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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사 1일체험]③ 증권사, RA생활 3개월이면 엑셀의 달인

  • 유한빛 기자

  • 입력 : 2012.01.21 10:30

    여의도의 증권사 건물들
    전면 유리로 된 창 밖으로 고층 건물들이 보인다.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고, 신문과 보고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책상 앞에 앉는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며 파이낸셜타임즈를 펼친다. 기업 자료와 증시 상황을 살펴보면서 주가에 대해 분석한다.

    증권사 애널리스트(analyst)의 일과가 이렇게 우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꿈 깨시라.

    해도 채 뜨지 않은 오전 5시 반쯤 옷깃을 여미고 여의도로 출근해, 온 종일 숫자, 전화통화, 세미나, 기업보고서와 씨름하다 어두컴컴한 밤 10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게 일상이다. 물론 집이 여의도나 그 근처라면 집을 나서는 시간이 늦춰지겠다.

    하루 업무시간은 밥 먹는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도 12시간이 넘는다. 주 5일제는 증권사에서도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다행스럽게도 토요일이나 일요일 중 어느 요일에 일할지 고를 선택권은 있다. 자산운용사와 투자자문사 등 고객에게 보낼 보고서를 작성하는 게 중요한 주말 업무이기 때문에, 일요일에 출근하는 경우가 많다.

    1일 체험을 위해 찾아간 HMC투자증권 리서치센터의 직원들은 6시 반에서 7시 사이에 회사에 도착한다. 기자의 역할은 RA였다. 넘겨짚지 마시길. 리서치 애널리스트(research analyst)가 아니라 리서치 어시스턴트(assistant·조수)의 준말이다. 애널리스트는 증권사 리서치센터에서 근무하는 연구원을 통칭하는 용어. 기업을 분석하고, 목표 주가와 투자평가를 제공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 2년가량의 RA 기간을 거쳐야 한다.

    제일 먼저 할 일은 매일 아침 열리는 회의, ‘모닝 미팅(Morning meeting)을 준비하는 것. 이때 증권사의 애널리스트와 판매를 담당하는 법인부 직원들이 모여 전날 증시와 국내외 경제 상황에 대한 분석 내용을 점검하고, 그날의 시장 상황에 대해 논의한다. 이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챙기고 회의실을 준비해두는 일을 했다.

    리서치센터 애널리스트들과 법인영업부 직원의 '모닝 미팅'
    산업별 섹터에 배치돼 시니어(Senior)라고 불리는 정식 애널리스트를 도왔다. 그 때문에 RA의 일정과 근무 시간은 어떤 선배 애널리스트와 일하느냐에 달렸다. 애널리스트들은 산업과 개별 업체를 담당하는 섹터 애널리스트들과 경제 흐름이나 시장 변화처럼 큰 틀을 분석하는 매크로(macro) 담당 애널리스트로 나뉜다. 매크로 애널리스트는 투자 전략을 세우는 스트래터지스트(strategist), 국가 안팎의 경제 상황을 분석하고 주식 시장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이코노미스트(economist), 주가지수와 경제 지표들을 이용해 시장 상황을 분석하는 차티스트(chartist), 다량의 자료를 이용해 파생상품을 평가하고 위험도를 진단하는 퀀트(quantㆍquantitative analyst) 등이 있다.

    30분 정도 진행되는 아침 회의를 마치면 주식 시장이 열리는 9시가 되기 전까지 자산운용사나 투자자문사 등 고객에게 대량 메일을 전송하거나, 시니어의 일정을 확인하고, 보고서나 서류 결재를 신청하는 일을 한다.

    증시 개장 뒤에는 시니어가 맡은 기업과 담당 산업의 주가를 지켜보면서 자료를 모은다. 정기적으로 발표되는 기업실적 보고서나 제품 가격, 원자재 가격 등은 꾸준히 파일로 만들어 둔다. 연 사용료가 5000만원이 넘어 ‘블 대리’라고 불리는 블룸버그터미널이나 가트너, 디스플레이리서치 같은 조사기관이 주요한 자료제공처다.

    화학 담당 애널리스트의 일을 도왔다. 에틸렌, 프로필렌, 부타디엔 등 이름도 생소한 석유화학 기초 재료와 중간원료의 가격 변동 내용을 엑셀 파일에 추가해야 했다. 석유화학제품 공시사이트에서 자료를 검색해 일일이 붙여 넣는 식이었다.

    숫자나 가격 단위를 잘못 입력하면, 곧바로 가격 동향 그래프가 기묘한 모양으로 꺾였다. 두 시간 동안 100여개의 가격 자료를 추가하고 나니, 숫자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이렇게 준비한 자료는 시니어가 업황을 분석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사용된다.

    투자기관에서 문의한 사항을 처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자산운용사에서 '최근 반도체 가격 동향과 해외 경쟁사 실적에 대해 궁금하다'고 연락하면, 그에 대한 답변과 자료를 보낸다. 틈틈이 다른 증권사에서 발간한 보고서를 읽고, 회계나 재무 등 필요한 분야를 공부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자료 모으기와 정리하기, 익히기가 일과의 대부분이다. 그 덕분에 RA 생활 3개월이면 엑셀 프로그램의 달인이 된다고 한다.

    최근 석유화학 제품의 원재료가격을 정리하고 있는 화학 담당 RA
    선배 애널리스트가 기업 관계자나 투자 기관 쪽과 식사 약속이 있는 경우, 함께 나간다. 12시부터 1시까지가 점심시간이지만, 상황에 따라 30분 정도 앞뒤로 융통성 있게 조정한다.

    애널리스트들은 기업 탐방을 가거나, 기관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기업 설명회를 하는 등 외부 활동도 자주 한다. 관련 산업 학회에도 참석해 시장 동향을 파악하러 나서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료 수집처럼 손이 많이 가거나 서류 제출 같은 잡무를 대신 할 RA가 있는 것이다.

    자료 정리를 하다 보면 오후 6시가 된다. 저녁 시간에는 보고서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재빠르게 식사를 마쳐야 한다. 시니어와 함께 기업 분석 보고서를 끝내면, 다음날 배포되도록 증권사 내부 시스템에 전송한다. 시니어의 일정을 미리 확인하고, 차량이 필요할 경우에는 예약도 해 둔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대개 10시에서 11시 사이다. 입사 1년차인 RA들에게 물었다. “어떤 능력이 제일 중요한가요?” 몇 초도 고민하지 않고 돌아온 답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체력”이란 말이었다. 긴 업무 시간을 버텨낼 체력이 가장 필요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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