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chosun] [한식의 위기] 스파게티·스시에 밀려 한정식당이 사라진다

입력 2009.01.16 18:07 | 수정 2009.01.18 09:02

호텔 한식당 경영 악화로 잇달아 폐업… 특1급 18곳 중 4곳만 남아
조리시간 길고 인건비 등 원가 비중 높아 일반식당도 경영난 심각
<이 기사는 weekly chosun 2040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정부가 지난해 10월 ‘한식 세계화’를 공식 선포하고 관련 정책 마련에 나섰지만 국내 특급호텔 한식당은 오히려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드라마 ‘대장금’ 등을 통해 한류 열풍이 아시아를 휩쓸면서 한식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외국인들이 제대로 된 고급 한식을 맛볼 기회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관광호텔업협회에 따르면 국내 특1급 호텔 18곳 중 메이필드, 롯데(소공동), 워커힐, 르네상스서울 호텔 등 4곳만이 전문 한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호텔들은 경영수지가 악화되면서 모두 한식당 운영을 포기했다. 강남과 광화문 일대에 자리잡은 20여곳의 특2급 호텔에서도 한식당이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특급호텔들은 1990년대 말까지 대부분 직영체제로 한식당을 운영해 왔으나 대형 패밀리레스토랑 등 외식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경영이 악화됐다고 한다. 일부 호텔에서 임대형식으로 운영해 오던 한식당조차 최근 들어 문을 닫고 있는 추세다.

30년 전통을 자랑하던 코리아나호텔 한식당 ‘아리랑’도 지난해 12월 15일 경영악화로 문을 닫았다. 아리랑의 김치찌개와 비빔밥은 광화문 일대 공직자와 대기업 직원 등으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경영 수지가 악화되어 결국 폐업 결정이 내려졌다.

워커힐 호텔 한식당 '온달'의 코스요리
코리아나호텔의 한 관계자는 “호텔 오픈 당시부터 운영돼온 한식당이 경영 악화로 문을 닫아 직원들도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최근 들어 호텔 투숙객들도 한식당보다 양식과 중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외국인 여행객의 다수를 차지하는 중국인과 일본인들은 주로 조식을 호텔에서 해결하는데, “아침 식사로 한식을 찾는 이는 매우 드물다”는 게 호텔 관계자의 설명이다. 대부분의 호텔들은 양식 뷔페 정도로 조식을 마련하는 게 일반화돼 있다.

한식당 자리에 이탈리아·프랑스·일식당
손님 급감해 주류 판매에 의존하는 곳도

특급호텔에서 한식당의 입지는 좁아지는 대신 이탈리아나 프랑스식 전문식당이 그 자리를 밀고 들어오고 있다. 남산 그랜드하얏트호텔은 기존 한식당 대신 프랑스식 레스토랑이 운영되고 있고 밀레니엄서울힐튼의 경우 한식당이 사라진 자리에 이탈리아식당이 들어섰다. 남북장관급회담 등 국제 행사가 잦은 신라호텔을 대표하는 식당도 중식당 ‘팔선’이다.

삼청동 '두레 한정식' 코스요리
관광호텔업협회의 한 관계자는 “특급호텔에서 한식당은 적자가 누적돼 점차 사라지는 추세”라며 “일부 특급호텔에서 명분상 한식당을 계속 운영해 가고 있지만 수익이 목적이라기보다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일부 특급호텔의 한식당 중 흑자를 유지하는 곳도 있다. 쉐라톤그랜드워커힐호텔의 한식당 ‘온달’은 외국인 고객을 대상으로 한 한식 마케팅에 성공한 케이스로 꼽힌다. 하지만 워커힐 측도 고품격 한식당이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워커힐호텔의 한 관계자는 “한식을 발전시키기 위한 전문적인 교육과 국가적 대책이 절실하다”며 “이대로 방치한다면 제대로 된 한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이 아예 사라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한식의 위기는 특급호텔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정식 전문식당들도 음식 재료와 인건비 등 원가부담이 큰 데다 내국인의 선호도가 떨어져 경영수지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장원’ ‘두마’ ‘향원정’ 등 서울 시내에서 대표적인 한정식 식당들도 최근 경기 악화로 고객이 50% 가까이 줄었다고 한다. 일부 한정식 식당은 한식이 아닌 주류 판매에 의존해 수익을 맞추고 있는 형편이다. 유명 한정식 식당 중에서는 아직까지 경영 악화로 문을 닫은 곳은 없지만 직원 수를 줄이거나 원가절감을 위한 긴축경영에 들어간 상태다.

D 한정식 식당 김모 사장은 “원가부담은 계속 커지고 있지만 가격을 올릴 수는 없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손님이 줄어 직원을 최소화해서 운영하고 있다. 경제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버티는 데까지 버텨볼 작정”이라고 말했다.

한식은 대표적인 슬로푸드다. 양식과 달리 음식에 들어가는 재료가 복잡하고 사전 준비를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과 인력 투입이 많을 수밖에 없다. 중식과 일식 등 외식 식당들이 즉석에서 음식을 만드는 것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다. 때문에 한식당의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과중할 수밖에 없고, 불경기를 맞으면 이것이 식당 운영에 치명타로 이어지는 것이다. 가짓수 많은 상차림과 까다로운 조리법, 지역별로 다른 음식문화 등도 한식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원인으로 꼽힌다.

