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2월 대전에서 납품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H사의 52m 고가 사다리 소방차의 사다리가 두 동강 나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 후 소방방재청이 조사한 결과 낡은 자재를 사용한 데다 용접 상태도 엉망이었다. 소방방재청 관계자는 "당시 최저가 낙찰제로 4억원에 낙찰받은 업체가 다시 3억원에 하도급을 줘서 납품한 것으로 밝혀졌다"며 "최저가 낙찰제는 가격만 싸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일단 현금 확보를 위해 싸게 낙찰받고 하도급 업체를 쥐어짜는 문제가 발견됐다"고 말했다.

소방방재청은 작년 3월 품질이 검증된 제조업체만 참여할 수 있도록 입찰 제도를 바꿨다. 그러자 다소 가격이 높아도 기술력 있는 업체들이 유리해지면서 일반 소방차의 대당 낙찰 가격이 2009년 1억3000만원 선에서 작년 1억6000만원 선으로 올라갔다. 그래도 소방방재청이 보는 적정 가격인 2억2000만~2억3000만원에는 못 미친다. 업계에선 2~3개 업체의 소방차 제조 기술이 외국과 비견할 만하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여전히 13~14개 업체가 무더기로 입찰에 참가하면서 가격을 낮추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에선 일반 소방차가 대당 6억원 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저가 낙찰 후 하도급 업체 쥐어짜기

각종 공공 공사에서도 '싼 게 좋다'는 식으로 저가 낙찰이 난무하면서 부실 기업을 양산하고 있다. 작년 3월 '영산강하구둑 구조개선 사업'에 N건설은 1033억원의 입찰 금액을 써 넣어 낙찰을 받았다. 예산(2052억원)의 50.32%에 불과한 금액이었다. 이 회사는 결국 실시 설계 도면도 제출하지 못한 채 같은 해 4월 기업회생 절차에 들어가 버렸다. 이 회사는 그동안 최저가 낙찰제로 낙찰받은 공사가 41건이나 됐다. 조준현 대한건설협회 계약제도실장은 "업체들은 최저가로 낙찰을 받으면 일단 손해를 보더라도 직원 월급이라도 줄 수 있지만, 결국 적정 이윤을 확보하지 못해 기술 개발은커녕 회사문을 닫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김현국 기자 kal9080@chosun.com

공정거래위원회·지식경제부 등이 중심이 돼서 정부가 대기업·중소기업의 상생(相生)을 요구하는 가운데, 정작 공공 부문에서 '무조건 싼 것만 찾아라'는 최저가 낙찰제로 기업들을 쥐어짜고 있다.

대한건설협회에 따르면 작년 최저가 낙찰제로 낙찰자가 선정된 공공 공사의 평균 낙찰률(예정 가격 대비 낙찰 가격)은 71.78%로 전년(73.01%)에 비해 1.23% 포인트 떨어졌다. 업계에선 이 비율이 80%는 돼야지 손해를 보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최저가 낙찰제 사업장의 경우 저가 낙찰을 만회하려고 무리한 공기 단축을 시도하거나 불법 체류 중인 외국인 근로자 투입을 늘리면서 산업재해가 빈번하다. 2009년 재해율 상위 10%에 포함된 공공 공사 21개 현장 중 최저가 낙찰제로 사업자가 선정된 현장이 19개에 달했다.

◆"최저 가격 아닌 최고 가치를 따지는 입찰 제도 필요"

최민수 건설산업연구원 건설정책연구실장은 "최저가 낙찰제 아래서는 기술력 없는 업체가 저가 수주해서 그 손실을 하도급 업체나 장비 업체, 자재 납품 업체 등에 전가하고 다시 근로자에게 저임금을 줄 수밖에 없어 사회적 약자의 피해가 확대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소방차 등 공공 물품 구매에서도 저가 낙찰로 볼 수 있는 낙찰률 70% 이하 낙찰 건이 늘어나고 있다. 조달청 물품 계약에서 낙찰률 70% 이하 비율은 2008년 0.72%, 2009년 1.21%, 작년 2.11%로 증가했다. 기업들은 저가에 맞추기 위해 질 나쁜 부품을 사용하기도 한다. 2009년엔 학교 식수대를 세우는 기둥에 쓰이는 스테인리스강을 조달청에 납품하는 15개 업체 중 3개 업체가 저가의 중국산을 국산으로 속여 납품했다가 3조5459억원을 환수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달청 관계자는 "최저가 낙찰제는 경쟁을 촉진해 가격 경쟁력을 높이는 측면이 있어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며 "하도급 업체 등에 저가 낙찰의 손해를 떠넘길 수 있는 구조가 문제라서 그 부분의 해법이 있는지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는 현재 300억원 이상 공공 공사에 대해 적용하는 최저가 낙찰제를 내년에 100억원 이상 공공 공사로 오히려 확대할 예정이다.

유한주 숭실대 교수는 "입찰을 할 때 불량률 등 품질을 따질 수 있는 지표를 넣어서 가격이 조금 높더라도 품질이 좋은 제품을 공공 기관이 사 줘야 납품 기업들이 적정 이윤을 챙기고 경쟁력도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미국·일본 등 선진국은 2000년대 초반부터 최저 가격(best price)이 아니라 품질도 고려해 적정한 최고 가치(best value)를 따지는 방식으로 공공 입찰 제도를 바꾸고 있다.

☞최저가 낙찰제

공사나 물품 납품 입찰에서 다수의 입찰 참가자 중 가장 낮은 가격을 제시한 입찰자에게 공사나 물품 납품을 맡기는 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