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넓은 김제평야에 우리 집은 왜 땅 한 평 없는 걸까?' 극빈의 소작농 아버지를 보며 소년은 땅 가진 농부가 부러웠다. 고교에 진학할 형편이 안됐다. 학비가 무료인 옛 국립철도고(서울 용산 소재)를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갓 스물에 역무원이 됐고, 월급으로 먹는 문제는 해결됐지만 간절하게 대학이란 곳을 가고 싶었다. 낮엔 정비창에서 역무원들의 무전기를 고치고 밤엔 종로의 입시학원에 다녔다.
학원에서 그는 물리 강의에 흠뻑 빠졌다. 진로는 물리학도로 정해졌다. 폐결핵이 괴롭혔지만 그는 입시 공부에 매진, 1976년 전북대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36년이 지난 8일. 그때의 그 소년은 10년간 한 해 100억원씩의 천문학적 연구비를 지원받는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돼 있었다. 그는 50명의 기초과학연구원 연구단장 중 한 명이 된 성균관대 이영희(57) 교수(물리학)다.
이 교수는 탄소나노튜브와 그래핀으로 신물질을 만드는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 업적을 쌓아 왔다. 특히 탄소나노튜브 분야에서 서울대 임지순 교수(물리학과)와 함께 국내 연구 수준을 세계적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두 석학 중 국가석학(현재 국가과학자의 전신)에 먼저 오른 쪽도 이영희 교수였다.
1991년 일본 NEC의 이지마 박사가 처음 발견한 탄소나노튜브는 획기적인 물성 덕분에 전 세계 과학계와 정부간에 연구 붐이 일었다. 그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1999년 삼성전자와 함께 탄소나노튜브로 세계 최초의 평판 디스플레이를 만들었다. '탄소나노튜브의 응용 가능성'을 실증한 이 논문은 지금까지 1000회 이상 인용됐다. 2002년엔 수소 원자를 이용해 금속성 탄소나노튜브를 반도체성으로 바꾸는 기술을 역시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탄소나노튜브는 합성할 때 쓸모 적은 금속성과 쓸모가 큰 반도체성의 두 가지가 동시에 만들어져 골치였다. 그 난제를 이 교수가 풀어낸 것이다.
하지만 탄소나노튜브 학계에 학문적인 위기라 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 2004년이었다. 러시아 출신 안드레 가임과 노보셀로프가 흑연 덩어리에 유리테이프를 붙였다 떼내는 방법으로 그래핀을 분리한 것. 그래핀은 물성면에서 탄소나노튜브보다 탁월한 점이 많았다. 발견 6년 만인 2010년 발견자들에게 노벨상이 주어졌다. 탄소나노튜브 연구자들로서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된 셈. 이 교수는 "어느 물질이 낫느냐를 따지는 것은 '수퍼맨이 세냐, 스파이더맨이 세냐'를 따지는 격"이라고 말했다. 응용 단계에선 장단점이 다르기 때문에 둘 모두를 활용해 더 좋은 물질을 만들면 될 뿐이라는 것. 그는 발 빠르게 시너지 연구로 나아갔고, 지난해 탄소나노튜브와 그래핀을 사용해 투명하면서 휘어지는 트랜지스터와 메모리 소자를 개발했다. 올해엔 수십억원 하는 전자현미경으로도 관찰이 어려운 그래핀 표면을 값싼 광학현미경으로 관찰, 그래핀 합성 공정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기술을 과학 저널 '네이처'에 발표했다.
연구단장으로서 목표는 탄소나노튜브와 그래핀을 동시에 활용해 신 소재를 만드는 '하이브리드' 기술이다. 2020년에는 532조원 규모로 커질 나노 소재 시장을 공략할 원천 기술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예컨대 공장 굴뚝에 발라놓으면 방출되는 열과 쏟아지는 햇볕을 동시에 전기로 바꿔주는 물질이다. 투명하고 얇은 그래핀으로 만든 전극을 뇌에 심어 혈류를 관찰하고 간질을 치료하는 것과 같은 새 의학 기술도 개발할 계획이다.
그는 전북대를 나와 미국 켄트주립대에서 고체물리로 단 4년 만에 석·박사를 마쳤다. 32세에 모교에 부임했지만 2001년 파격적인 조건으로 성균관대에 스카우트됐다. 그는 대학 때부터 콧수염으로 유명했다. '매일 손보기가 귀찮다'는 이유였다. 대학 시절 "학생이 왜 수염을 기르고 다니느냐"며 당시 총장으로부터 주의를 받았지만 끄덕하지 않았다.
이 교수팀은 연구원 중 40%는 외국인이다. 미국, 베트남, 중국, 유럽 등으로 다양하다. "창의성은 다양성에서 나옵니다."자신이 이끌 연구단에도 1~2개 분야는 외국인 학자에게 팀장을 맡길 계획이다. "지금까지는 선진국에서 발견한 물리현상을 푸는 수준이었다면 앞으로는 새로운 개념을 세계 학계에 제시하는 연구를 하겠습니다."
☞탄소나노튜브와 그래핀
탄소 원자들이 머리카락 10만분의 1 굵기의 관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탄소나노튜브, 탄소 원자 한 층으로 구성된 판(板) 형태 물질이 그래핀이다. 두 물질 모두 나노(10억분의 1m) 수준의 물질이지만 지구상 어떤 물질보다 강하면서 열·전기 전도성이 높은 데다 투명하고 마음대로 구부러지는 성질을 가졌다. 초고성능 반도체와 수소자동차용 에너지 저장, 투명전극, 연료전지, 고강도 복합 소재 등 그 용도가 무궁무진하다. 평면 구조인 그래핀은 나노튜브에 비해 디스플레이 제작에 더 적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