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 생태계, 정글만도 못해… 대기업 CEO는 창조할 능력 없다"

조선일보
  • 최현묵 기자
    입력 2013.03.22 03:06

    [백지신탁 걸림돌에 中企청장 포기…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사장 인터뷰]
    "애니콜 신화도 수많은 中小 벤처인들의 땀 모인 것"

    -중소기업의 비애
    삼성전자가 거래 끊으며 회사 문 닫을 위기 몰려
    계열사 제품 끼워 팔기에 마음에도 없는 그랜저 타
    -창조 경제 하려면
    대기업 제품 개발만 지원… R&D 예산정책 바꿔야
    朴대통령, 中企 살리려는 단호한 결의 갖고 있다

    "강자가 지배하는 정글의 법칙은 자연 질서예요.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생태계는 정글보다 못한, 그야말로 (탐욕이 판치는) 짐승들의 세계였습니다."

    21일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주성엔지니어링 본사. 황철주(黃喆周) 사장은 "공정 시장 없이는 창조 경제도 없다"면서 "호랑이 새끼도 일정 기간은 (어미 호랑이로부터) 보호를 받는데, 한국의 기업 경영 환경은 불공정이 판을 치는 '약육강식'의 세계일 뿐"이라고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은 황 사장을 지난 15일 초대 중소기업청장에 내정했었다. 하지만 황 사장은 공직자윤리법상의 '백지신탁'이란 걸림돌 때문에 사흘 만인 18일 자진해서 사퇴했다.

    박근혜 정부 초대 중소기업청장으로 내정됐다가 사흘 만에 사퇴한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사장이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에 있는 회사의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연구동 건물 앞에 섰다. 그는“창조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라며“창조와 혁신을 하기엔 조직이 너무 커서, 대기업 CEO들은 창조할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 /이명원 기자
    한국 중소기업의 굴곡을 다 겪어

    그는 우리나라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를 누구보다 절실하게 체험해 온 인물이다. 1995년 맨손으로 창업한 회사는 독자 기술력으로 삼성전자에 반도체 장비를 납품하며 2001년까지 벤처계를 대표하는 회사가 됐다. 그러나 2001년 삼성전자가 '납품 비리'를 이유로 거래 관계를 단절하면서 회사는 문 닫을 위기로 몰렸다. "누가 잘하고 누가 못했는지 따지고 싶지 않아요. 당시 국세청에서 회사의 모든 서류를 가져가다시피 하며 철저히 뒤졌어요. 내가 감옥에 가지 않은 걸로 결백이 입증된 것 아닐까요?"

    황 사장은 "너무 뜨다 보니 재벌들이 '머슴 주제에 너무 컸다'고 생각한 것 같기도 하다"고 털어놨다. "당시 거래처였던 현대전자를 방문할 땐 회사 정문 1㎞ 앞에서 차에서 내려 걸어갈 정도로 몸을 낮추려고 했어요."

    당시 그는 현대차의 최고급 승용차인 그랜저를 타고 다녔다. 좋은 차를 타고 싶어서가 아니라 당시 재벌들의 관행인 '계열사 제품 끼워 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샀던 차였다.

    그는 "거래처인 현대전자가 그랜저 등 현대차 10대를 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정가대로 산 뒤 직원들에게 반값에 팔았다"며 "삼성전자에선 계열사가 카드회사를 설립했다며 카드를 쓰라고 해서 그 카드만 썼다"고 말했다.

    삼성의 눈 밖에 나자 회사는 지탱하기 어려웠다. 2003년 해외 반도체 업체 임원을 지낸 외국인을 사장으로 영입하고, 삼성과 관계 회복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황 사장은 "나 하나 물러나면 회사는 살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외국인 CEO도 영입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며 "결국 회사를 팔기로 결심했었다"고 했다.

    2004년 삼성전자와 일본의 DNS가 합작 설립한 한국DNS는 주성엔지니어링의 주력 제품인 CVD(화학 증착 장비)를 양산(量産)하기로 했다. 황 사장은 "2001년 삼성전자가 납품 비리 감사를 나와서 우리 회사의 모든 걸 가져갔었다"며 "당시엔 감사를 잘 받으면 다시 거래가 될 거란 생각에 받아들였었다"고 말했다.

