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찾아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나파(Napa)밸리. 유명 와인 생산지답게 마을 입구부터 쿰쿰하게 포도 익히는 냄새가 진동했다. 매년 이맘때 나파밸리는 포도 수확이 한창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승용차를 타고 1시간 반 만에 새벽 무렵 도착한 포도밭 '로터스 빈야드'에는 유니폼 차림의 일꾼들이 한창 포도를 따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내리쬐기 전 시간이 한창 숨 쉬는 신선한 포도를 따기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로터스 빈야드'는 국내 기업 동아원이 투자해 세운 와이너리(양조장) 다나 에스테이트가 소유한 밭 중 하나다. 세계 최고의 와인 평론가인 로버트 파커가 지난해 100점을 매긴 와인이 생산되는 현장이다.
◆꼼꼼한 수(手)작업으로 '명품' 와인
"자, 여기 건포도처럼 쪼그라든 부분 보이시죠? 그 부분이 50%가 넘는 포도를 우선 따 내는 겁니다. 탱탱한 알맹이가 가득한 포도는 2차로 수확할 것들이니 놔두세요."
'다나 에스테이트'의 생산 책임자 캐머룬 보터(Vawter)의 이런 지시가 떨어지자 일꾼들의 손길이 바빠졌다.
이들은 포도에 붙어 있는 잔가지와 줄기, 각종 잔여물을 제거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런 작업은 노련한 숙련공들이 하고 있었다. 포도 알갱이들이 워낙 끈적끈적하고, 잔여물이 많이 붙어 있어 생각보다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숙련공들은 일일이 손으로 발효 직전에 즙을 걸러내곤 했다. 캐머룬 보터는 "나파밸리 가운데 고급 와인을 만드는 곳일수록 기계보다는 최대한 수작업에 의존한다"고 말했다. '디오르'나 '샤넬' 같은 명품 브랜드가 '가죽 손질' '바느질' '장신구' 같은 분야별 장인(匠人)들의 손을 통해 탄생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캘리포니아 와인 드림'의 주역은 부호들
'다나 에스테이트'처럼 나파밸리의 최고급 와인 제조업자들이 '수작업'에 공을 들이는 것은 '와인 일번지'인 프랑스 보르도에 대항한다는 목적이 강하다. 포도 품종이나 제조방식이 보르도와 비슷하면서도 역사와 전통에서 한참 뒤지는 나파밸리 와인 제조업자들이 평론가들의 인정을 받으려면 더 자연 친화적이고 손이 많이 가는 제품을 내놓는 게 지름길이라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수작업을 많이 하면 그만큼 비용은 많아진다. 나파밸리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와인에 미쳐' 많은 재산을 쏟아붓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부동산중개업 등으로 큰돈을 번 할란이나 세계적인 경매사 겸 예술품 수집가인 앤 콜긴, 건축가인 바트 아라호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와인을 만들어 다수의 와인 평론가들에게 높은 평점을 받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바트와 다프네 아라호 부부는 "와인을 통해 나의 열정과 흔적을 남기는 일을 평생 꿈꿔 왔다"고 말했다.
◆'주말 농장형 사교클럽'에 세계 유명 인사들 몰려
나파밸리가 자랑하는 또 다른 특징은 사교클럽 형식으로 운영되는 나파밸리 리저브. 나파밸리에 와이너리는 갖고 싶지만 여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일정 규모의 와인 밭을 떼어 주고 와인을 생산토록 하는 방식이다.
이곳의 필립 노플릿(Norfleet) 디렉터는 "보증금으로 최소 15만달러를 내야 하지만 대기번호를 받아야 할 만큼 인기 만점"이라며 "영화배우인 로버트 레드퍼드,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 사이클 스타 랜스 암스트롱 등 유명 인사들이 가입해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 4명을 포함해 현재 총가입자는 450명 정도이다.
할란, 콜긴, 스트리밍 이글 등 나파밸리의 최고급 와이너리 소유자는 모두 이곳에 자동 가입돼 있고, 다나 에스테이트를 이끄는 운산그룹 이희상 회장도 포함돼 있다.
이희상 회장은 "파티와 사교문화가 중요한 미국에서 성공하려면 사교클럽 활동이 중요하다"며 "로버트 파커의 와인 평가에서 앞으로 3년 연속 100점을 맞아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