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

요즘 정치권에서 복지를 확대하라는 요구가 분출하고 있다. 경제 양극화가 날로 심화되는 사회 현상을 반영한 것이지만, 그 배경엔 우리나라 정부 재정이 선진국에 비해 탄탄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정부 곳간이 여유가 있으니 복지 지출을 좀 더 늘려도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한국의 재정 여건은 외형적으로 보면 '명품 재정'이다. 한국의 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은 2011년에 35.1%에 불과한데, 선진국들과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최우수' 수준에 해당한다. 200%가 넘는 일본은 차치하고라도 100% 안팎인 미국, 영국, 프랑스보다 훨씬 낮고, 깐깐하기로 유명한 독일(87%)보다도 건전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이 103.0%인 데 비하면 한국은 그야말로 재정 청정 국가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정부 추정에 따르면 한국의 국가 채무 비율은 갈수록 떨어질 전망이다. 2011년에 35.1%를 기록했지만, 2012년에는 33.3%로 낮아질 전망이며, 이후에도 계속 하락해 2015년에는 27.9%로 크게 떨어질 전망이다.

하지만, 이렇게 지표상으로 나타나는 국가 채무 수준은 매우 양호한 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재정 상태에 대한 우려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공식적인 국가 채무에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장차 재정 건전성을 해칠 수 있는 다양한 불안 요인이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공공기관, 특히 공기업의 재정 부실이 심화되고 있는 점이다. 공공기관 부채는 공식적인 국가 채무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이 때문에 정부가 재정으로 해결할 일을 공기업에 떠넘기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공기업은 안으로 곪아가고 있다. 공공기관이 부실화되면 최종적으로 세금으로 메워야 하기 때문에 결국 국가 부채가 될 수밖에 없다.

①공공기관 부채가 정부 부채보다 많아

그렇다면 공공기관 부채는 얼마나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을까? 정부에 따르면 2011년 말 현재 463조원을 넘어 전년에 비해 15.4%가 증가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에 약 249조원이던 것이 그동안 연평균 16.8%씩 늘어나 거의 2배 수준이 되었다.

그 결과 공공기관 부채는 국가 채무 435조5000억원을 능가했다. 만일 공공기관 부채를 국가 채무에 포함할 경우 GDP에서 차지하는 국가 채무 비율은 70%에 육박하게 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중장기적인 재무 분석이 가능한 주요 18개 공기업 가운데 67%에 달하는 12개 공기업은 현재의 경영 상태가 지속될 경우 파산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불행히도 공공기관 부채 통계는 국가마다 기준이 다르고 통계가 제대로 공표되지 않아 국제 비교가 어렵다. 하지만 한국처럼 공공기관 부채가 많고, 빠르게 늘어나는 경우가 드문 현상임은 분명하다.

②준정부기관 부채가 가장 빨리 증가

이른바 준(準)정부기관 부채는 더욱 문제가 심각하다. 정부가 지정한 공공기관은 2012년 6월 말 현재 총 288개인데, 이 중 준정부기관이 83개이고, 28개가 공기업으로 지정되었다. 준정부기관이란 공무원연금공단이나 예금보험공사처럼 공공기관 중에서 특히 공공성이 강조되는 기관들을 말한다. 또 공기업은 한국전력이나 가스공사, 수자원공사처럼 민간과 경쟁하는 시장성이 상대적으로 강한 기관을 말한다. 나머지 기관들은 기타 공공기관이라고 하며, 경영 공시만 하면 될 정도로 정부 규제가 약하다. 준정부기관 부채는 2008년만 해도 80조원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2010년에 100조원대로 불어나고, 2011년에는 124조9000억원으로 전년에 비해 24.0% 급증했다. 공공기관 총 부채 증가율보다 훨씬 빠른 증가 속도이다.

③정부 사업 대행하면서 곪아가는 공기업

공기업 부채 역시 지속적으로 늘어나 공공기관 부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공기업의 2011년 총 부채는 329조5000억원으로 전체 공공기관 부채의 71%를 차지하고 있다. 2007년 이후 연평균 증가율도 20.4%로 전체 증가율을 크게 앞선다.

국내 공기업은 정부의 가격 지도나 정부 사업 대행 등과 같은 공공성 위주의 다양한 사업을 수행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시장 논리와 무관하게 정부의 궂은 일을 떠맡아 처리하다 보니 부채가 급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수자원공사는 예전에 건실한 공공기관으로 꼽혔지만, 4대강 사업을 대행하면서 부채가 급증했고, 토지주택공사(LH)는 보금자리 주택이라 불리는 서민주택 사업을 벌이는 바람에 부채가 급증했다.

또 정부가 물가 안정을 위해 통행료와 전기요금 인상을 억제하다 보니 해당 요금을 수입원으로 하는 도로공사나 전력공사의 부채가 급증하고 있다. 장차 이런 기관들이 부실화돼 파산 지경에 이르게 되면 국민 세금의 투입이 불가피하다.

④자회사 지급 보증도 늘어

공공기관이 자회사에 지급 보증을 서는 등의 이유로 인한 우발채무(장차 부실화될 가능성이 있는 채무) 규모도 급속히 늘고 있다. 작년 말 현재 공공기관의 자회사 등에 대한 지급 보증액은 총 8조7000억원으로 2010년 4조5000억원에 비해 90% 이상 늘어났다.

특히 해외 자원 개발이나 에너지사업과 관련된 지급 보증이 급증해 2010년에는 1조6000억원 수준이었지만 2011년에는 3조8000억원에 달한다. 자회사에 대한 과도한 지급 보증이 모회사의 위험을 키우는 것은 물론이다.

⑤자산보다 부채 증가 속도가 더 빨라

부채가 늘어도 자산이 충분하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자산보다 부채가 더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는 점이다. 공공기관의 자산은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연평균 10.3% 늘어난 반면, 부채는 16.8% 증가했다. 2011년의 경우 자산은 전년 대비 8.4%가 증가했으나, 부채는 15.4%가 늘어 증가 속도가 2배 가까이 빨랐다. 수익성도 악화해 당기 순이익이 2010년엔 4조2000억원 흑자이던 것이 2011년에는 8조4000억원 손실로 전환했다.

자산보다 부채가 더 빨리 불어나는 상황 속에서 경기는 악화되고 투자 손실은 커져 수익성이 계속 악화된다면 향후 공공기관의 부실이 더욱 심화될 수 있다. 공기업의 재정 악화는 국제신용평가 기관들의 신용등급 강등 요인으로 작용하고 자금 조달 비용을 상승시켜 재정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악순환 고리를 형성시킬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