    대기업의 납품 단가 후려치기 관행에 대해서도 황 사장은 "당시엔 다 그랬지만 이미 오래전 일"이라며 말을 아꼈다. 다만 그는 "오늘날의 삼성을 만든 '애니콜 신화'도 삼성의 힘으로 이룬 게 아니다"라며 "삼성이 휴대전화 사업을 접은 뒤 1990년대 말 테헤란 밸리의 수많은 벤처기업인이 휴대전화 기술을 세계 수준으로 발전시켰고, 삼성은 이들을 흡수해 애니콜을 만든 것"이라고 했다.

    황 사장은 2001년 회사 매각을 위해 미국·일본·유럽 등 전 세계를 돌았다. 그는 "당시 회사 현금 보유액이 1000억원이었는데 외국 업체들이 '1달러에 팔면 사겠다'고 하더라"며 "피눈물이 났다"고 했다. 회사로 돌아온 황 사장은 제일 먼저 공장 외벽에 가로·세로 10m가 넘는 대형 태극기를 부착했다. "미국 사막을 달리다 주유소에 걸린 성조기를 보고 왠지 뭉클했던 적이 있었어요. 회사로 돌아와 직원들에게 그간의 사정을 솔직하게 얘기한 뒤 '태극기를 보며 다시 시작하자. 세계 1등 제품만 만들자'고 다짐했습니다."

    “대기업 CEO는 창조 능력 절대 없다”

    황 사장은 삼성과 청와대로 대표되는 한국의 경제·정치 권력의 최정점을 몸으로 체험한 흔치 않은 경력을 가졌다. “창조는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것으로 중간 간부가 아닌 최고경영자(CEO)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기업 CEO들은 창조할 능력이 절대 없어요. CEO가 직접 창조와 혁신을 하기엔 조직이 너무 거대해졌거든요.”

    황 사장은 ‘창조 경제’를 위해선 “정부의 연구·개발(R&D) 정책을 고쳐야 한다”고 했다. “그간 정부의 R&D 예산은 대기업들을 위한 제품 개발에만 쓰였어요. 정부 예산은 스스로 연구·개발할 능력이 없는 농업 등의 분야에 집중돼야 해요.”

    그는 또 “연구·개발 지원 단계에서부터 기술 개발뿐 아니라 제품의 글로벌 마케팅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며 “지금까지의 정책이 내수 지향적이다 보니 중소 벤처기업들은 대기업에 갖다바칠 연구에만 몰두했고, 이는 중소기업들을 대기업의 ‘머슴’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박 대통령, 중기 정책에 단호한 결의 가져”

    황 사장이 중기청장이 됐다면 중소벤처기업의 신제품에 대한 정부의 인증 기간은 대폭 단축됐을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 중소 벤처기업들이 신제품 인허가를 받는 동안 미국·일본·유럽 기업들은 그 제품을 먼저 시장에 내놓는다”며 “정부는 신제품을 선(先)인가한 뒤 사후적으로 문제점을 관리하는 정책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박 대통령과 3년 전부터 분기에 한 번씩 만나 중소기업 정책에 대해 조언을 해온 그는 “박 대통령은 중소기업을 살리기 위한 국정 운영에 대해 단호한 결의를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역시 박근혜 정부의 중소기업 정책이 성공할지는 장담하지 못했다. “대통령 혼자서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거든요. 주변에 중소기업을 잘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백지신탁(blind trust)

    고위 공직에 임명된 사람은 3000만원 이상의 직무 관련 주식을 금융기관에 백지신탁하고, 수탁기관이 60일 이내에 주식을 모두 처분하도록 한 제도다. 공직자가 직위를 이용해 자기가 보유한 주식이나 채권 가격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책 입안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다. 공직자윤리법에 규정돼 있다.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사장이 중기청장 내정 사흘 만에 "회사를 포기할 수 없다"며 자진 사퇴한 배경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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