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의 비밀 도청 조직인 '미림팀'이 1997년 대선직전 모 중앙일간지 사주와 모 재벌 간부의 대화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 내용이 보도된 21일 삼성과 홍석현 주미대사, 국정원은 비상한 움직임을 보였다.
◆삼성그룹
삼성은 21일 밤 각 신문·방송 등 언론사들의 보도에 대해 개별적으로 법적 대응한다는 기본 방침을 정했다. 이날 오후까지만 해도 '일단 지켜보자'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날 밤부터 강공으로 선회했다. 이 때문에 언론사별 보도 수위에 따라 대규모 연쇄 소송사태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각 언론사별 보도 내용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법적 대응은 사안별로 달리 적용하겠다는 입장이다. 삼성측은 "신문, 방송에 인터넷 매체까지 모든 매체의 보도가 법적 검토 대상에 포함될 것"이라고 밝혔다.
삼성은 이날 이학수 본부장(부회장) 등 구조조정본부 수뇌부들이 연쇄 마라톤 회의를 가졌다. 삼성은 자신들이 제출한 MBC 방송보도 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이 일부 받아들인 이후 어느 정도 자신감을 찾은 듯하다.
구조조정본부 홍보팀 김준식 상무는 "보도 위법성 여부를 면밀히 검토한 후에 법적 대응을 결정할 예정"이라며 도청내용 보도의 위법성을 법원에서도 인정한 만큼 소모적인 취재경쟁이 확산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룹 구조본 고위 관계자는 "현행법상 도청은 엄연히 불법이며,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만들어진 테이프는 법정에서도 증거물로 채택되지 않는 것이 국내외 판례"라고 말했다.
◆홍석현 주미대사
전 중앙일보 회장인 홍석현 주미대사는 21일 언론들의 보도에 대해 "오래된 일이어서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홍 대사는 주미대사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8년 전이나 9년 전 일이 기억나나"라며 "사적 대화가 녹음된 이상한 테이프를 틀도록 할 수 있겠느냐"고 가처분 신청 취지를 설명했다.
또 삼성 이학수씨와는 "그때야 가끔 볼 수 있는 사이"라며 "어느 장소인지도 모르겠다. 어디서 녹음했다는 건가"라고 되물었다. 이어 MBC 이상호 기자에 대해서도 "일면식도 없다"며 '반론을 요청하는 편지를 MBC에서 보냈는데'라는 질문에는 "편지를 받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떻게 반론을 하느냐"고 반박했다.
홍 대사는 이에 앞서 22일로 예정된 워싱턴 한국특파원들과의 첫 관저 만찬 약속을 취소했다.
◆국정원
국정원은 이날 오전 6시 긴급비상대책회의를 소집, 대책 마련에 착수하는 등 초긴장 상태였다. 일부 관계자들은 새벽 4시에 긴급호출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 간부들은 회의에서 향후 국정원 활동과 정국에 미칠 파장 등을 주로 논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국정원은 긴급회의가 끝나자마자 이날 11시를 전후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의 불법도청 의혹이 제기된 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의 뜻을 밝혔다.
국정원은 이어 "잘못된 과거를 씻어버린다는 자세로 불법도청 의혹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해 한 점의 의혹도 없이 국민들에게 밝힐 것"이라면서 ▲관련자 제재 ▲재발방지책 강구 입장을 밝혔다.
국정원의 한 간부는 "비록 과거의 일이기는 하지만 과거사 진상규명 차원에서 도·감청 의혹을 철저히 조사해 이번 일이 국정원의 신뢰도 저하로 이어지지 않도록 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워싱턴=허용범특파원 heo@chosun.com)