다. DJ 정부가 5대 재벌 ‘빅딜(사업 재조정)’을 추진하자 배 장관은 반대 의사를 밝히고 사임했다.

그 뒤 그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공학과 기술을 가르쳤다. 관운은 이곳에서도 이어졌다. 배 회장은 교내에서 5명밖에 없는 특훈교수에 서임됐다. 또 KAIST 서울부총장을 지냈다.

배 회장은 2009년 느닷없이 국립현대미술관장직에 지원했다. 공학박사에다 장관까지 지낸 사람이 미술관장 하겠다고 하니 말이 많았다. 우여곡절 끝에 배 회장은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취임했다.

취임 직전 이명박 대통령(MB)이 배 관장을 불렀다. “국회의원이나 서울시장 지낼 때 국립현대미술관의 서울관을 짓고 싶었으나 못했다. 배 관장이 이루어 달라.” MB는 서울 종로구 소격동 옛 국군기무사령부 부지 3천여평을 쓰라고 제안했다. 이에 배 회장은 “영국 테이트모던보다 크게 짓겠다. 서울관 위치는 한 해 유동인구가 1000만 명이 넘는다. 부지 8000평을 모두 쓰겠다”고 MB를 설득했다.

배 회장은 서울관 건립 사업을 ‘대통령 프로젝트’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 프로젝트를 완수하지 못했다. 공학자 출신 미술관장에 대한 미술계 반발이 컸다. “미술관장은 미술인이 맡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잡혀 있었다. 미술계 인사들은 큰 일자리 하나가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그건 맞지 않다. 하지만 구성원의 정서를 이해하고 행동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서 관뒀다.”

2011년 10월 국립현대미술관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를 마치고 배 장관은 사퇴 결심을 굳혔다. 최종원 의원이 국정감사장에서 “다리 꼬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불손하다”고 배 관장을 나무랐다.

배 회장은 억울했다. “나이 먹으면 엉덩이에 살이 없어진다. 엉덩이와 허리가 너무 아파 다리를 꼬았다. 의원들도 꼬고 앉아있었다. 나만 나무라는 게 우스웠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건 휴대전화를 넣기 위해서였다. 정회하고 위원장이 개별 면담까지 하며 주의를 주더라. (당시 국감은) 매우 권위적이고 비효율적이었다.”

배 회장은 국감이 끝나자마자 사표를 냈다. “아쉬웠다. 원하는 일을 하며 사회에 봉사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는데.” 배 회장만큼 미술에 인연이 있는 이도 드물다. 아내 신수희씨가 화가고 아들은 설치미술가다. 딸은 예술이론으로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다.

그 뒤 배순훈이라는 이름은 뉴스에서 사라졌다. 540일. 그가 대중의 관심 밖으로 사라진 기간이다. 배 회장에게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물었다. “서양문화사에 대해 관심이 많다.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3개월씩 머물었다. 주로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만났다. 프랑스 칸 소재 미술관에 들러 피카소 사진을 가장 많이 찍었다는 작가와 만나 대화를 나누는 식이었다.”

오는 30일 그는 칠순 생일을 맞는다. 배 회장은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산업 주역들이 기를 펴지 못하고 퇴물 취급당하는 것 같아 안타깝고 슬프다. 난 공학자이고 경영자다. 미래 변화상을 예측하고 그에 맞는 지속가능한 기술을 개발하겠다”고 마지막 과제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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