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서울 용산의 원효 전자상가. 금요일 오후 시간대이지만, 컴퓨터를 사러 온 손님보다는 박스를 실어나르는 판매상들만이 분주했다. 3층까지 약 700여개에 달하는 매장을 통틀어 손님은 채 10명도 되지 않았다. 상인들은 최근 PC 가격이 너무 올라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고 하소연했다. 그들은 최근 HDD(하드디스크드라이드)의 극심한 가격 인상도 이에 한몫 했다고 혀를 내둘렀다.
태국의 홍수로 PC에 들어가는 저장장치 하드디스크 드라이브(HDD)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지난 7월 말 태국에서 발생한 홍수 여파로 현지 HDD 공장이 물에 잠겨 생산 차질을 빚자, 지난달 20일을 전후로 약 2주 만에 HDD 가격이 2~3배가 뛴 것. 일선 상인들은 중간 도매상들이 HDD의 품귀현상을 감지하고 지난달 중순쯤부터 일찌감치 사재기에 들어갔다고 호소했다.
이 때문에 평균 5만~7만원에 구매할 수 있었던 500기가바이트(GB) HDD가격이 하루 1~2만원씩 올라 현재는 12만~17만원까지 폭등했다. 다나와에 따르면 500GB짜리 웨스턴디지털의 ‘Caviar Blue WD5000AAKX’모델은 지난달 3주째 5만원에서 최근 12만6000원까지 250% 올랐다. 같은 용량의 ‘Caviar Blue WD10EALX’는 7만1000원에서 17만8000원까지 250% 뛰었고 같은 기간 동일한 회사의 3테라바이트(TB) ‘Caviar Blue WD30EZRX’ 모델은 20만2000원에서 36만원까지 180% 치솟았다.
상황은 강변테크노마트도 마찬가지였다. HDD가격이 급상승하자, PC완제품뿐만 아니라 특히 조립PC 시장은 그야말로 폭격을 맞았다. 삼성과 LG 등 PC완제품을 파는 곳은 평균 30% 정도 손님이 줄었고 조립PC 판매점은 아예 파리만 날리는 상황. 강변테크노마크에서 조립PC를 판매하는 구영범(가명)씨는 “지난달까지만 해도 하루 평균 손님이 3명 정도 됐는데 지금은 하루에 한명도 없다”면서 “조립PC를 사는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30~40만원대 PC를 선호하는 데 HDD처럼 부품 가격 하나가 7~8만원 올라버리니 누가 조립PC를 사겠냐”고 되물었다. 같은 곳에서 조립PC를 파는 문지훈(가명)씨도 “조립PC를 사는 사람들은 먼저 인터넷에서 부품 가격을 비교하고 사러오는 경우가 많은데 요새 HDD가격이 폭등하고 나서는 아예 문의 전화조차 오지 않는다”고 호소했다.
이달 초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최근 출시되는 PC 전 모델의 가격을 일제히 3~4% 인상했다. 최근 폭등한 HDD가격 인상분을 PC 가격에 반영할 수밖에 없었던 것. 일선 상인들은 11월은 원래 학생들의 수능 시험을 전후로 PC 판매 성수기인데 요즘에는 그런 수요조차 없다고 한탄했다. 강변테크노마트의 삼성전자 판매대리점에 근무하는 유승민(가명) 씨는 “예전에는 하루 평균 30명 정도 손님이 왔는데, 지금은 10명 정도밖에 안 된다”면서 “PC가격을 보고 발길을 돌리는 손님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가격이 오른 신형 PC보다 가격이 그대로인 구 모델을 찾는 손님들이 늘어나는 기현상도 보이고 있다. 같은 곳에서 LG PC를 판매하는 배형준(가명)씨는 “구 모델은 아직 재고가 2~3개월 정도 남아 있다”면서 “무엇보다 신형보다 가격이 저렴해 손님들의 문의가 많다”고 말했다.
또 HDD가격 인상에 외부 저장장치인 외장하드디스크(외장HDD)나 네트워크상에서 교류할 수 있는 저장장치 넷하드(NAS) 가격도 덩달아 오르고 있다. 실제 가격비교사이트 다나와에서 거래되는 1TB 외장HDD가격은 최근 2주간 평균 12만원에서 15만원으로 갑자기 올랐다. 업계관계자들은 HDD가 내달 초 20만원까지 오를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NAS 또한 최근 한달만에 1~2만원이 올랐다.
현재 태국은 전 세계 HDD물량의 40% 정도를 생산하는 세계 최대 HDD 물류 기지이다. 세계 최대 HDD 생산업체 웨스턴디지털은 전체 HDD 생산 물량의 60%를 이곳에서 만들고 있으며 씨게이트 역시 절반가량을 태국에서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홍수 피해로 씨게이트는 아예 하드디스크 공장에 부품 공급을 중단했고 웨스턴디지털과 도시바는 태국 공장 가동을 임시로 멈췄다고 발표한 바 있다.
시장조사전문업체 아이서플라이는 최근 태국 홍수로 4분기 HDD 출하량이 1억2500만대로 3분기에 비해 28% 감소하고 이는 10% 이상의 HDD 가격 상승을 초래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또 웨스턴디지털이 세계 최대의 하드디스크 제조사 지위에서 밀려날 수 있다고도 예상했다. 최근 디스플레이서치도 “태국 홍수에 따른 HDD 부족 현상이 생각보다 심각하고 특히 공급망 가운데 HDD에 들어가는 모터의 복구 계획이 없어 11월 중순이나 12월부터 HDD 생산 차질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라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HDD가격 인상이 최소 내년 1분기까지는 계속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홍수 피해 복구작업이 언제 끝날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이서플라이는 HDD의 설비 복구까지는 적어도 6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