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여는 여성 임원] 80년 장수기업 이미지에 '젊은 품격'을 불어넣다

조선일보
  • 김남인 기자
    입력 2012.02.24 03:17

    [이보영 신세계 상무] 남성 모델 내세운 파격 광고… 백화점 업계 상식 뒤집어
    "같은 물건 비슷한 값에 파는 他 백화점과 차별화하려면 고유의 브랜드로 승부해야"

    글로벌 기업은 여성 리더들을 통해 기업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미국 포천 선정 500대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14%, 여성 CEO 비율은 3.6%다.

    한국 상황은 다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23일 국내 기업(직원 1000명 이상 규모)에서 여성 임원이 차지하는 비율은 6.2%라는 분석 보고서를 냈다. 여성 인력은 대기업 직원의 40%를 차지하지만 현재 조직의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이들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여성 임원의 증가는 필연적이다. 1990년대 대기업 공채로 들어간 여성들이 드디어 임원 후보군으로 진입했다. 이들보다 먼저 능력을 인정받아 활동하는 국내 여성 임원들을 차례로 소개한다.

    올 3월부터 잡지와 카탈로그에 담길 신세계백화점 사진 광고는 파격적이다. 영국 배우 이완 맥그리거의 무표정한 얼굴에 단 두 단어가 박혀있다. 'only Shinsegae(오직 신세계)'.

    그동안 백화점 광고에는 공식이 두 개 존재했다. 웃고 있는 여성 사진을 쓸 것, 핵심 할인 정보를 집어넣을 것. 그걸 모두 뒤집은 이가 신세계의 브랜드 전략을 총괄하는 이보영(42) 상무다.

    "사람들은 이제 치마 휘날리며 백화점 가는 여성이 아니라 맥그리거처럼 애쓰지 않아도 시크(chic·세련됐다는 뜻)한 스타일에 열광하죠. 우린 '신세계에서 쇼핑하면 당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겁니다. 단순하고 강렬하게."

    22일 서울 논현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신세계백화점 이보영 상무는 “한국에 여성 임원이 너무 없어 깜짝 놀랐다”면서 “국내 기업에서 여성 인력이 전체의 절반에 이르는 만큼 이제 기업들도 적극적으로 여성 리더를 발굴해 키워야 한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2010년 말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 주도로 이보영 상무를 영입했을 때 업계는 '의심 반, 놀라움 반'의 눈길로 쳐다봤다. 이 상무는 국내에 알려진 게 거의 없는 인물이었다. 미국의 명문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과 영국의 왕립예술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뉴욕에서 유명 브랜드 로레알·에스까다·씨어리의 아트디렉터와 디자인 총괄 매니저로 일했다.

    이 상무가 영입되기 전 국내 백화점 업계는 성장 정체기를 맞고 있었다. 젊은 유통 채널인 온라인몰·모바일쇼핑·홈쇼핑이 뒤를 바짝 따라붙었고, 백화점끼리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었다. 2007년 글로벌 금융 위기 여파로 소비자들은 씀씀이가 줄었다. 80년 역사의 신세계는 활로를 '브랜드 파워 증강'에서 찾기로 하고, 글로벌 기업의 전쟁터 뉴욕의 현장을 구르던 '디자인통(通)' 이보영 상무를 영입한 것이다.

    "스티브 잡스 덕분이에요. 잡스 덕에 이제 기업들은 창의적인 디자인이 소비자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꿔놓는다는 걸 알고 제품 개발서부터 디자이너를 참여시킵니다. 뉴욕의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기업들의 러브콜이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저는 신세계와 인연이 닿았고요."

    보수적인 유통업계에서 국내 기업 경험이 전무(全無)한 젊은 여자 디자이너의 등장은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영입 2년도 안 돼 80년 장수 기업 신세계에 '젊은 품격'이라는 브랜드 정체성을 안기며 업계 변화를 이끌고 있다. 각종 할인 정보를 넣기 급급했던 백화점 광고가 최근 1년간 핵심 이미지만 담아 나오게 된 것도 이 상무가 처음 시도해 경쟁사들이 따라온 경우다. 지난해 신세계 강남점에 오픈해 남성 쇼핑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는 '남성 전용 쇼핑관'의 디자인·광고도 이보영 상무가 총괄했다.

    세계에서 몸값이 가장 비싼 아티스트 제프 쿤스를 데려와 아트 마케팅을 벌인 것도 이 상무다. '건실한 장수 기업' 이미지로는 변덕스러운 소비자 마음을 잡기 힘들었다.

    짧은 시간에 '젊고 시대를 앞서가는 신세계' 이미지를 창조하기 위해 이 상무는 제프 쿤스를 초청했고, 그의 작품 '세이크리드 하트(sacred heart·300억원 추정)'를 매장 인테리어와 광고에 활용한 마케팅을 벌였다. "어차피 백화점은 같은 물건을 비슷한 가격에 파는 겁니다. 그 경쟁에서 돋보이고 싶다면 이제는 고유 브랜드로 승부해야 합니다."

    인터뷰가 있던 22일, 이 상무는 서울 논현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봄 미나리와 여성 신발에 파묻혀 카탈로그 사진 작업을 하고 있었다. "쿤스나 맥그리거만 내세운다고 브랜드 정체성이 확립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백화점 안에 들어설 때의 냄새, 카탈로그 사진 한 장, 물건 진열 방식 모두에서 일관된 스타일이 드러나야 하죠. 제가 사무실 안에 우아하게 앉아있을 수만은 없는 이유고요."

    그는 신세계에서 손영선 패션연구소장(상무보)을 제외한 유일한 여성 임원이다. 뉴욕에서 수많은 여성 임원을 보다가 처음 신세계 간부회의에 참석하고선 압도적인 남자 숫자에 놀랐다고 한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아들과 4세 딸을 키우고 있는 직장맘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애 엄마들이 '지속 가능한 직장 생활'을 하기란 힘든 것 같아요. 미국에서는 전문 교육을 받은 보육 도우미도 많고, 학교도 엄마들이 걱정할 필요 없게끔 아이들을 돌봐줍니다. 한국 학교는 무슨 일만 생기면 엄마들한테 전화해서 '빨리 오셔야겠습니다' 해요. 한국 여성의 실력과 감각은 뉴욕 못지않고, 여성들의 구매력도 커지고 있습니다. 기업들이 이제 여성 인력을 적극적으로 키워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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