D 한정식 식당 김 사장은 “한식은 미리 만들어서 숙성시켜야 하고 싱싱함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투입돼야만 하기 때문에 운영이 쉽지 않다”며 “요즘 한식이 외면당하면서 요리사 지망생들도 한식 전공을 회피하고 있어 젊은 주방장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한식 세계화에 도전했던 ‘가온’ ‘낙낙’
외국인 호평 불구 3년 만에 결국 휴업

작년 말에는 ‘한식 세계화’를 목표로 내걸고 한식업에 뛰어든 대표적인 업체들도 대부분 문을 닫아 정부의 ‘한식 세계화 선포 원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광주요 조태권 회장이 2004년부터 강남에서 운영해온 한식당 ‘가온’과 ‘낙낙(樂樂)’도 지난해 12월 모두 휴업에 들어갔다. 광주요 측은 “일시적 휴업”이라고 말하지만 한식의 위기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식 전문 레스토랑인 가온과 낙낙은 정통 한식을 외국인들이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음식 구성을 고급스럽게 변형해 오픈 당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조태권 회장은 광주요에서 직접 생산한 도자기에 한식을 담고, 와인 대신 한식과 잘 어울리는 전통 소주 ‘화요’를 개발하는 등 독특한 한식 문화 조성에도 정성을 쏟았다. 조 회장은 “식문화 선진국의 경우를 보면 음식을 담는 그릇과 이와 어울리는 술, 그리고 건축물까지 조화를 이루게 마련”이라며 “결국 음식의 발전이 하나의 집약된 문화로 나타난다”고 강조해 왔다.

가온과 낙낙의 주방장들은 작년 초 중국에서 열린 음식 경연대회에서 만두를 소재로 우승을 이끌어냈고, 우리 음식을 알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녔다. 지난해 11월 한국국제교류재단 주체로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열린 한식 만찬에서도 고급 한식 요리를 선보여 브라질 고위 인사들의 극찬을 받았다.

하지만 가온과 낙낙은 한식 세계화의 전초 기지라는 기치가 무색할 만큼 내국인들로부터는 관심을 받지 못했고 오픈 3년 만에 결국 폐업 위기에 몰렸다. 가온과 낙낙에서 선보인 10만원 안팎의 한식 코스는 ‘사치’라는 냉담한 인식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가온의 한 관계자는 “한국 사람들은 고급 일식집이나 중식당에 가서 비싼 음식을 먹는 것은 용인하면서도 고급스럽게 만든 한식은 비싸다며 외면해 버리기 일쑤”라며 “이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식문화에 대한 인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세계 식산업 규모 5000조원… 자동차의 5배
일본은 50년 전부터 세계화 나서 해외시장 공략

2008년 말 현재 전세계 식산업 규모는 5000조원을 넘어서고 있다. 자동차와 IT가 차지하고 있는 전세계 산업 규모를 훨씬 상회하는 수치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한식 산업에 대한 체질개선을 하지 않고서는 식산업이 창출하는 막대한 경제적 부를 따먹기가 어렵다고 분석하고 있다.

식산업 육성에 가장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는 일본은 1960년대부터 정부 주도로 음식 세계화를 추진해 왔고 세계 각지의 음식을 일본식으로 변형하며 시장을 개척했다. 돈가스, 오므라이스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심지어 일본은 김치와 비빔밥 등 우리 전통 음식을 일본식으로 바꿔 해외 시장 진출에 나서고 있다.

한식의 위기는 국내에서 번창하고 있는 외식업체의 유연한 경쟁력에서도 느껴진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 음식들이 오히려 한국식으로 모습을 바꾸고 우리 식탁을 점령해 가고 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서울 신촌 일대에서 유명 맛집으로 자리잡은 돈가스 식당 ‘신돈갓’의 경우 일본식 돈가스를 한국 사람의 입맛에 맞게 변형했고 철저하게 예약제를 실시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터키가 원조인 케밥이 세계적 음식이 될 수 있었던 비결 역시 각국의 입맛에 맞게 유연한 변화를 추구한 데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 국내에 진출한 케밥도 고기 원료를 기존 양고기 대신 닭고기와 돼지고기를 사용하는 등 한국식 변형을 가하며 젊은이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케밥 프렌차이즈 업체의 한 관계자는 “우리 입맛에 맞게 변형된 케밥은 젊은층이 좋아하는 메뉴이기 때문에 불황에도 불구하고 뷔페에 빠지지 않고 들어간다”고 말했다.

물론 정부도 한식 세계화를 전담할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하는 등 한식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해 말에는 국립농업과학원에 한식세계화연구단이 출범하기도 했다. 위기의 한식 문화에 대한 문제제기도 계속되고 있다.

일부 특급호텔도 독창적인 한식 레시피(Recipe) 개발 등 한식 경쟁력 제고에 노력해 나름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워커힐호텔 한식당 ‘온달’이 대표적인 예로, ‘온달’은 아직 전체 고객 중 외국인 비율이 60%를 차지한다. 20년 전통의 ‘온달’이 가진 경쟁력은 메뉴마다 음식 가짓수를 줄이는 등 체계화된 한식 프로그램에 있다는 분석이다. 워커힐호텔의 한 관계자는 “얼마 전 가온이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며 “온달은 한국을 대표하는 한식당으로서 남기 위해 나름의 전략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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