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휴대전화 요금 납부를 깜빡 잊은 직장인 최모씨는 연체 요금을 확인하느라 요금센터 상담원과 통화를 시도했다가 스무고개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자동응답시스템(ARS) 안내 때문에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안내에 따라 "휴대전화면 1번, 유선전화면 2번을 눌러라"는 지시에 1번을 누르자, 전화번호를 입력하라는 안내가 나왔다. 전화번호를 입력하니 "입력한 번호가 맞으면 1번, 다시 입력하려면 2번을 눌러라"는 안내가 나왔다. 이어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라는 안내가 나왔고, "입력한 번호가 맞으면 1번, 다시 입력하려면 2번을 눌러라"는 안내가 앵무새처럼 반복됐다. 연체 요금을 확인하고 상담원 연결을 선택하자 전화번호와 주민번호를 입력하라는 안내가 다시 나왔다.
최씨가 이날 상담원과 연결될 때까지 기다린 시간은 대략 4분여. 전화번호와 주민번호를 각각 두 번 입력한 것을 포함해 모두 10단계를 거친 뒤에야 상담원과 연결됐다. 그는 "상담원 연결이 인내력 테스트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기업이나 공공 기관이 고객의 불만을 처리하기 위해 운영하는 ARS 서비스가 오히려 고객 불만을 키우고 있다. 상담원과 통화하려면 수십 번 전화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거나 개인 정보를 지나치게 많이 요구한다는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연결 지연 '통화료 폭탄' 될 수도
해외에서 팔리는 물건을 인터넷 쇼핑몰로 사려던 장모씨도 최근 ARS 때문에 짜증이 났다. 눈여겨보던 물건이 싼 가격에 올라와 서둘러 결제를 끝냈지만, 이후 환불을 요청하려고 고객센터에 여러 번 전화했는데 상담원 연결엔 끝내 실패했다. "통화량이 많으니 잠시 기다려달라"는 ARS(자동응답시스템) 안내를 10분 동안 듣고 있었는데 "상담원 연결이 어려우니 다음에 다시 전화해 달라"는 안내와 함께 갑자기 전화가 끊겼다.
광주광역시에서 IT 기기 유통업체를 운영하는 조모씨는 최근 휴대전화 할부 잔액을 알아보려고 통신사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상담원 연결을 기다리다 2시간 가까이 휴대전화를 들고 있어야 했다. 조씨는 "나중엔 '누가 이기나 보자' 하는 오기(傲氣)가 생기더라"고 말했다.
더한 문제는 상담원 연결 지연이 고객에게 금전적 피해까지 안긴다는 점이다. 기업 대부분은 ARS 안내 시작 때부터 부과되는 통화료를 고객에게 절반 정도 떠넘긴다. 그러면서 이런 사실을 고객에게 미리 알리지도 않는다. 휴대전화로 콜센터 상담원 연결을 시도하면 1시간당 2000원이 넘는 통화료를 부담할 수도 있다. 정학규 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 팀장은 "통화료 관련 내용을 사전에 알리는 기업은 손에 꼽을 정도"라면서 "상담원 연결 지연에 따른 보상책 마련을 적극 검토할 때"라고 말했다.
◇정부 가이드라인은 '무용지물'
지난해 외국계 은행으로부터 부동산 대출을 받은 직장인 김모(40)씨. 중도 상환을 문의하려고 이달 초 은행 고객센터로 전화해 ARS 안내를 듣다 중간에 전화를 끊어 버렸다. 금융 상품 광고를 들은 뒤 상담원 연결 버튼을 누르자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라는 안내가 나왔기 때문.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지 않고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조차 없었다. 개인 정보 유출을 걱정한 김씨는 결국 다음 날 회사 근처에 있는 은행 점포를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금융감독원은 개인 정보 유출 사고가 끊이지 않자, 지난 5월 ARS 안내 때 단순 금융 상담에는 주민등록번호 입력을 강요하지 말라는 '금융회사 ARS 운용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6개월이 지났지만, 적지 않은 금융회사가 여전히 주민번호 입력을 요구한다. 일부 금융회사는 주민번호를 입력하라는 안내 뒤 일정 시간이 지나야만 '주민등록번호 입력을 원하지 않으면 별표(*)를 눌러라'는 안내를 내보낸다. 주민등록번호 입력을 사실상 강요하는 '꼼수'를 쓰는 것이다.
방송통신위원회도 지난 2009년 ▲상담원 연결 기능 강화 ▲서비스 대기 시간 최소화 ▲이용료 사전 고지 등을 담은 'ARS 운영 개선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하지만 여전히 '상담원 연결이 어렵다'는 소비자 불만이 끊이지 않는다. 임은애 금감원 조사역은 "주민등록번호 입력은 인권 침해 소지가 있는데, 단순 금융 상담 때마저 이를 요구하는 금융회사가 있다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ARS에 대한 불만이 끊이지 않는 것은 많은 기업이 고객센터에 적극 투자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당수 중소기업은 고객센터에 상담원 2~3명만 두고 상담 전화를 하루 수백 건 처리하게 한다. 정기주 전남대 경영학부 교수는 "소비자의 기대 수준은 점점 높아지는데, 고객센터의 경쟁력이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면서 "고객센터에 대한 나쁜 기억이 소비자를 등 돌리게 만든다는 사실을 기업들이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