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김포시 한강신도시 내 A아파트. 지난해 10월부터 입주를 시작했는데 8개월이 지난 지금도 전체 1058세대 중 400세대가량만 들어와 살고 있다. 기자가 찾아간 26일 낮, 단지 안은 인적이 거의 없어 황량한 느낌을 주었다. 100세대 넘게 미분양 상태인 데다, 500여세대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입주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소송을 낸 계약자들은 건설사를 상대로 분양계약을 취소하라는 소송을, 집단대출을 해준 우리은행을 상대로는 중도금을 갚지 않겠다는 채무 부존재(債務不存在) 소송을 냈다. 이들은 "시세가 분양가 아래로 떨어져 발생한 손해를 계약자들이 전부 떠안을 수는 없다"며 중도금을 연체하고 있다. 이 단지는 131㎡짜리가 4억1300만원, 156㎡가 5억300만원에 분양됐지만 시세가 급락해 15%가량 낮은 가격을 불러도 사려는 사람이 없다.
◇집단대출, 주택대출 부실 새 뇌관
부동산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아파트 집단대출이 은행업계의 시한폭탄으로 부상하고 있다. 집단대출은 건설사가 지급보증을 서고 은행이 아파트를 분양받는 사람들에게 일괄적으로 중도금·잔금을 대출해 주는 것이다. 집단대출이 연체되면 아파트 분양을 둘러싼 3대 주체인 건설사·은행·계약자가 모두 타격을 입는다. 현재 전국적으로 집단대출은 102조원에 달해, 가계대출의 23%, 주택담보대출의 33%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집단대출의 연체율이 가파르게 오르고 있어 화약고가 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 4월 기준으로 연체율이 1.56%에 달해 사상 최고치에 도달했다. 금액으로는 1조6000억원가량이 연체되고 있다. 2009년까지는 연체율이 쭉 0.4%였는데, 3년 만에 연체율이 4배에 육박했다.
분쟁의 씨앗은 아파트 가격 하락이다. 한국은행은 지난 4월 집단대출을 받은 아파트 단지의 91%가 주변시세보다 분양가가 높다고 밝혔다. 아파트에 입주하기도 전에 계약자들이 손해를 보게 되면서 A아파트와 같은 다툼이 벌어지는 단지들이 속출하고 있다.
분쟁이 벌어진 아파트 단지는 전국적으로 94곳에 달한다. 경기(57곳), 인천(20곳), 서울(6곳) 등 수도권 지역이 83곳으로 88%를 차지하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인 BOA메릴린치는 최근 국내 가계 집단대출이 수도권에 집중돼 있어 이 지역의 부동산 가격이 추가하락할 가능성을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파트 건설사들이 경영난을 겪는 것도 집단대출 분쟁을 키우는 요인이다. 건설사들이 중도금 이자를 계약자 대신 부담하겠다고 했다가 감당하지 못하고 고꾸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집단대출을 받은 단지 중 48%를 신용등급이 투자부적격(BB+등급 이하)인 비우량 건설사가 지었고, 연체가 생긴 집단대출의 96%가 이런 비우량 건설사가 짓는 단지에서 발생하고 있다.
◇개인파산 사태 우려
집단대출이 금융시장의 근간을 흔들 만큼 위험하지는 않다는 반론도 있다. 일본계 투자은행인 노무라는 26일 낸 보고서에서 집단대출 중 3분의 2가 이미 입주가 끝나 은행이 아파트를 담보로 잡고 있는 잔금 대출이고, 시행사나 주택금융공사가 보증하는 대출 비율이 4분의 3에 달해 연체율이 상승하더라도 은행이 타격을 받을 가능성은 작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개인은 사정이 다르다. 자칫하면 회생이 어려울 정도의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집단대출 분쟁지역 94곳 중 소송까지 벌어진 곳은 A아파트를 포함해 28곳인데, 소송 규모를 합하면 5000억원대에 이른다.
A아파트의 경우 우리은행에서는 연 4%대 금리로 중도금을 빌려줬지만 소송을 낸 계약자들은 대출금 갚기를 거부하고 있어 연 7%대의 연체이자율이 적용되고 있다. 건설사 관계자는 "소송 가구마다 매달 300~500만원씩 이자와 연체료가 쌓이고 있지만 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채무부존재 소송을 내면 소송이 진행되는 도중에는 중도금을 연체해도 신용상 손해를 입지 않는다. 하지만 패소 판결이 확정되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연체 시점으로 소급해서 연체 이자를 모두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형로펌 소속의 한 변호사는 "은행이 승소하면 유사 소송 재발을 막기 위해 끝까지 채무를 추징할 것으로 예상돼 개인파산에 이르는 분양자들이 속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법조계에서는 "거주가 불가능할 정도의 하자가 없는 이상 스스로 서명한 계약을 무효로 돌리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은 편이다.
A아파트 단지 근처의 한 부동산중개업소 대표는 "패소 가능성을 염두에 둔 일부 계약자들이 분양권을 팔려고 애쓰지만 사려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은 아파트 집단 소송이 '폭탄'이 되어 되돌아올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각 은행이 소송의 위험성을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안내하도록 조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