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방계그룹이었던 새한그룹의 이재찬(46) 전 새한미디어 사장이 18일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삼성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회장의 손자이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조카다. 삼성이라는 국내 최대그룹에서 분리돼 나와 한때 재계 서열 20위권에 들었던 새한은 외환위기를 거치며 그룹이 완전 공중분해된 데 이어, 오너 경영인 중 한 명이 자살하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새한그룹의 흥(興)과 망(亡)
새한그룹은 이병철 회장의 차남인 고(故)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이 설립한 새한미디어에서 출발했다. 이창희 회장은 1966년 당시 삼성그룹 소유의 한국비료 사카린 원료 밀수 사건에 연루돼 수감 생활을 하고, 나중엔 부친인 이병철 회장의 경영 복귀에 반기를 들면서 삼성그룹 경영에서는 사실상 배제됐다. 이후 그는 마그네틱미디어코리아를 설립해 독자 경영의 길을 걸었고, 1977년 인수한 새한전자를 합쳐 1980년 새한미디어를 출범시키며 재기에 나섰다. 하지만 1991년 58세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숨졌다.
이창희 회장 사후 새한은 1995년 삼성그룹으로부터 분리된 제일합섬을 넘겨받아 기존의 새한미디어와 함께 그룹 체제를 갖추었다. 1996년 CI(기업 이미지 통합)작업을 통해 그룹명을 '새한그룹'으로 정하고, 이창희 회장의 부인인 이영자(73)씨가 회장, 장남인 이재관씨가 부회장을 맡아 경영을 이끌었다. 그룹체제를 갖춘 뒤 새한은 공격적인 경영으로 그룹의 외형 확장에 나섰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IMF 외환위기를 맞아 구조조정에 주력했으나, 새한은 오히려 구미공장에 투자하는 등 대대적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계열사 수도 12개까지 늘었으며, 자산 규모로 재계 27위까지 올랐다.
무리한 확장은 곧 큰 화를 불러왔다. 1995년 말 7000억원대이던 부채가 1998년에는 1조7000억원대로 급증했다. 주력사업인 화섬과 비디오테이프 경기도 침체되며 경영 손실 규모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새한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오랜 협력관계를 유지해온 일본 도레이사로부터 5억달러의 외자를 유치하며 일부 사업을 떼내 '도레이새한'을 설립했으나 위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급기야 채권 금융기관들이 자금회수에 나서며 코너에 몰린 상황에서 새한그룹은 2000년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이재관 부회장은 작은아버지인 이건희 회장의 지원을 기대했으나, 오히려 삼성의 금융 계열사들이 다른 곳보다 먼저 자금 회수를 하는 바람에 최악의 상황에 몰렸다. 결국 이재관 부회장과 이재찬 사장 등 오너 일가는 회사 지분과 자택 등 사재(私財)를 전부 내놓고 새한그룹 경영에서 완전 손을 뗐다. 새한이 그룹 형태를 갖추고 아들 형제가 경영을 맡은 지 5년 만이었다.
새한그룹의 주력사였던 ㈜새한은 채권단 관리에 있다가 2008년 웅진그룹이 인수해 현재는 웅진케미칼로 사명을 바꾸었다. 새한미디어는 여전히 채권단 관리 아래에서 매각 작업이 진행 중이며, 지난 5월 GS그룹 계열인 코스모화학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돼 협상이 진행 중이다. 도레이새한은 도레이가 지분을 전량 인수해 현재는 도레이첨단소재로 사명이 바뀌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33세의 젊은 나이에 그룹 경영을 맡은 이재관 부회장의 경험 부족이 그룹 해체를 불러왔다"고 말했다.
◆구속, 자살…불운한 오너 형제들의 행로
새한 오너 형제들의 불운은 그룹 해체와 경영권 상실로 끝나지 않았다. 이재관 부회장은 워크아웃 직전 분식회계를 통해 대규모 불법 대출을 받은 혐의로 2003년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의 실형을 받았다. 이재찬 사장은 연예·엔터테인먼트 사업에 관심을 갖고 '디지털미디어'라는 계열사를 통해 드라마·음반 제작 사업을 벌였으나, 이 회사 경영권도 잃었다. 디지털미디어에서 이재찬 사장과 함께 일했던 예당컴퍼니 신용열 이사는 "이재찬 사장은 경영에서 물러난 뒤 직접 사업을 하지는 않고 투자하는 데 주로 관심을 갖고 있었다"며 "최근에는 MP3 음원을 대체할 수 있는 사업을 검토 중이었다"고 말했다.
이들 형제는 새한그룹이 해체된 뒤 삼성·CJ·신세계·한솔 등 범(汎) 삼성가(家) 모임에도 잘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가의 한 관계자는 "이재관 부회장 형제들은 지난 2월 호암 탄생 100주년 행사 때도 참석하지 않은 걸로 안다"며 "이들은 가족 모임에도 잘 나오지 않고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