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문제에 대해 침묵해왔던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20일 '환율전쟁'의 진앙지인 일본의 엔저 현상과 관련, 환율에 대해 선제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힘에 따라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채권거래세, 외환거래세 등 한국형 토빈세 도입에 힘이 실리게 됐다.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 내정자도 토빈세 도입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이다.
이에 따라 엔화 값을 떨어뜨려 경기 부양을 도모하는 '아베노믹스'에 대한 새 정부의 대응이 본격화되는 게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엔화 값에 비해 원화 값이 올라가면 수출 기업의 채산성 등 경쟁력이 크게 약화된다.
박 당선인은 이날 한국무역협회ㆍ한국경영자총연합회 회장단을 만난 자리에서 "환율 안정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매우 잘 안다"며 "우리 기업들이 손해 보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효과적으로 대응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박 당선인이 공개적으로 환율 문제를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도 이날 환율에 대해 같은 목소리를 냈다. 김 총재는 이날 경제동향간담회에서 한 참석자가 세계적 환율전쟁에 대해 우려하자 "시장의 기본 펀더멘털에 의해 환율이 결정되는 건 맞지만 투기 목적에 의해 변동성이 확대되는 경우가 있다"며 "(외환시장에서)투기적 목적의 변동성 확대는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고 밝혔다.
박 당선인과 김 총재의 발언으로 새 정부에서 급격한 자본 유출입과 환율 변동성 확대를 막기 위한 제도 도입 방안이 힘을 받게 됐다. 정부는 이미 지난달 30일 금융연구원 주최 세미나에서 "중장기 대책으로 (한국형 토빈세라 할 수 있는) 외환거래세와 채권거래세라는 제도적 기반 마련이 필요하다"고 공식 발표했었다.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 내정자는 일찌감치 토빈세와 같이 국경 간 금융거래 비용을 높이자는 주장을 해왔다. 조 내정자는 지난해 10월18일 매일경제신문 기고에서 "우리 금융당국은 선물환 규제와 함께 거시건전성부담금 등의 제도를 시행하고는 있지만, 외부 충격에 의한 급작스런 자본 유출입에 대한 대비책으로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평시에는 낮은 세율, 위기시에는 높은 세율'을 부과하는 2단계의 토빈세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국제적으로도 급격한 자본 유출입을 규제해야 한다는 쪽으로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지난 15~16일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ㆍ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는 공동선언문에서 "자본 흐름의 과도한 변동성과 환율의 무질서한 움직임은 경제와 금융안정에 부정적 영향을 유발한다는 것을 재확인한다"고 밝혔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지난해 12월 "완전한 자본자유화가 항상 모든 국가에 바람직한 것은 아니며, 필요할 때 거시경제 및 금융시스템 안정을 위해 자본이동 관리 정책 도입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입장을 정했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벨기에 포르투갈 그리스 등 EU 11개국은 올해 1월22일 금융거래세를 각국이 별도로 도입하는 내용을 승인해 내년부터 시행에 들어간다.
채권거래세는 채권 매입 또는 매도시 거래대금에 일정 세율의 거래세를 부과하는 것으로 외국인과 내국인이 국내 채권시장에서 거래하는 시점에 부과한다. 외환거래세는 국내에 유입된 해외자본이 국내 금융시장에 투자되기 전에 국내 외환시장에서 거래세를 부과하는 것이다. 최종구 기획재정부 차관보는 지난달 30일 세미나에서 "원래 의미의 토빈세를 그대로 도입하는 것은 어렵지만 우리나라 사정에 맞는 방식으로 다양한 외환 거래 과세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었다. 조세연구원은 조원동 경제수석 내정자가 원장으로 있던 지난해 말, 외환시장에 대해 금융기관 거래로 한정해 평소에는 영(0)세율을, 비상시에는 높은 세율을 적용하는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한편 미 달러화 대비 엔화의 가치는 일본 정부의 고(高)환율 정책의 영향으로 지난해 10% 떨어진데 이어 올들어서도 10%가량 추가 하락했다. 미 달러화 대비 엔화 환율은 연초 86엔에서 지난 12일 94.4엔까지 치솟은 후 20일 현재 93엔 선에서 거래를 이어가고 있다. 원고·엔저 현상이 이어지면서 지난해 20%나 하락한 원·엔 환율은 연초 1228원에서 지난 18일 1147원까지 하락한 후 20일 현재 1155원선에서 거래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